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겨레의 기도처
평야보다 산이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국토의 70%가 산이니 아무리 넓은 평야라도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없다. 산은 하늘과 가까운 장소로 신령이 머물거나 천계의 신령이 내려오는 장소다. 당연히 민족의 역사도 산에서 시작한다.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허락을 얻어 바람의 신 풍백(風伯), 비의 신 우사(雨師), 구름의 신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천상에서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한민족 역사의 첫걸음이다.
한민족에게 있어 산은 정복의 대상도 아니고 체력을 보강하는 헬스센터도 아니다. 엄숙하고 숭고한 기도처로서 우리 선조들은 ‘산에 오른다(등산)’는 말 대신 ‘산에 든다(입산)’는 말을 썼다. 신성한 영역, 신령님의 품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산에서는 술 마시고 떠드는 일도 자연히 삼갔다. 심지어 민족의 조산(祖山)이자 성산(聖山)인 백두산에 들어갈 때는 변기를 따로 휴대했다. 더러운 배설물을 신성한 산에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1926년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나, 1936년 백두산 탐험대에 참가한 류달영 박사의 회고록에 그런 내용이 실려 있다. 지금도 한민족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간에 명산대찰과 크고 작은 암자와 기도원과 만신들의 치성터가 거의 모두 산에 흩어져 있다.
그렇다면 산의 표상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바위다. 최남선은 우리 문화의 특징으로 “돌은 산악의 표상이라 하고 이를 통해 태양과 천(天)을 숭배함”이라 했다. 당연히 좋은 바위가 많이 있는 산이 기도처가 되고, 대대로 전승돼 내려왔다. 한반도에서 좋은 바위란 바로 단단한 화강암이다. 영험 있는 기도처에는 화강암 바위가 많다. 화강암에 둘러싸인 곳이면 더욱 좋다. 남해 보리암도 그렇고, 강화 보문사도 그런 곳이다. 도인이 많이 난다는 금강산도 마찬가지다. 서울 북한산, 경주 남산도 다 이런 곳에 해당한다.
반면 푸석돌이거나 석회암이 많은 산이면 격이 조금 낮아진다. 흙산도 마찬가지다. 또한 돌만 좋아서는 안 된다. 필수적으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전국의 마애불을 답사하다 보면 반드시 샘물이나 계곡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즈음에는 화강암에서 지자기(地磁氣)가 뿜어져 나오고, 이런 산을 오르면 신체가 지자기를 흡수해 몸이 상쾌해진다고도 한다. 흙산보다는 바위산이 기가 세다. 기가 센 만큼 이런 곳에서 기도하면 소위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말도 한다.
약사 신앙이 일어나다
역사적 존재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 시간이 흘러가자 사람들은 그와 같은 덕성을 갖춘 부처님을 현실 세계에서 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전생에 무수한 덕행을 쌓아 현세의 부처님이 됐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부처님은 출현했을 것이고, 미래에도 출현할 것 아닌가? 여기에서 과거불과 미래불이 등장한다. 과거 7불과 연등 부처님, 미래의 미륵 부처님이 그 부처님들이다. 그러나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의 부처님을 만나 뵙기에는 장구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56억 7000만 년이 지나야 미륵 부처님이 출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중생들이 살고 있는 남섬부주 밖의 다른 세계에도 부처님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한 믿음 위에서 출현한 부처님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있다는 아미타 부처님이다. 동방유리세계의 약사 부처님도 그렇게 출현했다.
약사 부처님의 열두 가지 본원과 공덕, 그 신앙의 이익을 설한 『약사경』은 인도에서 3세기경 성립돼 5세기경 중국에서 번역됐다. 일찍부터 의학이 발달한 인도 문화의 영향으로 『오분율』이나 『십송율』 등 계율을 설한 율전에도 질병의 종류나 원인, 치료법과 약제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약사 신앙이 일어나 발전할 수 있었던 토대가 인도에 있었던 것이다.
