전봉준의 여동생이자 손여옥의 부인 전고개는 동학농민혁명 패전 후, 어떤 인연으로 어린 아들(손규선, 용주 스님)을 이끌고 백양사를 거쳐 강천사로 피신하게 되었을까? 손주갑 선생은 “(아버지가)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정읍 내장사 등에 기거했고”, “처음 백양사로 피신할 때 아버지 나이가 7살”이었다 증언한다.
언뜻 떠오르는 인물이 응운 스님(應雲雨能, 1854~1896)이다.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응운 스님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패전 후 다시 백양사로 돌아왔다. 전고개 일가가 백양사로 피신할 시기인 1894년 말, 혹은 1895년 초 응운 스님은 백양사에 있었다. 즉 일가는 응운 스님을 통해 백양사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응운 스님은 그로부터 1년 넘은 시간이 흘러 1896년 상반기 어느 날 전주 전라감영에 붙잡혀 6월(음력) 처형됐다.
응운 스님이 전고개 일가의 피신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언할 수는 없다. 하여 전고개 일가의 피신 과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몇 가지 단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손주갑 선생은 아버지가 한국전쟁의 여파로 강천사를 내려온 후, 집안에 두 사람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었다고 했다. 한 명이 손화중 장군이고, 다른 한 명이 부친의 큰스님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아버지가 1967년 사망할 때까지 있었고, 당시 손주갑 선생은 고등학생이었다.
필자가 박한영 스님의 사진, 응운 스님과 백학명 스님의 진영을 보여주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강천사의 큰스님
그렇다면 큰스님은 누구일까? 아마도 용주 스님의 은사인 박금호(朴錦湖) 스님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관보(官報)』 기록에 따르면, 순창 강천사 주지가 1925년 10월 7일자로 박금호(朴錦湖)에서 손용주(孫龍珠)로 바뀐다. 그리고 1932년 12월 9일자로 손복주(孫福珠, 손용주의 오기인 듯)에서 박병석(朴秉石)으로 변한다.
박병석은 1935년 강천사 주지를 재임하고, 1942년 창씨개명된 신정목천(新井木川)으로 변화한다. 창씨개명된 신정목천(新井木川)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박병석일 가능성이 높다.
손주갑 선생은 “한국전쟁으로 마을로 내려올 때까지 아버지가 강천사 주지였다”고 기억하고, 김점례 여사는 “당시 강천사에는 두 명의 스님이 있었고, 고숙(용주 스님)이 한국전쟁까지 강천사 주지로 지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두 명 스님 중 한 명은 손용주, 다른 한 명은 박병석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식적인 주지를 다른 이로 기록하고, 실제 주지 역할은 본인이 하는 경우는 많다.
일제강점기 발간된 잡지인 『불교(佛敎)』 50호와 51호에 특별사우로 박금호가 기록되고, 53호에는 손용주(孫龍珠)가 기록되기도 하였다.
![](/news/photo/202502/39230_26591_342.jpg)
박금호 스님
그러면 동학의 후손으로 출가자가 된 손용주의 큰스님, 박금호 스님은 누구일까? 고창 선운사 입구 승탑군에 ‘금호당대선사 행적비(錦湖堂大禪師 行績碑)’가 있다. 비가 건립된 해는 불기(佛紀) 2536년(1992)이다. 비명에 금호 스님이 을미년(1955) 입적했다 하니, 37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선사의 법명은 동일(東日)이요, 속성은 밀양박씨(密陽朴氏)니 장성 황룡면(黃龍面) 출생으로 14세에 출가(出家)하여 순창 구암사(龜巖寺) 설유대사(雪乳大師)를 법은사(法恩師)로 득도(得度)하여 구암사에서 대교과를 수료 비구구족계를 품수(稟受)하고 정읍 내장사 주지로 부임(赴任) 수년에 이(移), 고창 선운사 주지로 부임 다년 이(移), 도솔암 은거하시다 78세 을미(乙未) 7월 13일 입적”
- 금호당대선사 행적비
간략한 기록인데, 비명의 글씨는 이학용(李學庸)이 썼다. 금호 스님의 상좌와 손상좌, 선운사 소임자가 기록된다. 상좌로 전호경(田鎬耕), 손용주(孫容柱), 이홍규(李洪珪), 박병석(朴秉石), 최원주(崔元柱)가 기록되며, 손상좌로 오갑수(吳甲洙), 임학순(任學淳)이 기록돼 있다.
