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품은 뫼
그간 우리는 1902년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만든 〈산맥도〉에 의해 잘못 배웠다. 여암 신경준은 1770년에 만든 『산경표(山經表)』에서 우리나라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했다. 한반도의 조종산(祖宗山, 나라의 중심 산) 백두산에서 시작돼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나눴다. 동해와 서해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각각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을 정맥이라 했다.
이 기록에 포함되지 않는 큰 산이 영남의 팔공산이다. 한반도의 산줄기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산으로 큰 산이었기에 모두 ‘공산(公山)’으로 불렀을지 모른다. 신라 때부터 중악·부악(父岳)·공산·악산 등으로 쓰고 부른 팔공산의 이름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산은 팔공산(八公山)이라고도 일컫는다”고 처음 기록됐다.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다시 기록돼 그 명칭이 현재까지 쓰인다.
산 이름과 같이 붙이는 영남(嶺南)이란 지명은 고갯마루 남쪽이라는 데에서 유래됐다. 경상도 지방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영남은 158년(아달라왕 5) 신라시대에 개설된 죽령(竹嶺)과 1414년 조선 태종이 관도로 개설한 조령(鳥嶺, 일명 문경새재) 두 고개의 남쪽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영남이란 지명도 고려 때인 995년(성종 14)에 확정된 명칭이다. 1106년(예종 1)에 경주·금주(김해)와 상주와 진주·합주(마산)의 앞 글자를 따와 경상진주도라고 했다가 1186년(명종 16)에 경상주도, 1314년(충숙왕 1)부터 경상도라 불렀다.
이곳의 중심인 팔공산은 7세기 신라 진평왕 때 지정된, 다섯 곳의 산을 신격화하고 호국 사상으로 발전한 오악 사상에서 중앙의 부악으로 표기된 으뜸 산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두 날개를 쫙 편 봉황새의 모양이라 했다. 지금이야 위성지도와 드론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지리 정보지만, 그 옛날 팔공산의 산세를 봉황으로 형상화해 낸 것은 경이롭고 심미적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의 산세는 봉황이 양 날개를 쭉 펼치고 있는 것처럼 동서로 나뉘어 솟아 있다.
봉황을 상상할 수 있는 곳으로 세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신림봉은 봉황의 자궁부라 지칭하고, 세 개 바위는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신림봉 제1바위는 코끼리 모습과 같고, 제2바위는 일명 고인돌 바위로 부른다. 제3바위는 달마대사를 닮았으며 1989년 제작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일설에는 봉황이 날개를 펼 때, 동화사와 부인사 쪽이 몸통이다. 지금도 동화사 봉서루 아래 바위에 돌로 된 봉황알 3개가 놓여 있다. 은해사와 거조암 쪽이 왼쪽 날개, 칠곡 송림사 쪽이 오른쪽 날개, 치산의 수도사 쪽이 꼬리의 형상으로 달구벌을 향하는 산 모습이라 알려진다. 이처럼 영남의 명산 팔공산에 관한 이야기는 천년 동안 켜켜이 쌓인 고대인들의 앨범 속에 있는 신화와 전설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곁을 지나가는 현재일지도 모른다.
신라의 전설을 품은 팔공산
1931년 3월 건립된 「동화사 사적비」에 중악으로 표기한 팔공산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이렇게 나온다. “심지왕사가 영심대사로부터 전해 받은 제8, 제9간자(簡子, 미륵보살 수계를 의미하는 징표)를 동사(桐寺)에 봉안했다. 고려 예종이 명하여 궁중으로 옮겨서 친견할 때, 제9간자가 분실돼 그 대용품을 만들어 보낼 때, 제8간자만이 상서로운 기운을 발산하였기에 제8간자의 ‘팔(八)’자를 공산 지명 앞에 붙여 팔공산이라 했다.”