『약사경』은 삼국통일 전에 이미 신라에 들어와 있었다. 선덕여왕 때, 밀본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여왕의 병을 고쳤다. 통일 후인 경덕왕 14년(755)에는 분황사에 30만 6,700근의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안치했다. 바로 전 해인 754년에는 황룡사종을 완성했는데, 49만 7,581근이 들었다. 12만 근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4배 크기였다. 이를 견줘 보면 분황사 약사여래상이 얼마나 거대한 크기였는지 알 수 있다. 그만큼 약사 신앙이 국가 주도의 행사로도 정착됐다는 뜻이다.
약사 신앙이 이렇게 뿌리내리게 된 데에는 단순히 중생의 병고를 구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토왕생, 국가수호 등 대승의 중요 신앙이 모두 담겨 있다는 특징 때문이다. 곧 국가나 개인이 갖고 있는 현실 세계의 모든 어려움을 다 구제해 줄 수 있는 만사 해결, 만병통치의 위력을 갖춘 부처님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기근, 도적, 질병 등의 재해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약사 신앙은 더욱 활성화됐고 그 결과 약사 부처님도 많이 조성됐다. 팔공산의 약사여래상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갓바위 부처님
팔공산은 면적만도 125.607km2에 이를 만큼 규모가 큰 바위산이다. 같은 바위산이라도 둥글둥글한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으면 더욱 좋은 기도처가 된다. 신라 이전부터 팔공산은 인근 부족국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이었다. 지금 비로봉에 남아 있는 제천단비를 그 전통의 흔적이라고 추정한다.
팔공산은 명산인 만큼 골골마다 수많은 암자가 깃들어 있고 남아 있는 절터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교의 중요한 종파들도 속속 자리 잡았다. 미륵 신앙의 근거지인 동화사가 있고, 지장 신앙의 근거지인 지장사(지금의 북지장사)가 있다. 그러나 팔공산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처는 갓바위 부처님으로 알려진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사진 1]이다.
우선 관봉(冠峰, 850m)은 팔공산의 혈맥이 주봉인 비로봉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유난히도 헌걸찬 기세로 일으켜 세운 바위 봉우리다. 누가 보아도 산의 기운이 마지막으로 맺힌 듯한 곳이다. 풍수가들은 흔히 ‘용의 콧잔등’이라 하고, ‘천리행룡 일석지지(千里行龍 一席之地)’라고 호들갑을 떤다. 용맥(龍脈)이 천 리를 내려가다가 마련해 놓은 명당이라는 것이다.
대개 이런 자리는 불교 이전부터 기도객들이 드나들었던 길지다. 불교가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모시게 되는데 그 조성 방식이 다른 곳과 확연히 다르다. 보통은 바위 표면에 돋을새김이나 선각(線刻)으로 마애불을 조성하지만, 갓바위 부처님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내려가며 앉아 있는 부처님을 입체적으로 조각했다. 어느 장인이 조성했는지 솜씨도 뛰어나서 남성적 기백의 당당한 풍모와 굳센 의지가 여실히 엿보인다. 기도하면 꼭 들어주실 것만 같은 믿음이 생긴다.
머리 위에 마치 갓처럼 생긴 넓은 판석을 쓰고 있어서 ‘갓바위 부처님’이라는 별명이 생겼지만, 원래 이런 돌갓을 보개(寶蓋)라고 부른다. 존귀하신 부처님 머리 위에는 눈, 비가 직접적으로 닿지 않도록 하늘을 가리는 가리개가 떠 있는데 이를 천개(天蓋)나 보개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려불화나 변상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야외에 세워진 석불에 이 보개를 만들어 허공에 띄울 수는 없기에 부처님의 머리 위에 얹어 놓게 된 것이다. 노천의 부처님에게 눈, 비를 맞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보개의 모양이 어떤 것은 벙거지 같기도 하고 보관(寶冠) 같기도 하지만, 관봉 부처님의 보개는 갓을 닮았기에 갓바위 부처님이 된 것이다. 갓바위 부처님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됐지만, 이런 보개는 고려시대에 유행했기 때문에 그 시기에 보개를 얹었다고 본다.
사실 갓바위 부처님의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인이다. 그런데도 1930년대까지 미륵불로 불러오다가 차츰 약사 부처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1962년 10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영험 있는 약사불로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수험생이나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면서 해마다 20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영험 기도처가 됐다.
