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산행 ⑤ 강천사로 피신한 전봉준의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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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산행 ⑤ 강천사로 피신한 전봉준의 여동생
  • 김남수
  • 승인 2025.01.1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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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손여옥(孫如玉, 1860~1894) 장군이 있다. 전북 정읍 출신으로, 1893년 11월 고부에서 이루어진 사발통문(沙鉢通文) 참여자 20명 중 한 사람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1894년 11월 27일 나주에서 처형된 것으로 기록된다.

손여옥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한 명은 손화중의 처가와 같은 ‘고흥 류씨(高興 柳氏, 1861~1951)’이고, 다른 한 명이 전봉준의 여동생 전고개(全古介, 1861~1951)다. 손여옥과 전고개 사이에는 아들 손규선(孫奎宣, 1888~1967, 전봉준의 외조카)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패전하고 손여옥이 처형되자, 두 명의 부인과 아들 손규선은 장성 백양사를 거쳐 순창 강천사(剛泉寺)로 피신한다. 아들 규선은 후에 출가하여 용주(龍珠)라는 법명을 얻었고, 두 명의 부인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근대사가 낳은 비극의 한 단면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당사자 혹은 후손이 사찰로 피신한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을 터, 특이하게 전봉준의 가족은 사찰을 통해 피신한다. 여동생 전고개 일가는 순창 강천사로 피신했고, 여식은 진안 고금당으로 피신했다.

전봉준과 손여옥의 가족이 사찰로 피신한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남다른 이유가 있을 법하다.

 

사발통문 참여자, 손여옥

손여옥의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이 성준(聖準)이고 여옥은 ‘자’다. 1860년 정읍 음성동(현 삼산동)에서 출생했고, 동학에 입도하여 정읍에서 활동했다.

손여옥이 참여한 사발통문(沙鉢通文)은 1893년 11월 고부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최경선 등 20명이 결의사항과 함께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서명한 문서다. 전봉준 등이 이전부터 1894년의 고부봉기를 준비했으며, 실행에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서다.

손주갑 선생이 지니고 있는 사발통문 사본. 참여자들의 이름이 사발모양으로 적혀 있어, ‘사발통문’이라 부른다.

손여옥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봉기를 주도했으며 1894년 3월 백산기포에도 참여했다. 백산기포에 참여한 정읍의 장령(將領) 두 명 중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이 차치구(車致九, 1851~1894)다. 그해 9월 전봉준과 함께 삼례에서 진행된 동학 2차 봉기에 참여했다. 동학농민군의 공주전투 패전 이후 피신했으나 체포되어 12월 나주에서 처형당했다. (1894년 12월 27일 추정)

손여옥은 손화중 집안의 양자로 들어갈 만큼 둘은 가까운 혈연관계이기도 했다. 앞서 거론했듯이 손여옥의 부인 중 한 명이 손화중의 처가와 같은 ‘고흥 류씨’였으며, 두 집안은 가까운 지역에 살기도 했다. 손여옥의 또 다른 부인 전고개가 전봉준의 여동생이니, 손여옥은 전봉준과는 처남 매부 관계가 된다. 손여옥이 손화중,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 이전부터 가까운 관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천사로의 피신

전쟁 패전 후 손여옥의 부인 류씨와 전고개(전봉준 여동생), 그리고 전고개 사이에서 낳은 아들 규선은 장성 백양사를 통해 순창 강천사로 피신한다. 손여옥과 전고개의 손자가 되는 손주갑(孫周甲, 1949~ 현재) 선생의 증언이다.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1894년 겨울, 어수선하던 때 저희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데리고 전라남도 백양사로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잡히면 친가는 물론이고 외가까지 씨를 말리려고 했던 때라서 서둘러 산중으로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신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께서 어린 나이에 숨어 지내다가 불제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승려가 되신 후 아버지께서는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정읍 내장사 등에서 기거하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정읍 내장산 넘어 희문산 자락을 타고 순창으로 들어가신 후, 6·25 한국전쟁 직전까지 강천사의 주지 스님으로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 연고로 제가 강천사에서 태어난 것이구요.”

-「손여옥의 손자 손주갑」, 『기억 1894 – 유족인터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23

손주갑 선생은 스님이 된 손규선의 자제로 1949년 강천사에서 태어났다. 법명이 용주(龍珠)인 손규선이 환갑에 낳은 늦둥이 아들이다. 일제강점기는 결혼한 스님이 독신 비구승보다 많던 시절이다. 손주갑 선생의 어머니 윤혜옥(1910~1988)은 두 번째 부인이고,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손규선과 혼인했다.