여덟 번째 간자 설은 18세기 이중환의 『택리지』에 “공산에 위치한 동화사는 493년 신라 소지왕 때 극달화상이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832년 흥덕왕 때 진표율사의 제자이며 헌덕왕자인 심지왕사가 간자를 받아 중창할 때, 간자 8과 9 두 개를 던져 그 떨어진 곳에 불당을 이룩하니 지금의 첨당(籤堂) 뒤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인데, 때마침 겨울인데도 오동나무 꽃이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창건 설화로 기록됐다.
또 여덟 명의 성인이 득도한 산이라 하여 팔공산이라 불렀다. 깨달음을 이룬 설로 원효대사의 제자 여덟 명이 경남 양산 천성산에서 공산으로 들어와 세 명은 삼성암에서, 다섯 명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는 전설이다. 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오도암 옆의 청운대에는 대사가 머물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서당굴(원효굴)이 남아 있듯이, 7세기 제자들이 깨침을 이룬 곳은 암자라기보다 바위굴일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말의 곰뫼·곰산·꿩산 등으로, 신라시대부터 중악·부악·악산·공산·동수산(桐藪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 팔공산은 『삼국사기』에 “611년 진평왕 때 17세의 화랑 김유신이 중악석굴에서 낭도들과 수련하였다”고 기록됐다. 그곳은 ‘돌구멍절’ 또는 ‘까치절’로 유명한 중암암(中巖庵)으로 추정된다. 이 암자 곁에는 팔공산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 만년송이 자리하고, 화랑 김유신이 수도하며 마셨다는 장군수 샘과 화랑들의 수련장인 고봉암 터 등의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팔공산의 전설은 7세기 신라가 당나라에 파견했던 견당사절단(遣唐使節團)이 걸었던 길을 따라 신라 서라벌에서 옮겨 왔다. 부인사 연대기에는 신라 선덕여왕의 원당으로 여왕의 꿈이 서려 있다. 절에서는 선덕여왕의 영정을 걸고, 해마다 음력 3월 15일에 ‘선덕여왕 숭모제’를 지내고 있다.
전설과 신화의 주인공 신라인들은 토함산과 팔공산 등에 오악 신앙을 낳았고, 상징과 흔적으로 묻혀 있다. 팔공산에 깃든 신화와 전설은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을 필두로 조상들이 직접 만든 순수 그 자체의 문화 콘텐츠다. 미스터리한 팔공산의 신화 코드를 풀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고려 500년의 비장을 품다
고려 때까지 공산으로 불린 팔공산의 전설을 푸는 또 하나의 코드는 고려 초조대장경이다. 고려 최고의 보물은 멸망한 신라 땅에 어떻게 전해졌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첫째, 거란과 몽골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왕조는 자신들의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로 팔공산을 선택했다. 둘째로 전쟁에 따른 변방 백성들의 위무와 복속을 대장경이란 성물을 통해 이루고자 했다. 신라지역에 대한 안정을 바랐던 고려 왕조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의 고려(One Korea)’를 위해 신라 잔존 세력과 긴장을 풀고, 분쟁 실마리를 제거하는 데 있었다. 셋째로는 개경 → 계립령(하늘재) → 팔공산 육로 구간의 대장경 이운을 통해 조세 확충과 일자리 창출, 군현제도의 작동시스템 등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2차로 추진된 고려 재조대장경의 이운은 조선 개국 때 같은 방법으로 1398년 육·해상 구간에서 실행된 바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이운 과정은 많이 알려졌지만, 팔공산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이운’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011년부터 76년간 조성돼 개경 현화사와 흥왕사에 보관하던 목판본 초조대장경을 팔공산으로 옮긴 시기는 대략 1096년을 전후한 시기다. 그해 대각국사 의천 스님은 고려 제종교장(일명 속장경) 1차 목표량을 완성하고, 개경 흥왕사 대장전에 보관한 초조본을 제종교장 목판과 대체하는 동시에 팔공산 부인사로 옮겼을 가능성이 짙다.