두 번째 상좌 손용주(孫容柱)가 바로 강천사로 피신해 후에 출가자가 된 전고개의 아들 용주(龍珠) 스님이다. 앞서 살폈듯이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순창 강천사 주지는 ‘박금호 – 손용주(두 번째 상좌) – 박명석(네 번째 상좌)’으로 이어지는데, 관보에 손용주의 한자는 용주(龍珠)로 기록된다. 손주갑 선생도 그렇게 알고 있고, 족보에도 용주(龍珠)로 기록된다. 비명의 한자가 잘못 기록된 듯하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박금호는 1914년 7월 28일 내장사 주지로 부임해 1918년 6월 재임한다. 1921년 6월 내장사 주지를 심용성(沈龍聲)에게 물려주며, 1922년 12월 순창 연대암(蓮台庵) 주지로 부임하고 1931년 12월 재임한다. 연대암은 강천사의 부속 암자다.
박금호는 연대암 주지를 하던 기간 중 한동안 강천사 주지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10월 강천사 주지가 박금호에서 손용주로 변화한 기록이 남아 있다. 『관보』에 강천사는 이 시점부터 등장한다.
박금호는 1932년 1월 연대암 주지를 김동수(金東洙)에게 넘기고, 4월 김동수 후임으로 고창 선운사 주지로 부임한다. 선운사 주지와 연대암 주지를 맞바꾼 것이다. 1935년 12월 선운사 주지는 박금호에 이어 진호명이 부임한다. 비명에 따르면 선운사 주지를 마친 박금호는 선운사 도솔암으로 이전하고, 1955년 입적한다. 참고로 도솔암은 ‘석불비결사건’이 일어난 그곳이다.
석전 박한영
동학의 후예 용주 스님, 그리고 용주 스님의 은사인 금호 스님 주위로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1870∼1948) 스님이 아른거린다. 손주갑 선생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전고개와 아들 손규선은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정읍 내장사 등’을 통해 강천사로 이전했다 한다. 이 길은 후에 조선불교의 대강백으로 불렸고, 해방 후 조선불교 초대 교정(현대의 ‘종정’)이 된 박한영 스님의 길이기도 하다. 무리한 추정일까?
![구암사에 있는 석전 박한영 스님의 승탑.](/news/photo/202502/39230_26593_538.jpg)
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박한영 스님은 1912년 기준으로 연대암, 내장사, 구암사, 만일사 주지를 동시에 역임하고 있었다. 모두 정읍과 순창 일대의 사찰이다. 스님은 1915년 3월 연대암, 구암사, 만일사 주지를 재임하는데, 유독 내장사 주지 소임만 1914년 8월 박금호 스님에게 넘겨준다.
박한영 스님과 박금호 스님의 공통분모는 또 하나 있다. ‘구암사(龜巖寺)’와 ‘설유처명(雪乳處明, 1858~1903)’이다. 비명에 따르면, 금호 스님은 “14세에 출가하여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대사를 법은사로 득도했다” 기록한다. “1955년 입적할 때 78세였다”는 비명의 기록을 역순하면 금호 스님은 1877년경 장성에서 출생했고 14살, 즉 1891년경 출가했다. 출가 은사는 불확실하지만,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 스님 문하로 입실하고 그곳에서 어느 기간 불경을 수학한 후 비구계를 받았다.
이제 종걸 스님과 혜봉 스님이 공저한 『석전 박한영』(신아출판사, 2016년)을 따라 박한영 스님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1870년 전주에서 출생한 박한영 스님은 1888년 위봉사 태조암에서 출가했고, 1890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환응탄영(幻應坦泳, 1847~1929) 스님에게 수학한다. 이후 여러 곳에서 수학과 유람을 마치고, 1895년 봄 순창 구암사에 당도한다. 설유 스님을 찾아 구암사에 온 것이다.
