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산행(東學山行) ⑥ 강천사에 남겨진 동학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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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산행(東學山行) ⑥ 강천사에 남겨진 동학의 자취
  • 김남수
  • 승인 2025.02.0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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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순창 강천사(剛泉寺)는 모든 것이 불탔다. 강천사에 머무르던, 전봉준의 여동생이자 손여옥의 부인 전고개 일가 역시 이때 거처를 잃는다. 화재 속에 동학의 후손들이 모두 강천사를 떠났다. 그렇지만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나 전봉준의 잘 알려지지 않은 후손이, 한국전쟁 전까지 강천사에서 전봉준의 제사를 올렸다는 증언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의 위패가 강천사에 모셔졌던 것이다.

또 하나, 전고개 일가의 흔적이 강천사 주변에 남아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손여옥의 부인 두 명(류씨와 전고개), 그리고 용주(龍珠)라는 법명으로 출가자의 삶을 살았던 손규선(전봉준의 외조카)의 묘가 강천사 주변에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순창 강천사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 개울 건너에 강천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승탑이 몇 기 남아 있다. 사진 불광미디어

 

전봉준의 유복자

손여옥과 전고개 사이의 손자인 손주갑 선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전봉준 장군에게는 유복자 아들이 있었고”, “아버지(용주 스님)가 그 집과 긴밀히 교류했다”고 이야기한다. 전봉준에게 두 명의 부인 슬하에서 태어난 네 명의 자식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그 외 ‘다른 여인과 자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민족문제연구소 박용규 연구위원이 밝힌 바 있다(「전봉준 장군의 친손녀가 생존해 있다」, 브레이크뉴스, 2022년 5월 27일). 여인의 이름은 김금해(金錦海)고, 전봉준과 김금해 여사 사이에 전점동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전점동은 두 명의 아들,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손주갑 선생은 이중 전수금이라는 딸을 생생히 기억한다.

손주갑 선생은 “정읍에 살 때, 작은 집이라 불렀고 잦은 교류가 있었다” 이야기하며, “한국전쟁 이전까지, 딸 전수금이 어머니와 강천사를 왕래하면서 전봉준의 제사를 모셨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손주갑 선생의 증언을 정리해 본다. (손주갑 선생과의 인터뷰는 2024년 12월 11일 불광미디어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후 전화 통화와 순창 답사 시 이야기를 묶어서 편집했다.)

“전봉준 장군에게 유복자가 있었어요. 1894년 전투에서 패하고 입암산성(笠岩山城)으로 가기 전 정읍에서 하룻밤을 보냈는지, 장군의 유복자가 생겼어요.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정읍에 작은 집이라고 찾아다닌 적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 외가였죠. 유복자 집안이었던 거죠. 당시만 하더라도 ‘동학’하면 쉬쉬하는 분위기였는데, 어른들은 서로 알고 지내면서 왕래를 했던 듯합니다.”

전봉준은 손주갑 선생의 아버지인 손규선(용주 스님)에게 외삼촌이 된다. 전봉준과 인연을 맺은 김금해 여사는 손규선에게는 외숙모가 되는 셈이고, 아들 전점동은 외가로 사촌지간이 된다.

- 어릴 때 유복자(전점동)를 보신 거네요?

“그분이 전봉준 장군의 유복자인 것은 몰랐죠. 어릴 때는 작은 집이라고 다니면서, 그 유복자를 작은 아버지라 불렀죠. 작은 어머니도 있었구요. 정읍에서 두부집을 했어요. 그때 전수금 누나도 만났죠.”

유복자의 딸, 전수금 여사는 1939년생으로 손주갑 선생보다 10살 많다. 손주갑 선생은 ‘수금이 누나’로 칭했다.

- 언제까지 인연이 있었습니까?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아버지(전점동, 전봉준의 유복자)가 돌아가셨어요.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수금이 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기별을 알려주었습니다. 부음을 전하러 온 거죠. 아버지가 쌀 한 말과 새끼 꼬아놓은 것을 들고 가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작은 어머니가 오셨었습니다.
또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언젠가 아버님이 소송관계로 이리저리 피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수금 누나가 집에 와서는 ‘우리 집에 가자’ 하는 거예요. 가서 보니, 아버지가 수금이 누나 집 자그마한 방에 숨어 계셨어요. 도망 다니면서도 아들이 보고 싶었던 거죠.”

어느 날인가부터 작은 집과의 인연이 지속되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유복자의 아들 한 명이 노름을 좋아해, 빚 때문에 야반도주하듯 두부집을 떠났다고.

- 그러면 전수금 누나하고는 언제 다시 만나게 됐습니까?

“제가 동학혁명유족회 활동을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고 2005년부터 유족 등록을 해야 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죠.
어느 날 선배 한 분이 ‘전봉준 장군 후손이 있네’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형님, 전봉준 장군의 후손은 멸실됐어요’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형님이 ‘이거 엉터리구먼’ 하면서 알려주었습니다. 전수금 누나였던 거죠. 그전에는 동학과 관련됐던 거는 전혀 몰랐죠.”

 

정읍 시내에 있는 ‘작은 집’ 터. 차량이 주차돼 있는 자리에 집이 있었다. 앞집과 붙어 있었던 처마 선이 남아 있다. 전봉준의 유복자가 두부집을 운영하며 살던 곳이다.

전수금 누나는 여주에서 성공회를 다니고 있었다. 몇십 년 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누나는 손주갑 선생을 바로 알아봤고,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 강천사 이야기도 하시던가요?

“수금이 누나 말로는, 작은 어머니와 자기가 때가 되면 강천사로 왔다고 해요. 정읍에서 순창 강천사까지는 지금도 꽤 거리가 있는데, 전봉준 장군의 제사를 모시러 40~50km를 걸어왔다고 합니다. 아버지(용주 스님)가 주지로 있었으니, 강천사에서 제사를 모셨던 거죠.”