용주 스님, 즉 손규선은 한국전쟁 발발과 더불어 강천사를 내려와 1967년 사망했다. 손주갑 선생은 아버지 사망 후 고등학교 시절인 1969년에서야 집안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과, 사발통문에 참여한 손여옥 장군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말씀도 없었다고. ‘동학과 관련된 집안 이야기’는 어머니에게서 들었고, 할머니 전고개가 전봉준의 여동생인 것도 한참 후에 알게 됐다.

손주갑 선생은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했고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활동에 현재까지 참여하고 있다.

 

강천사 시절

손주갑 선생은 1949년 태어났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후반 강천사를 내려왔기에 당시의 기억은 거의 없다. 대신 손주갑 선생을 업어 키운 인척 김점례(여, 85세) 여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손주갑 선생보다 10살 많다.

1920년대 강천사 사진. 『잊혀져 가는 순창의 모습들』 (2011년, 순창군) 에서

김점례 여사는 강천사 바로 아랫마을(현 주차장)에 살았다. 한국전쟁과 더불어 강천사 마을을 내려왔고, 전쟁 후 마을로 올라가 32살까지 살았다. 일제강점기 시절과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의 상황, 특히 손여옥의 부인 류씨와 전고개 할머니까지를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2024년 12월 19일 오후 순창읍 김점례 여사 집에서 진행됐다. 인터뷰 내용은 글의 흐름에 맞춰 편집했다.)

- 절에 몇 분이나 계셨어요?

“강천사에는 스님 두 분이 있었고, 보살님도 한 명 있었어요. 고숙(용주 스님, 손주갑의 아버지)이 주지로 있었고, 한 명은 나이가 조금 젊은 스님이었어요. 스님들은 머리를 깎았고 바지저고리를 입으니깐 나이를 잘 몰라요”

- 할머니 기억은?

“키가 큰 할머니, 키가 작은 할머니 두 분 계셨어요. 키 큰 할머니는 머리에 작은 혹이 달렸어요. 그래서 ‘혹 달린 할매’라 불렀고, 키가 작은 할머니는 항상 앞치마를 입고 있어서 ‘앞치마 할매’라 불렀습니다. 우리 집과는 담벼락 하나를 두고 앞뒤로 살았고, ‘앞치마 할매’는 항상 나막신을 신고 있었어요.”

손주갑 선생은 ‘혹 달린 할매’가 류씨 할머니고, ‘앞치마 할매’가 전고개일 것이라 말한다. 지금 강천사를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이 있고 매표소에서 표를 사야 들어갈 수 있는데, 현재 주차장 자리가 그 마을이 있던 곳이다. ‘여나무 집’이 살았고, ‘한지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 그러면 스님은 절에 계셨고, 두 분 할머니와 (손주갑의) 어머니는 마을에 계셨던 거네요?

“가족은 마을에 살았죠. 그런데 절에 일이 있으면 일하러 절에 자주 갔죠. 절에 큰 행사가 있으면, 스님은 순창 읍내까지 걸어서 시장을 보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절에 손님이 올 때도 마을까지 와서 맞았고, 갈 때도 목탁을 치면서 마을까지 내려와 배웅했죠. 그때는 차가 있나 길이 제대로 나 있기는 하나, 눈이 무릎까지 와도 걸어서 장을 보러 다녔죠.”

- 선생님(김점례)도 절에 자주 올라갔나요?

“일 있으면 올라갔죠. 그때는 죄다 가난했으니, 절에서 음식을 얻어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는 했죠. 저도 어린 나이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오니깐 애들도 봐야 하고 해서 올라갔죠.”

김점례 여사의 기억에는 손주갑 선생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까지 강천산에는 호랑이가 있어서, “호랑이가 밤에 ‘어흥’하면 개들이 짖다가도 집으로 꽁무니를 치면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이 읍내에서 시장을 보고 밤에 오면, 산신령님네(호랑이)가 내려와 스님 가는 길을 밝혀주었고 법당에 다다르면 사라졌다”는 기억도 전한다. 당산나무가 네 그루 있었다 한다.

 

1920년대 연대암 사진. 『잊혀져 가는 순창의 모습들』 (2011년, 순창군) 에서

전쟁과 피신

- 6·25 전쟁 나고 내려오셨나요?