![구암사에 있는 설유 스님의 승탑.](/news/photo/202502/39230_26594_616.jpg)
스님은 설유 스님에게 『화엄경(華嚴經)』과 선(禪)과 율(律)을 수학했다. 그해 가을, 26세에 염향사법(拈香嗣法, 처음 설법할 때 법을 전해준 스승을 위해 향을 올리고 대중에게 알리는 의식) 의식을 치루고 설유 스님의 강맥을 계승한다. 설유 스님은 법을 이은 박한영 스님에게 영호(映湖)라는 당호(堂號)를 내려준다. 또 석전(石顚)이라는 호도 물려준다. 엄숙한 의식을 치르고 설유 스님의 법제자임을 공인받은 박한영 스님은 다음 날부터 구암사에서 개강(開講)하여 학인들을 가르치게 된다. 스님은 1896년 8월, 백양사에서 대덕(大德) 품계를 품수한다.
박한영 스님은 1895년 초부터 구암사에 3년 정도 있었고, 1899년 산청 대원사로 청을 받아 이전한다. 제방에서 강학하던 중 1903년, 설유 스님이 입적하자 다시 구암사로 돌아오기도 했다.
남은 이야기
다시 금호 스님 이야기로 돌아오자. 박한영 스님이 구암사에서 설유 스님에게서 수학하고 강맥을 이어받을 즈음, 박금호 스님 역시 구암사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둘은 어떤 인연이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그 인연이 내장사와 강천사의 연대암으로 이어졌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어느 시기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금호 스님과 전고개 일가와의 인연이 맺어진다. 전고개의 아들 손규선은 그즈음 금호 스님을 은사로 출가자의 길에 들어섰을 것이다. 이후 내장사와 강천사, 연대암 주지를 역임한 은사 스님을 따라 옮겨 다녔을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볼 때, 손주갑 선생이 어머니로부터 들었다는 “아버지(용주 스님)가 백양사, 선운사, 내소사, 내장사를 거쳤다”는 증언은 사실을 반영한 이야기다. 은사인 박금호 스님을 따랐던 길임이 분명하고, 그 주변으로는 석전 박한영 스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남는 질문이 있다. 박한영 스님은 전고개와 용주 스님을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본인이 내장사 주지직을 넘겨준 금호 스님의 상좌, 즉 용주 스님이 전봉준의 외조카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까?
짐작하건대 박한영 스님은, 어쩌면 (전봉준 일가의 도피를 도운 것으로 추정되는) 응운 스님은 알았을 것이다. 박한영 스님은 훗날 1940년, 백양사에 세워진 응운 스님 탑비의 글을 지었다. 1925년 최남선과 전라도 사찰 일대를 순례하면서는 운문암 중창을 둘러싼 경담 스님과 김문현, 전봉준과 응운 스님 간 이야기를 함께 들었을 것이다. (혹은 박한영 스님이 최남선에게 이야기해주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응운 스님은 박한영 스님의 법은사가 되는 설유 스님과 동문수학했거나 직간접적 인연이 있었다. 앞선 글 「선운사 비결 사건에 참여한 승려들」에서,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9)이 지은 『선원소류(禪源溯流)』의 화주질에 응운우능과 농은우엽이 있음을 살펴봤다. 화주질 농은우엽 바로 앞에 설유혜오(雪乳慧悟)라는 법명이 기록된다. 박한영 스님이 법을 이은 설유처명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 순창 구암사 사진.](/news/photo/202502/39230_26595_78.jpg)
그리고 1895년, 백양사에는 응운 스님이 있었고 구암사에는 청년 박한영 스님이 있었다. 백양사와 구암사는 행정구역상으로 장성과 순창으로 구분되지만, 산 하나를 두고 앞뒤로 나뉜 사찰이다.
백양사의 응운 스님은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법손을, 구암사의 박한영 스님은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 – 설두유형 – 설유처명’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잇는다. 당시 백양사와 구암사는 꽤 큰 규모로 승려들의 교육이 이루어지며 연담유일과 백파긍선의 법손들이 서로 왕래하던 곳이었다.
마지막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용주 스님의 은사인 금호 스님은 ‘응운 스님과 어떤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혹은 ‘어떤 인연으로 전봉준 일가와 인연을 맺게 됐을까?’이다.
응운 스님과 금호 스님은 장성 출신(응운 스님은 주암마을, 금호 스님은 황룡면)이라는, 또 ‘밀양박씨’라는 실낱같은 줄로 연결되기는 한다. 지금으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지만, 시답지 않은 질문만은 아닐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