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삼존불의 주인은 누구인가?
경상북도 군위군 소재의 팔공산 연봉 북쪽 기슭에는 암벽을 뚫어 만든 인공석굴이 있다. 석굴 안에는 부처님 한 분과 보살 두 분을 안치했는데, 바로 국보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이하 군위삼존불)이다. 1962년 군위삼존불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을 때, 아시아의 많은 연구자가 본존불(부처님)이 누구인가를 가지고 설왕설래한 문제작이다.
군위삼존불은 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경주 석굴암보다 더 오래된 석굴사원이다. 석굴은 지상에서 20m 위로 올라간 암벽 중간에 위치한다. 원형으로 된 입구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방형으로 이뤄졌다. 천장은 한가운데가 제일 높고 사방이 점차 낮아지는 궁륭형(穹窿形) 석굴사원이다.
3m에 육박하는 본존불은 결가부좌를 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감싼 얇은 통견의(通肩衣)로 옷의 주름이 대좌를 덮는 상현좌(裳懸座)의 모습이기도 하다. 본존불의 뒷벽에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음각해 넣었고, 좌우에는 입상 형태의 협시보살을 안치했다. (우리가 바라본 방향에서) 본존불의 오른쪽은 머리에 화불이 새겨진 관을 쓰고 왼손에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이 틀림없다. 본존불의 왼쪽은 보병이 새겨진 관을 쓴 대세지보살이다.
군위삼존불이 많은 이들에게 문제작으로 회자한 데에는 본존불이 어떤 부처님인지 규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손 모양은 왼손이 항마촉지인, 오른손은 선정인과 유사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즉 수인을 근거로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었고, 협시인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근거로 아미타 부처님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현재는 군위삼존불의 모습이 7세기경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에서 제작된 아미타삼존불과 유사해 아미타 부처님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아미타 신앙
‘아미타(阿彌陀)’의 원어는 Amitāyus(아미타유스) 혹은 Amitābha(아미타바하)로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을 의미한다. 아미타불을 무량수불로 부르기도 하는데, 아미타불이란 아미타의 원어를 음역한 것이고 무량수불은 뜻을 의역한 것이다. 무량수불이란 이름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사용됐다. 남북조시대는 아미타 신앙이 유입된 초기로 독자적인 신앙이 아닌 다른 신앙과 결합한 형태이거나, 무량수불을 조성해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현세 기복적 성격이 강했다.
아미타불이란 이름은 6세기 후반부터 등장해 수·당대에 크게 유행했다. 이때부터 아미타 신앙은 정토 신앙이 중심이 된 독립적인 신앙의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담란(曇鸞, 476~542) 스님이 정토삼부경을 중심으로 아미타의 본원력을 강조했고, 용수가 타력 이행을 아미타불로 한정해 아미타불의 칭명염불을 권장하는 등 아미타 신앙이 강화됐다. 이후 도작(道綽, 562~645) 스님 등에 의해 정토가 아미타불국토의 대표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아미타 신앙이 유행하면서 수·당대에는 『관무량수경』에 기반을 둔 변상이나 아미타삼존상, 서방정토변상도의 제작이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 신앙에 대한 기록은 7세기경부터 확인되며, 그 이전의 아미타 관련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고구려에서 조성된 금동 신묘명 삼존불입상(국보)의 명문에는 ‘무량수불을 조성해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한다’고 했고, 일본 호류지(法隆寺)의 헌납보물 196호 갑인명 광배에는 ‘석가상을 조성해 정토에 가기를 기원한다’고 새겨져 있다.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혜사(慧思, 514~577) 스님이 미륵과 아미타를 함께 공양했다는 기록이, 「선광사연기(善光寺緣起)」에는 아미타불에게 참배하고 염불하자 전염병이 나았다는 기록과 함께 이를 보답하기 위해 아미타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아미타 신앙에 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시기는 『삼국유사』를 통해서다. 『삼국유사』(권2, 기이2) 문무왕조에는 “문무왕 시기(재위 661~681)에 인문(仁問)이 죽자 인문을 위해 관음도량을 미타도량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동권』(권5, 감통7) 광덕·엄장조에는,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아미타불을 외우고 16관(觀)을 실천하여 서방왕생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우리나라에 아미타 신앙이 들어온 시기는 기록과는 별개로 7세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초기의 아미타 신앙은 중국 남북조시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신앙과 결합한 현세 기복적인 신앙이었다. 이후 7세기 후반부터 미륵 신앙과 함께 아미타 신앙이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오랜 전쟁으로 혼란한 시기가 지속된 까닭이 크다. 전쟁에서 죽은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괴로운 현실을 피해 서방정토에서 살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의 유행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7세기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군위삼존불이 석굴암보다 오래된 석굴사원이라고 소개했다. 문제는 군위삼존불에 대한 그 어떤 기록도, 명문도 남아 있지 않아 수수께끼와 같은 불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지역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삼존불들이 존재해 군위삼존불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이하 비암사 계유명상), 세종시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이하 무인명상), 기축명아미타불비상(이하 기축명상) 3구에는 모두 ‘아미타(阿彌陀)’라는 존명이 새겨져 있다. 비암사 계유명상은 불상 하단과 뒷면에 “계유년(673)에 국왕과 대신, 칠세부모(七世父母)를 위하여 절을 짓고 아미타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조성했다”라는 조상기가 적혀 있다. 무인명상에는 “무인년(678)에 미타, 미륵을 조성했다”라는 기록이, 기축명상에도 “아미타불과 불보살들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삼존불은 당시 아미타 신앙이 특정 지역이 아닌 한반도 전체에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본존불의 손 모양은 비암사 계유명상의 경우, 석가모니불의 수인인 시무외인과 선정인을 하고 있다. 무인명상은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마모로 확인이 어렵다. 기축명상 역시 시무외인과 선정인을 하고 있다. 이들 불상이 수인과는 관계없이 아미타불이 된 데에는 남아 있는 기록의 힘이 가장 크고, 당시 아미타불의 수인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위삼존불이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취한 것처럼, 비암사 계유명상 역시 동일하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선도산 마애삼존불) 역시 보관에 화불과 정병을 새긴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뒀다. 새로운 수인과 화불, 정병은 7세기에 조성된 아미타불상의 도상적 특징이다.
군위삼존불 이외에 촉지인 수인을 한 아미타불상이 존재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상이 그러하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부석사 창건(676) 당시의 불상과 동일한 모습으로 재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7세기에 조성된 아미타불은 수인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시기로 다양한 수인을 한 새로운 도상들이 등장한다. 이는 비단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러했으며, 군위삼존불 역시 그러한 맥락 위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 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일본 미술을 독특한 시각으로 연구하며, 아시아의 불교미술 교류에 관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