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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들은 삶에서 던지는 궁극적 질문인 동시에 인문학과 종교의 근본 주제이기도 하다. 종교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지침이 되는 지혜와 가르침을 ‘경전’으로 담아낸다. 불교에 불경, 기독교에 성경이 있다면, 유교에도 ‘경’이 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과 함께 이들의 내용을 관통하는 사유체계를 제시하는 경전이 바로 『주역』이다.
2월 중순 출간 예정인 『주역(周易)의 눈』은 이선경 회장이 한겨레 휴심정에 ‘나를 찾아가는 주역’으로 연재한 칼럼을 다듬고 원고를 보완해 새롭게 엮은 책이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 자신의 본성과 천명이 무엇인지 『주역』을 통해 그 길을 안내하는 책이다.
“지금이 바로 주역을 읽어야 할 때”라고 말하는 이선경 한국주역학회 회장을 만나 변화의 원리로 미래를 예측하는 점서이자,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치를 살피는 ‘마음 씻는 경전[세심경洗心經]’인 『주역』에 대해 들어봤다.
동아시아 사상의 중심 경전, 『주역』
『주역』은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 사유의 근간을 이뤄온 보편적 사유체계를 다룬 문헌이다. 두루 ‘주(周)’ 바꿀 ‘역(易)’ 자를 써서 ‘두루 통하는 역’이란 뜻이다. 『주역』은 자연의 운행 원리에 근거해 삶의 원리와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형상(象), 글(辭), 점(占)으로 제시한다.
이선경 제17대 한국주역학회 회장은 조선 후기 김항이 주창한 한국의 역학인 ‘정역’ 연구의 일인자 학산 이정호(1913~2004)의 손녀이자, 이동준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딸이다. 동양철학 연구의 정통 계보를 3대째 이어온 저자는 대만국립정치대학에서 ‘주역’을 연구하고, 성균관대에서 「일수 이원구의 역학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이름 ‘선경(善慶)’도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 )에서 따왔다. 이선경 회장이 『주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시점은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사 과정으로 유학하면서부터다.
“학부에서는 주로 성리학을 배웠는데 자주 『주역』이 근거로 인용돼 무슨 말인지 잘 몰랐어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주역』에서의 태극과 음양의 관계를 재해석한 것이라는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풍월을 읊은 거죠. 동아시아의 모든 철학은 『주역』으로 통한다더니, 『주역』을 모르면 동양철학을 제대로 할 수 없겠다는 자각이 생겼어요. 이렇게 시작된 『주역』 공부가 전공이 됐어요. 『주역』을 공부하니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도덕경』 등 여러 문헌의 내용이 하나로 꿰어져 이해됐죠.”
『주역』은 유가 사상의 울타리를 넘고 시대를 초월해 불교, 기독교에서도 깊이 연구됐다. 명나라 지욱(智旭) 선사는 불교의 관점에서 『주역』을 해석한 『주역선해(周易禪解)』를 저술했다. 17~18세기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 신학 및 교리 그리고 서양 수학을 활용해 『주역』을 재해석하는 저작을 내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주역』은 사상적 경계를 넘나드는 동아시아 사상의 중심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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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에 뿌리내린 천지인 삼재론
『주역』에서 동아시아 문화적 특색이 담긴 언어와 사상체계가 바로 ‘음양론’과 ‘천지인 삼재론’이다. 음양론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상생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주역적 사고에서는 양(陽)과 음(陰),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이루고 서로를 낳는다.
“영어로 서랍을 ‘드로우(draw)’라고 해요. 끌어당겨 뽑아낸다는 의미죠. 하지만 ‘여닫이’라고 하면 열고 닫기가 모두 포함돼요. 그게 음양이거든요. 한 존재자의 성립은 상반자의 존재를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반대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것이 음양의 관계 방식, 즉 ‘상반상성(相反相成)’이죠. 음과 양이라는 상반된 힘이 서로 작용했을 때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변화가 바로 생명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변화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천지인 삼재(三才)론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 가장 큰 중심축이 되는 것을 ‘하늘(天)’, ‘땅(地)’, ‘사람(人)’으로 본다. 『주역』에서 이 세상 모든 만물은 하늘과 땅이라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생겨난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천지 부모가 낳은 것들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인간과 형제자매라는 것이다.
“근대 이후 생긴 인간 중심주의는 만물의 영장을 인간이라 보고 다른 것들과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해요. 하지만 『주역』에서는 모든 것들이 천지 부모에게서 나온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에 연대성을 갖죠. 그중 인간은 여타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신령한 존재라는 뚜렷한 위상이 있어요. 이 세상의 만물들이 천지의 뜻을 깨우치고 천수를 누리고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게 『주역』의 관점입니다. 이때 인간주의는 인간 외에 다른 것들을 착취하고 희생시키는 게 아니라 더불어 잘 살아가도록 돕는 인간을 이야기하죠.”