유복자의 딸인 전수금 여사는 전봉준에게는 손녀가 된다. 전봉준의 며느리와 손녀가 강천사까지 와 제사를 모신 것이다. 손주갑 선생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전수금 여사는 2023년에 돌아가셨다. 조금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손주갑 선생은 전수금 여사의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두 가지다. 전봉준의 다른 유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유족이 순창 강천사에서 전봉준 장군의 제사를 모셨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강천사 주지였던 용주 스님, 즉 손규선은 이 사실을 알았을 게 분명하다. 정읍에서 두부집을 운영하던 유복자 집안과 잦은 왕래가 있었고, 두 집안은 서로의 장례를 확인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박용규의 글이나 손주갑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전수금 여사는 자신이 동학의 후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릴 때 검정 옷을 입고 다녔고, ‘나는 전봉준 장군의 손녀다’는 사실을 주변에 조심스레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동학혁명기념재단의 유족등록사업에서는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예부터 집안의 가르침이 ‘조용히 살자’였다. 모든 것을 조심해야 했던 시기였다. 지금은 후손들의 다단한 가족관계도 있거니와, 유족임을 확인하는 동학혁명기념재단에서 ‘전봉준의 후손’이라는 점에 유달리 예민하다고 한다. 전봉준의 몇몇 유족들이 확인되고 사실의 구체성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전봉준’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아직껏 후손들을 짓누르고 있다.

 

전봉준·손여옥 일가의 묘

강천사 주변에는 동학 후손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여러 산등성이에 후손들의 묘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흩어져 있다. 손여옥의 부인인 류씨 할머니와 전고개 할머니, 출가자의 삶을 살았던 손규선의 묘가 강천사 주변으로 있다.

먼저 전봉준의 여동생 전고개의 묘. 강천산을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으로 높은 봉우리가 있다. 올라가는 길이 쉬운 길은 아니다. 숲이 우거져 있기에, 나뭇잎이 새순을 트기 전이나 낙엽으로 변할 즈음이나 올라갈 수 있는 길이다.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오른편으로 길이 있다. 30~40m를 걸으면 봉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전고개의 묘다. 전고개는 항상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 ‘앞치마 할매’로 불렸다. 한국전쟁으로 강천사 마을을 떠나 팔덕면으로 삶의 거처를 옮기었고 1951년 봄 즈음, 세상과 인연을 마쳤다.

할머니 전고개의 묘에 절하고 있는 손주갑 선생. 묘는 강천사 초입에 있는 산 정상 자락에 있다. 바로 옆에 큰며느리 묘도 있다.

전봉준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어슬렁거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빠 전봉준이 체포되고 곧이어 남편 손여옥이 처형당하고는, 류씨와 함께 일가를 이끌고 사찰로 피신한 지 50년 세월이 흘러 죽음을 맞이했다. 어린 아들은 출가해 스님이 되었고, 그 이후 시간은 절 주변에서 아들을 의지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전고개의 묘 가까운 곳에 큰며느리 묘도 있다. 아들 손규선의 첫째 부인이다. 족보에는 1887년 출생이고 광산김씨, 김수덕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손규선은 첫째 부인 사망 후, 두 번째 부인(파평윤씨, 윤혜옥)을 맞이하였고, 그 아들이 손주갑 선생이다.

손여옥의 첫째 부인 류씨의 묘 역시 강천산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류씨는 손주갑 선생이 태어나자, 업고 다니면서 항상 “효자야, 효자야”라는 노래를 불렀다 한다. 강천사 주지 용주 스님은 밖으로는 자상했지만, 안으로는 엄했다 한다. 그랬던 스님이 환갑에 태어난 자식 덕분에 잔소리가 덜해졌다고 류씨가 좋아했다는 것. 류씨는 전고개가 사망한 직후 1951년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손규선의 묘

용주 스님, 즉 손여옥 장군의 아들이자 전봉준의 외조카 손규선의 묘는 바로 강천사 주변에 있다. 강천사에 다다르면, 입구에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 오른쪽 위로 큰 바위가 있는데, ‘부처 바위’라 부른다. 부처님 얼굴처럼 생겨서일까?

부처 바위를 옆으로 돌아 산으로 올라가면 묘가 나온다. 바위가 둘러싼 아담한 규모다. 양지바른 곳에서 강천사를 바라보며 손규선의 묘가 놓여있다. 손규선은 일가가 정읍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1967년 그곳에서 삶을 다했다.

한때는 출가자였던 손용주의 묘. 강천사 입구 부처 바위 위에 모셔져 있다.

손규선은 자신이 동학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한마디 말하지 않았지만, 동학의 후손들과 남모르게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손주갑 선생은 “아버지가 겁이 많은 편”이라고 기억한다. 경찰은 물론 제복 입은 집배원만 보고도 자리를 피했다 한다. 그 역시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터.

50년 세월을 출가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한국전쟁으로는 삶의 터전을 잃었다. 환갑을 넘어서는 절이 아닌 마을에서의 삶이 펼쳐졌다. 아마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고된 삶이었을 것이다. 출가자는 아니었지만 불제자로서 삶을 마감하고, 반백 년 삶을 이어간 곳 주변에 마지막 몸을 뉘었다.

손주갑 선생은 “이전에는 후손들에게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해 묘 관리를 제대로 못했고, 위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한다. 지금은 때맞춰 벌초도 하고 순창에 인척이 있어 관리하고 있다.

2024년 12월 말, 묘를 돌아보며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의 후손으로, 또 불제자가 된 여러 명이 강천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잠들어 있음을. 또 후손들이 주변에 머물며 잊지 않고 찾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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