이 시기 개경의 개국사·흥왕사는 대장경 판각·보관 사찰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정계의 정치적 중심지로 변모했다. 의천 스님은 거란과 왜구, 혼란한 개경으로부터 국가 보물을 안전한 곳에 옮길 계획을 추진했다. 1101년 47세로 열반에 든 의천 스님은 1094년 여름 해인사 등 남도 순례를 통해 보장처를 답사하고, 교류가 많았던 화엄종과 법상종 등 불교학파가 융성한 팔공산 지역을 최종 선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가설은 12세기 초, 고려 예종 때에 대장경 판목을 팔공산으로 이운했을 가능성이다. 예종은 1120년 상달에 〈도이장가〉란 노래를 지어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을 추모하는 한편, 공산·동수전투 전적지에 사당 건립으로 영웅의 귀환을 알리고, 인근 부인사에 대장전을 건립하면서 대장경 이운을 통해 ‘하나의 고려’를 위한 정책적인 화합을 도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몇 가지 가설도 있지만, 결국 초조대장경은 팔공산의 품에 안겼다가 사라진 성보다. 고려 현종이 1011년 음력 2월 보름, 청주 행궁에서 처음 조성을 발원하면서 제작됐다. 고려의 이규보가 1237년에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는 그 연원을 밝히고 있다. 1232년 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목판은 이운 거리도 천 리 길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지 않았다면 거의 불가능한 국책 프로젝트였다.
11세기 팔공산 이운 프로젝트의 총괄기획은 강감찬 장군, 총연출은 왕사이던 법경대사 또는 대각국사가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12세기 예종의 왕명으로 모든 이운 작업이 총괄됐을 수 있다. 개국공신 추모를 위한 왕의 팔공산 행차와 더불어 대장경판 이운 행사가 병행됐다면, 개경과 서경에서 행해지던 연등회·팔관회를 넘어선 최대 규모의 국행 프로젝트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팔공산에 옮겨진 지 10년 만에 몽골 침략으로 말미암아 초조대장경 목판은 부인사에서 그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 인쇄본이 일본 교토 남선사와 국내에 전량의 43%가 현전한다. 고려대장경연구소가 2010년부터 5년 동안에 걸쳐 13세기 때 인쇄했던 형태 수준의 복원작업을 수행했다. 공동복원사업에 참여한 고려대장경연구소와 대구 동화사, 일본 남선사는 복원한 초조대장경 인쇄본 한 질을 각기 보관하게 됐다.
이로써 팔공산은 천 년만의 귀환 또는 초조대장경 본향으로서의 옛 명성을 되찾게 됐다. 고려대장경의 조성을 두고 1960년대 미국의 인공위성 발사와 비견할 만하다는 평가처럼 대장경에는 뭇 백성들의 기술력과 정성 그리고 뜻, 즉 우리 민족의 DNA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엄혹한 상황 속에서 고려 백성들은 대장경을 조성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더욱이 변변찮은 신발 한 켤레 없이도 어떻게 천 리 길을 걸어서 옮겼을까? 이제 후손들은 고려인들이 만들고, 고려 500년의 비장(祕藏)으로 팔공산에 잠든 국보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울 때다.
왕실과 민중들의 보금자리
팔공산은 여덟 고을에 펼쳐진 ‘공공(公共)의 산’이다. 여덟 고을을 아우르며, 백두대간의 허리 끝을 받치는 지세의 팔공산은 긴 능선을 백리령(百里嶺)으로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다.
그 남서면에 자리한 팔공산 파계사(把溪寺)는 통일신라 애장왕 때인 804년 심지왕사가 창건하며 “원래 물줄기가 9갈래로 흩어져 있어 물길을 모은다”는 뜻에서 이름 붙였다. “파계라는 이름만으로 이곳의 기를 제압할 수 없어 기를 진압한다”고 이름 붙인 진동루(鎭洞樓)를 1715년에 건립하고, 연못(지금의 주차장)을 만들어 삼중으로 방비했다. 누각 마당에는 조선 영조가 심었다는 임금나무인 느티나무가 서 있다.