결국 갓바위 부처님의 존명이 달라진 것은 이 부처님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도들의 신앙심이 투영된 결과다. 불상의 명칭에 이런저런 변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술사적인 문제일 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반 신도들에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중생의 병을 고치는 큰 의사라고 해서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산중의 약사 부처님
팔공산에는 약사 부처님으로 인정받는 불상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대개 통일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조성했다고 보기 때문에 나말여초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약사 부처님도 여러 기도터에 출현했던 것이다.
우선 미타봉이라고 불렸던 동봉에서 정상인 비로봉으로 가는 능선의 안부에 있는 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대구시 유형문화재)[사진 2]이 있다. 홀로 우뚝 서 있는 큰 바위에 새겨진 약사 부처님은 높이가 6m에 이른다. 커다란 왼손에 약함을 들고 아픈 중생들을 내려다보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다. 불두(佛頭)와 상반신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했고, 아래로 갈수록 얕고 둔하게 처리했다. 몸체에 비해 큰 두 손은 많은 중생을 거두려는 뜻일까? 참배객들은 멀리서 정면으로 보는 것보다 가까이 다가가 부처님을 우러러봐야 자애로운 참모습을 느껴볼 수 있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대구시 유형문화재)[사진 3]은 비로봉에서 서봉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를 따라가다가 길 왼쪽으로 숨은 듯이 들어앉은 공터 절벽에 모셔져 있다. 이 공터가 심상치 않다. 훤칠한 바위들이 빙 둘러섰고 앞으로는 잘 다듬은 절터가 남아 있다. 왼쪽으로는 동봉이, 오른쪽으로는 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앞쪽으로는 툭 터진 산하가 아득히 내려다보인다. 우리 선조들이 이런 명당을 놓칠 리가 없다. 바위 병풍 중간쯤 암벽에는 높이 3.6m의 약사여래 부처님이 얌전히 새겨져 있다. 갓바위 부처님이 남성적이라면 이곳 부처님은 조신하고 단아한 여성형이다. 광배의 불꽃무늬까지 섬세하게 새겼고, 왼손에는 당연히 약함을 들고 있다.
연화좌대는 더욱 특이하다. 좌대 양쪽 아래에는 용의 머리가 각각 새겨져 있다. 몸통도 일부 길게 새겨져 있으니 다른 연화좌대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신묘하고 조용한 절터의 서쪽 소나무 숲 그늘에 앉아 있자니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 약사 부처님이 필자의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어디에서 이런 명소를 다시 만날까?
신무동 삼성암지(삼성암터) 마애약사여래입상(대구시 유형문화재)[사진 4]은 부인사에서 소봉 방향으로 40분가량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초라한 토굴이 있는 옛 절터에서 200m 떨어진 능선 위에 약사 부처님이 있다. 애석하게도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후대에 지반에 문제가 있어 그리된 듯하고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도 금이 가 있어 마음이 안쓰럽다. 높이 3.6m 바위에 키가 2.36m인 약사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데, 무릎 아래로는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하다. 입은 굳게 다물고 옷은 경직되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본다.
마애약사불 아래에는 지금도 샘이 보존돼 있다. 산등성이 가까운데에 이런 샘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하기야 샘이 있으니 기도터가 되고 마애불이 조성됐으리라. 아래 토굴에 머무는 거사님에게 들으니 1952년까지 이 샘 곁에 작은 토굴이 있어 스님이 수행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갓바위 부처님이 계시는 관봉 아래 불굴사 약사보전에 석조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사진 5]이 안치돼 있다. 근래에 모셔진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오도암에도 있지만 팔공산에서 가장 압권인 약사여래상은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사진 6]일 것이다. 석조약사여래불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높이가 33m에 이르며 1992년 봉안했다. 이는 팔공산이 약사신앙의 본거지임을 감안해서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인류의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팔공산은 약사 신앙의 맥이 끊어져 본 적이 없다. 중생의 바람도 또한 한결같다. 질병의 퇴치와 갖가지 소원의 원만 성취다. 팔공산의 약사 부처님들은 중생들의 간절한 기도의 염원 속에서 언제나 귀 기울이며 건재할 것이다.
사진. 유동영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