이선경 회장은 한국인의 삶 곳곳에 역(易)의 사유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태극기, 단군신화, 훈민정음이 있다. 그중에서도 훈민정음은 천지인 삼재의 인간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한글의 초성은 ‘하늘’, 종성은 ‘땅’, 중성이 바로 ‘사람’을 상징해요. 초성이 하늘이라는 것은 만물이 처음 시작되는 생(生), 종성의 땅은 만물이 완성되는 성(成)을 의미하죠. ‘강’이라고 하면 ‘ㄱ’은 하늘에 속하고, ‘ㅇ’은 땅에 속해요. 그런데 하늘과 땅만으로는 소리가 안 돼죠. 거기 반드시 중성, 즉 사람이 있어야 해요. 사람이 중간에서 역할을 해주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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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명리’는 알고 ‘주역’을 모르는 시대
『주역』은 우주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철학사상서’이자 음양 원리를 풀이하는 ‘점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간에서는 『주역』을 사주명리(四柱命理)와 혼동하거나 단순히 점술서나 예언서로 착각하기도 한다. 사주는 태어난 연월일시라는 네 기둥의 간지와 오행론을 통해 운세를 예측한다. 반면 주역점은 50개의 시초(蓍草, 점을 치는 가는 막대)나 동전 3개를 활용해 점을 친다.
“사주명리와 주역은 전혀 다릅니다. 『주역』에도 점이 있지만 사주명리와는 점치는 방법도 목적도 다르고 훨씬 더 고차원적이에요. 주역점은 태어난 연월일시는 필요 없고 사주처럼 운명, 숙명을 말하지 않아요. 주역점의 목적은 단순히 길흉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재 내가 처한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주역』에 질문을 던져 지혜로운 통찰을 조언해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죠. 즉 인생을 성숙하게 경영하는 데 목적이 있어요.”
『주역』이 단순한 점서가 아니라 ‘마음을 씻는 경전’으로 불리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하고 가꾸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선경 회장은 귀신의 술사가 아닌, 과학적인 미래관의 철학이 바로 『주역』이라 강조한다.
“주역점은 방향을 제시하지, 결정해 주지는 않아요. 어떤 일에 대해서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방향에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해 줘요. 『주역』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자기 답을 얻는 거죠. 카운셀링 내지는 그런 조언을 주고 지혜를 빌려주는 것일 뿐. 결국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힘이 개입돼야 하죠. 역(易)은 군자를 위한 계책이지, 소인을 위한 계책이 아닙니다.”
이선경 회장은 주역점이 단순히 점서로 오해받는 이유에 대해 “전통의 단절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꼽는다. 오늘날 『주역』이 어떤 의미를 지닌 학문인지 아는 사람이 소수가 되면서, 신비한 권위만 남아 점술가들에게 차용 당하게 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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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정역’
19세기 후반, 일부(一夫) 김항(金恒, 1826~1898) 선생이 『주역』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이해해 주창한 역학사상서인 『정역(正易)』이 세상에 나왔다. 김항 선생은 복희팔괘도(伏羲八卦圖)와 문왕팔괘도(文王八卦圖)를 수정 보완해 이후의 변화를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로 완성했다. 세간에서는 『정역』에 따라 지구의 자연 질서가 극심하게 변화할 것이며, 한국이 세계의 주역이 돼 새 문명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선경 회장은 수천 년 동안 문명을 지탱해 온 바탕이 되는 원리를 제시한 것이 『주역』이라면, 자연 변화와 함께 새로운 천지가 열리며 새로운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 『정역』이라고 설명한다.
“『정역』은 그 전 시대는 인간이 덜 성숙해서 아직 발산해 나가는 봄, 여름 시기라고 봐요. 반면 『정역』은 만물이 다 수렴해 열매 맺는 가을이에요. 즉 진리를 찾으러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진리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거죠. 개개인이 다 깨달음의 주체라는 얘기예요. 모든 사람이 평범하면서 유일한 존재, 즉 황극(皇極)인이라고 하죠. 황은 임금 황(皇) 자인데, 예전에는 임금에게만 썼다면 이제는 모든 사람이 다 황극인이라는 겁니다.
‘天地匪日月空殼 日月匪至人虛影(천지비일월공각 일월비지인허영). 천지는 해와 달이 아니면 빈 껍질이요, 해와 달도 지극한 사람이 아니면 헛된 그림자다.’ 『정역』에 등장하는 구절인데, 불교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부처가 돼야 한다는 말과 상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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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왜 『주역』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돼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결국 『주역』 공부의 목적이에요. ‘징분질욕(懲忿窒欲, 성냄을 징계하며 욕심을 막는다)’이라는 말이 있어요. 징분은 분노를 잘 다스려 멈춘다는 얘기고 질욕은 그 탐욕을 잘 막는다는 뜻이에요. 분노와 탐욕을 잘 조절했을 때 내가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죠.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감정에 내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주역』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진. 유동영
현 시국에 대한 주역의 점과 해석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 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Q 질문
2024년 말에서 2025년이 시작된 지금, 한국사회는 생각지 못한 참사들로 온 국민이 편히 잠들 수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현대사의 굴곡을 거치며 꾸준히 성숙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선로를 이탈할 정도로 퇴보하지는 않을 만큼 성숙했다고 믿는 것이, 대다수 한국인의 인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이번 계엄 사태는 마치 45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한국사회의 성숙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A 점의 결과
恒卦(항괘) 2효(爻)와 3효가 動(동)했다. 이 경우는 3효를 위주로 하고, 2효를 참조해서 점을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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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二, 悔亡.
