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시인 이상화, 파계사에 오르다
상태바
[달구벌 팔공산] 시인 이상화, 파계사에 오르다
  • 김남수
  • 승인 2022.11.30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계사 관음보살님과 용소龍沼
원통전 건칠관음보살(보물). 1979년 개금불사 시 복장 유물로 세종의 중수문과 영조의 어의, 발원문이 나왔다.

파계사는 계곡 위에 놓인 절이다. ‘계곡의 물’을 모아 쥐는 형국이라 파계(把溪)라 이름한다. 파계사에 있었던 용소(龍沼)라는 연못이 물줄기를 모으는 공간이었다. 1924년경 어느 날, 대구가 낳은 시인 이상화가 용소를 찾았다. 

물 위로 죽은 듯 엎디어 있는
끝도 없이 열푸른 하늘의 영원성(永遠性) 품은 빛이
그리는 애인(愛人)을 뜻밖에 만난 미친 마음으로
내 가슴에 나도 몰래 숨었던 나라와 어우러지다.

나의 넋은 바람결의 구름보다도 연약(軟弱)하여라
잠자리와 제비 뒤를 따라, 가볍게 돌며
별나라로 오르다- 갑자기 흙 속으로 기어들고
다시는, 해묵은 낙엽(落葉)과 고목(古木)의 거미줄과도 헤매이노라.

__ 이상화, <지반정경(池畔靜景) - 파계사(把溪寺) 용소(龍沼)에서> 중에서

용이 승천한 연못이라 용소라 이름할까? 보통 이런 연못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 절집 근처에 있는 수많은 용과 관련된 설화는 보통 이런 연유를 보여준다. 
파계사의 용소는 이런 설화와 자못 다를 듯하다. 임금과 관련된 용이 아닐까?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眼)이라 하고, 옷을 용포(龍袍)라 이름하기에 그렇게 짐작한다. 저간의 사정이 불광출판사에서 발행한 유근자 선생의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기영각에 모셔진 영조대왕 위패

영조 임금의 발원문

조선시대 숙종이 현응 스님의 기도를 통해 영조를 얻은 이후, 파계사는 원당 사찰이 된다. 설화와 같은 이야기가 ‘역사’로 기록되니 1979년 6월, 원통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좌상’ 개금불사 과정에서 복장 유물로 영조의 어의(御衣)가 나왔다. 1740년(영조 16) 개금과 중수(重修)할 때 봉안된 복장 유물이다.

어의에는 “건륭(乾隆) 5년에 영조의 상의(上衣) 1령(領)을 넣는다”는 묵서가 함께 나왔다. 발원문에는 “파계사는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 잠저하시던 때인 임진년부터 세 분 전하의 탄신일이면 해마다 세 차례씩 불공을 드리던 원당”이었고, “주상전하 갑술생 이씨 보체께서는 계계승승 이어지며 수명이 만세를 누리시기를 바라옵고, 왕비전하 임신생 서씨 보체께서는 수명이 나란히 주상과 같기”를 바라는 발원이 쓰여 있다. 

영조의 어의와 발원문을 통해 파계사가 숙종 때부터 왕실 원당이었으며 영조 탄생이 현응 스님의 기도에 이뤄져 파계사가 대한제국 시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사찰이었음을 확증하게 됐다. 

영조 임금의 어의. 관음보살 복장에서 나왔으며, 현재 파계사에 보관 중이다.

 

세종대왕의 관음보살

파계사 원통전에 모셔진 보살님을 ‘건칠관음보살좌상’이라 한다. 건칠(乾漆) 보살상은 천을 여러 겹 둘러 만든 보살님이란 뜻이다. 금동, 나무, 혹은 돌로 주로 조성하는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다. 천으로 조성하기에 수려하다.

관음보살 밑면에 1447년에 중수한 내용이 기록돼 있고, 중수문이 있다. 이 해는 세종이 즉위한 지 29년째. 영조가 어의를 봉안하면서 중수하기 300년 전, 세종대왕 시절에 관음보살 중수가 한 번 더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수 시주자 이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째 아들 영웅대군, 후궁 신빈 김씨와 김씨 소생인 영해군이 보인다. 어찌 된 이유일까? 세종의 비였던 소헌왕후가 1년 전 세상을 떠났기에, 1주기를 맞아 관음보살을 중수한 것이다. 또, 이즈음 신빈 김씨가 ‘빈’으로 책봉된 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원통전 관음보살에게서 세 명의 임금(세종, 숙종, 영조)과 임진왜란 직후 원통전을 보수한 선조까지 네 명의 임금을 만날 수 있다. 

파계사 기영각(祈永閣). 세 분의 임금 위패와 중창한 스님들의 위패를 모셨다.

 

시인의 쇠북 소리

이 같은 이야기는 시인 이상화가 고향 대구로 돌아와, 시를 지을 때는 알려지지 않았다. 시인에게는 “저문 저녁에, 쫓겨난 쇠북 소리 하늘 너머로 사라지고, 이날의 마지막 놀이로 어린 고기들 물놀이 칠 때/ 내 머리 속에서 단잠 깬 기억(記憶)은 새로이 이곳 온 까닭을 생각하노라./ 이 못이 세상 같고, 내 한 몸이 모든 사람 같기도 하다!”라는 시구에서 보듯, 파계사의 고요한 연못과 종루에서 퍼졌을 듯한 ‘쇠북 소리’가 더 중요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의 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에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__ 이상화, <나의 침실로> 중에서

연못 어느 곳에 앉아 듣는 파계사의 ‘쇠북 소리’는 시인에게 어떤 영감을 줬을까? ‘낭만’과 ‘저항’ 사이에 있는 시인은 파계사 연못가에서 사색에 잠겼다.  

 

참고자료. 유근자,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불광출판사, 2022년

 

사진. 유동영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