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태조 왕건, 팔공산에서 통일을 기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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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팔공산] 태조 왕건, 팔공산에서 통일을 기약하다
  • 송희원
  • 승인 2022.11.30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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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일대에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격전한 공산 동수 전투(이하 공산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공산(公山)은 팔공산을, 동수(桐藪)는 동화사 일대를 말한다. 

공산전투는 병산대전, 운주대전과 함께 후삼국시대 통일 전쟁의 3대 전투로 꼽힌다. 그리고 왕건 생애 최대의 패전이었다. 후백제의 견훤은 왕건의 고려군을 기습 공격해 압승했고, 왕건은 이 전투에서 그의 충신 신숭겸과 김락 장군을 잃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팔공산 일대에는 전투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 공산전투 설화를 배경으로 한 ‘왕건길 8코스’도 조성돼 팔공산의 절경과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다.

대구 동구 지묘동에 조성된 신숭겸 장군 유적지. 뒤로 보이는 산이 왕산이다. 사진 유동영

공산 동수 전투 

太祖以精騎五千(태조이정기오천) 
要萱於公山下大戰(요훤어공산하대전)
太祖之將金樂 崇謙死之(태조지장김락 숭겸사지)
諸軍敗北 太祖僅以身免(제군패배 태조근이신면)
태조가 정예기병 5,000을 데리고 
공산 밑에서 견훤을 기다리다가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했다.
 __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

927년(태조 10) 9월 후백제군이 경주를 기습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경상도 일대의 패권이 후백제에 넘어가는 것을 경계한 왕건은 정예기병 5,000명을 이끌고 후백제군과 정면 대결하기 위해 남하한다. 경주 공격에 성공한 후백제군은 전주 방면으로 회군하기 위해 대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공산 일대에서 이미 매복해 있던 왕건의 고려군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견훤은 이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역으로 고려군을 기습 공격한다. 동수에서 역으로 포위된 고려군은 남서쪽으로 밀려간다. 후백제군은 대구 동구 지묘동에서 왕건의 진영을 완전히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위기에서 왕건을 구한 것은 신숭겸과 김락을 비롯한 장군들의 묘수였다. 신숭겸 장군은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고 왕건인 척 적군을 유인했다. 후백제군은 왕건인 줄 알고 그를 따라가 목을 벴다. 

그 사이 왕건은 가까스로 탈출해 죽음을 모면했다. 자신을 대신해 적지로 뛰어든 신숭겸, 김락 장군의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왕건은 비통할 새도 없이 후백제군을 피해 퇴각한다. 

공산전투는 고려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왕건은 3년 뒤 고창전투(안동)에서 견훤을 상대로 대승해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표충단. 사진 유동영

 

신숭겸 장군 유적지 

신숭겸 장군의 지략과 충정이 없었다면, 태조 왕건의 후삼국통일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왕건은 신숭겸에게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의 시신을 거둬 춘천에 예장하고, 전사한 자리에 자신을 구한 신숭겸의 묘한 지략을 뜻하는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지묘사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폐사했고 그 자리에 신숭겸 장군 유적지가 조성됐다. 

이곳에는 그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진 표충사와 신숭겸의 피 묻은 무장 복장과 순절 당시 주변의 흙을 모아 만든 표충단 등이 있다. 표충단 옆에는 신숭겸 장군과 태조 왕건을 기리는 수령이 400년 된 ‘신숭겸 장군 나무’와 ‘태조 왕건 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당 뒤로 보이는 산은 태조가 후백제군에게 쫓겨서 달아났던 산이라고 해서 왕산(王山)이라 불린다. 

파군재 삼거리의 신숭겸 장군 동상. 사진 정승채
왕건이 도주하다가 잠시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 사진 정승채

신숭겸 장군 유적지 앞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는 왕건의 군대가 격파됐다고 해서 파군재(破軍峴)라고 불린다. 파군재 삼거리에는 신숭겸 장군 동상이 근엄하게 서 있다. 파군재 인근 봉무동 개천가에도 왕건의 흔적이 깃든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왕건이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다가 잠시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고 해서 독좌암(獨坐巖)이라 불린다.

이 밖에도 팔공산 일대에는 전투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양군이 하천 하나를 두고 서로에게 쏜 화살이 쌓여 강을 이뤘다는 살내(전탄·箭灘), 왕건이 도망치다 들른 어른은 한 명도 없고 아이들만 있던 마을 불로동(不老洞), 왕건이 밤에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반달이 뜬 것을 보고 비로소 안심하게 됐다는 반야월(半夜月)과 안심(安心).

공산전투 당시 가장 치열했던 살내는 지금의 동화천 하류를 말한다. 화살로 가득 찬 천(川)이라는 뜻으로 살내(전탄)라고 전한다. 사진 정승채

 

동화사 염불암 일인석

고려 태조와 견훤의 군대가 동수 아래에서 크게 싸웠는데, 태조가 사리탑이 내는 빛을 따라와서 선사를 만나고 화를 면하고 감격했다. 이때에 이르러 탑묘를 장엄하게 만들고, 전각과 당우를 넓히고, 선사의 거처를 확장했다. 일인석(一人石)은 속암(屬菴) 뒤에 있는데, 왕이 선사를 만난 곳으로, 일인은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며 그 고적을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며 닦을 만했다.
 __  「동화사 사적비」 중에서

1931년 세운 「동화사 사적비」에는 공산전투 당시 ‘선사가 왕건에게 도움을 줘 화를 면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 나오는 선사는 영조 스님을 말한다. 갑오년(993)에 동화사를 세 번째로 중창하고 염불암을 창건한 스님이다. 염불암 뒤편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피신한 왕건이 혼자 앉아 있었다 해서 일인석이라 부른다. 동수에서 크게 패한 뒤 왕건은 일인석에 앉아 어떤 고뇌에 잠겼을까? 와신상담하며 삼국통일을 하게 될 훗날을 기약하지 않았을까? 

공산전투 중 피신한 왕건이 홀로 앉아 있었다는 일인석. 염불암 뒤편에 있다. 사진 송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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