구이는 후회가 없어지리라.
象曰, 九二悔亡, 能久中也.
「상전」에서 말하였다: “구이가 후회가 없어짐”은 알맞음[中]에
오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九三,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 吝.
구삼은 그 덕을 항상되게 하지 않음이다. 혹자가 부끄러움을 받듦이니,
곧게 하더라도 부끄러우리라.
象曰, 不恒其德, 无所容也.
「상전」에서 말하였다: “그 덕을 항상되게 하지 않음”은 용납될 바가 없다.
* 풀이
우선 항괘를 얻은 것은 다행히 나쁘지 않습니다. 항괘는 항구하다는 뜻이고, 하늘과 땅처럼 항구하게 덕을 지켜나간다는 뜻입니다. 잠깐의 연애가 아니라 장성한 남자와 성숙한 여자가 만나 부부를 이룬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부부의 도는 하늘과 땅처럼 장구한 것이지요.
항(恒)은 항상됨, 즉 늘 그러한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은 고정됐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자연(하늘과 땅)은 때에 맞게 꾸준하게 변화함으로써 균형을 이루고, 그래서 항상된 모습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우레와 바람은 역동적인 변화의 작용이지요.
이를 현재와 관련해 생각해 보면, 한국사회는 대국적 견지에서 꾸준하게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현 상황을 긴 안목에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의 결과에서 3효와 2효는 좀 상반된 내용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은 3효입니다. 3효는 덕을 항구하게 지키지 못해서 부끄러운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3효는 양(陽)의 자리인데, 양의 자리에 양이 있으니, 형식적 정당성은 있지만,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를 지키지 못하고, 꼭대기의 바르지 못한 상육(上六)을 따라가니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상육은 꼭대기에 있어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자중해야 하는 자리인데, 오히려 심하게 움직이니 흉한 사람입니다.
『주역』은 상징과 은유의 언어라서, 해석에는 융통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읽히는 주희의 『주역본의』를 참고해서 풀어보겠습니다. 3효가 중용을 지키지 못하고 치우친 행동을 하는데, 혹자(或者), 즉 불특정한 남들이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흉(凶)한 지경에 이른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린(吝)이란 부끄러운 것이거든요. 현 상황은 부끄럽습니다. 많은 이들이 항심과 항구한 덕을 지키지 못하고, 부끄러운 길로 줄줄이 따라갑니다. 그러한 태도를 고집하고 있으니, 이로 인해 국격이 추락하고, 나라가 부끄럽습니다. 또 치우친 생각을 중도라 여기고 굳게 믿어 나아가니,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온 나라가 경색된 국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다행스럽게도 2효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이 후회스러운 일이 결국은 없어지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 어려운 국면 속에서도 2효는 중도(中道)를 오래도록 지켜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효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저마다의 특별한 애국심으로 위기를 극복해 왔습니다. 오늘날 문화축제와 같은 평화로운 시위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100여 년 전 3.1운동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비폭력 평화의 항거를 보여줬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무자비한 폭력의 시대를 거치면서, 아무것도 못 배운 것이 아니라, 꾸준히 역사의 교훈을 배워왔고, 그 배움의 결과가 평화로운 촛불혁명, 문화제 시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시대에 45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마치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충격에 진정하기가 어렵지만, 이 와중에도 또 하나 우리의 저력과 희망을 발견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거의 실패하기가 어렵다는 그 친위 쿠데타가 실패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몫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 사회는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엄군 병사들은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흥분한 시민을 뒤에서 껴안아 진정시켰습니다. 시민들도 넘어진 계엄군을 손잡아 일으켜 주었습니다. 폭력은 안 돼! 그 혼란한 가운데, 서로가 그 원칙을 강하게 외쳤습니다. 이것이 구이효가 말하는 ‘중도를 오래 지켜온’ 모습이고, 그러한 오래된 항구함이 있었기에, 이 후회스러운 잘못된 일은 결국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또 교훈을 얻고 또 한층 성숙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고 크게 보면,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우리는 꾸준히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 중심을 잡아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일을 당했을 때 중요한 것은, 부정에 파묻힐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위기를 벗어날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현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냉철하게 다시 파악하고, 다시 성찰하고, 성숙해 나아갈 계기로 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이 사태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가 충분히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의 안정궤도에 들어선 것인가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도, 민주주의도 압축 성장을 해왔습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문제라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형벌을 맑고 공정하게 집행해서 기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이 승복하게 해야 할 것이며, 제도의 개선 방향도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10~20년을 퇴보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하고 위중한 시기에 처해있습니다.
『주역』은 “후회가 없어질 것”이라 했지, 길(吉)하게 될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태를 길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항괘는 중심을 잡고 항상된 도리를 지키며 꾸준히 나아가면, 이 국면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고 이야기합니다[利有攸往, 終則有始也]. 나침반은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바른 방향을 가리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회는 갑자기 성숙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도를 항구하게 지켜나감으로써 서서히 성장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