“절 위 연대암이 있는데 꽤 컸어요. 그런데 연대암이 빨갱이 소굴이 됐어요. 빨갱이들이 마을까지 내려와 사람을 죽이기도 했죠. 그런데 빨갱이들은 산 위에 있고 군인은 밑에 있었는데, 밑에서 올라가면 배길 재주가 있나? 그때는 나무가 울창했어요. 위에 있는 사람은 바위나 나무 사이에서 아래를 향해 총을 쏘는데, 군인이 많이 죽었어요. 냇가가 핏물이 됐지요.
미군이 비행기로 폭격하면서 빨갱이들이 처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곤 군인과 경찰이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군인이 마을은 물론이고 절까지 불 질렀어요. 옷가지 하나 건지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내려올 때 계절을 물으니 ‘겨울’이란다. 아마 인천상륙작전 직후 마을에서 내려온 듯하다.

- 피난할 때, 스님과 할머니들이 같이 내려오셨나요?

“내려와서 ‘장자촌’에 갔었는데, 그때까지는 함께 있었어요.”

처음 내려와서는 두 집안이 장자촌에 함께 있다가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 손주갑 집안은 ‘흰바위 마을’로 옮겼고 김점례 집안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손주갑 집안은 흰바위 마을에 있다가, 몇 년 후 정읍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김점례 집안은 전쟁 이후 다시 강천사 마을로 들어갔다.

두 가족이 헤어지고 얼마 후, 류씨 할머니와 전고개 할머니는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족보상으로는 1951년 전고개가 먼저 사망하고, 류씨 할머니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정읍으로의 이주

정읍으로 이주할 때부터의 이야기는 손주갑 선생의 증언이다.

“아버지께서 환갑 때 저를 낳았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정읍으로 이주하실 때 연세가 육십 육칠 세쯤 되었을 거예요. 연세가 많아서 힘든 일을 하기 여의치 않고, 게다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가족들 생계유지가 막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산지기 일을 하시려고 할 때, 손화중 장군님의 아드님이신 손응수 옹께서 산지기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손화중 장군님 집안 어른들의 도움으로 아버지께서 정읍에 정착할 수 있었고, 저도 정읍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손여옥의 손자 손주갑」, 『기억 1894 – 유족인터뷰』

정읍에 있던 손씨 집안의 재실을 지을 때, “(강천사 스님이었던) 아버지가 도움을 많이 주었고, 그 인연도 있었을 것”이라 손주갑 선생은 이야기한다. 정읍으로 이전하기 전, “집안 살림이 어려워 아버지는 산으로 다니며 조릿대 나무를 채취해 조리 만드는 일을 하셨다. 가져온 나무를 어머님이 밤새 끓여서 조리를 만들고, 순창 시장에 가서 팔았다”고 한다. 그것으로 식량을 마련하는 등 말도 못하게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정읍으로 이전해 손화중 장군 집안의 도움으로 재실 산지기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유심히 기억할 만한 증언도 있다.

“(정읍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제가 잘 모르는 어른 두 분의 사진을 집안 벽에 걸어놓으셨어요. 나중에 물어서 알았는데, 두 분 중 한 분은 불제자였던 제 아버지를 지도하셨던 큰스님이셨고, 또 한 분은 손화중 장군이었어요. 나중에 아버지께서 손화중 장군 사진은 그분의 후손에게 돌려주자고 해서, 손화중 장군의 손자 되시는 손홍렬 선생님께 보내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손여옥의 손자 손주갑」, 『기억 1894 – 유족인터뷰』

기억에 따르면, 전쟁 때 시급히 강천사를 내려올 때 손화중 장군과 큰스님 사진을 들고 내려온 것이다. 손주갑 선생은 필자와의 별도 인터뷰에서 “집안 장롱에 자그마한 부처님도 있었는데, 그것도 강천사에서 가지고 내려온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버님은 사진과 불상에 예를 차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더 이상 스님은 아니었지만, ‘불제자로서 삶을 사신 것’으로 기억한다.

‘동학과 불교’라는 이 글의 주제를 놓고 볼 때,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증언이 있다. 첫째는 손여옥 사망 전후로 가족이 백양사를 통해 강천사로 이주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류씨 할머니와 전봉준의 여동생 전고개, 그리고 출가자가 된 아들 손규선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 강천사에 50년 넘게 살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어떤 인연으로 강천사로 도피했을까? 어느 순간 출가한 ‘용주 스님’의 큰스님이 단서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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