1606년 중창한 원통전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봉황과 학 등을 새긴 수미단에 건칠관음보살좌상과 1707년 지승 등의 불화승들이 제작한 영산회상도를 걸었다. 1979년 관음보살좌상 개금불사 때에 복장물로 발원문, 영조의 도포 등과 1447년에 중수했다는 보살좌상의 복장기가 발견됐다. 발원문에는 “영조 어의를 복장해 만세유전을 빈다”고 기록됐다. 외출복으로 입었던 연녹색 빛의 청사 도포는 현존하는 최고의 어의(御衣)면서, 왕이 착용했다는 점에서 복식사적 가치가 크다.
파계사의 전각들 가운데, 1696년 현응당 영원대사가 성전암과 함께 지었다는 기영각(祈永閣)은 어실각이다. 조선 선조·덕종·숙종·영조 위패를 봉안한 기영각은 당시 양반과 유생의 횡포로부터 절을 지키고자 영원대사가 숙종에게 상소해 건립됐다. 1935년 건립한 「파계사 사적비」에는 연혁과 삼병조사(三甁組師, 경·율·론을 갖춘 조사) 선종 현응당대사의 기록을 새겼다.
절 입구에 “대소인 누구나 말에서 내리시오”란 하마비를 세웠는데, 숙종이 1693년 경기도 수락산에 머물던 영원대사에게 부탁해 왕자(영조)를 얻은 보답으로 세운 것이다. 영조의 축원사찰인 파계사 부도밭 한편에 자리한 하마비는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유교적 상징물이다.
19세기 왕실미술관으로 손색없었던 파계사의 보장각에는 수륙재 의식을 요약한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와 1612년 허균이 서문을 쓴 『청허당대사집』 목판을 비롯한 『천자문』(1688), 『영종대왕원당사적』(1806) 등의 책판이 있다. 1712년 조정 종친부에서 왕자 대군의 원당을 수호하고자 내린 문서인 『완문(完文)』을 비롯한 『원당시초영건기』(1727), 『어의궁완문』(1732), 정성왕후 서씨의 원당을 수호코자 1843년 예조에서 절목 8항목을 정한 『예조절목』 등 왕실 원당과 관련한 10종 10점의 고문헌을 소장하는 등 조선 후기 팔공산의 왕실도서관이었다.
오늘날 파계사의 산내 암자로는 대비암·현니암·성전암·금당암·칠성암 등이 있다. 성전암 법당은 현응전이라고도 불렸었는데, 1704년 11살의 영조가 쓴 ‘자응전(慈應殿)’ 편액이 걸려 있었다. 지금은 별도로 보존 중이다. 조선 말엽에 그려진 현응대사의 초상과 벽화도 있다.
근세기에 조계종 전 종정 퇴옹당 성철 스님이 한때 수도했던 성전암은 백흥암·운부암과 함께 팔공산의 3대 선방으로 알려진 곳이다. 근대 시기에는 파계사 원통전 관음보살의 신통력을 시기한 이들이 “원통해서 못 살겠네. 파계하여 사는 게 낫다”는 비속어까지 만들었다. 공납이며 부역에 시달리던 스님과 백성들이 한풀이로 내뱉은 말이 민담으로 전하는 것이다.
한편, 파계사 남동쪽의 부인사 들마당에서 열렸던 승시(僧市, 산중사찰 장마당)는 17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등에 기록된 바와 같이 팔공 산하의 대표적인 산계(山系)문화다. 또 638년 신라 의현대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일명 갓바위 부처님으로 만백성들의 귀의처로, 팔공산의 너른 품으로 찾아든 슬프고 아픈 민중들의 따스한 보금자리였다.
사진. 유동영
이지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저서 『남북불교 교류의 흐름-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논문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