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의 발견] ‘반야바라밀’은 어떻게 지혜의 여신이 되었나
상태바
[불경의 발견] ‘반야바라밀’은 어떻게 지혜의 여신이 되었나
  • 방정란
  • 승인 2024.10.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후기 대승 경전의 특징과 사본

『팔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의 한 장면은 세존과 인드라(제석천)의 대화로 시작된다. 

세존께서는 “반야바라밀(경)을 받들어 수지하고 낭독하며 숙달시킨 후, 이를 지속적으로 반복한 다음에 이를 다른 이들을 위해 펼쳐 보이고 가르치고 해설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통달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신 후, “이처럼 필사된 반야바라밀경전의 사본은 예경의 대상이 되는 (사리)탑과도 같다”고 설하셨다. 

이러한 교시를 청해 들은 인드라는 세존께 곧바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러하다면 반야바라밀경전을 사경하여 필사본을 만드는 이와 여래와 정등각자, 아라한의 사리를 안치한 탑을 조성하여 예경하는 이, 둘 중에 어떤 이에게 더 큰 공덕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러므로, 카우시카여! 선남자 혹은 선여인은 이 반야바라밀을 사경하거나 책으로 만들고 나서 안치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사경된 사본을) 성스러운 꽃과 훈향, 향료, 화환, 바르는 향, 가루향, 승복, 양산, 번과 종과 깃발로써 예배하고 중하게 여기며, 공경하고, 의례를 올리고, 찬탄하며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카우시카여! 이것이야말로 선남자와 선여인에게 수많은 공덕이 생겨나게 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카우시카여! 실로 (이로써) 선남자 선여인은 일체지자(이신 부처님)의 지혜에 공양을 올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원후 11세기 초에 제작된 팔천송반야경(Add. 1643)의 폴리오(59r). 
왼쪽 그림에는 탑을 예경하는 두 불교 신자의 모습이, 오른쪽에는 녹색 빛의 타라(Tārā) 여신이 그려져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디지털라이브러리 소장

 

필사본 제작 문화와 반야경

『금강경(金剛經)』 등 여러 대승 경전에는 사리탑을 예경하는 여러 구절이 등장한다. 앞서 나온 세존과 인드라의 문답은 필사된 경전 자체가 예경의 대상이 되는 모습은 물론, ‘사리탑 예경’에서 ‘필사된 경전에 대한 예경’으로 변화되는 신앙의 모습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경전 필사본 신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데에 반야경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리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전의 가르침을 반영하듯, 인도의 오래된 패엽(貝葉) 사본 중 현재까지 가장 많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바로 『팔천송반야경』을 적은 사본들이다.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 지혜가 완성된 상태)이란 “모든 유위법이 환영(幻影)과 같으며, 생겨난 것이 아님(無生)을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혜는 시방삼세의 부처와 보살들의 어머니(佛母)이자, 불성의 진정한 원천으로서 간주한다.

장자 수부티는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옮겨 적는다는 것이 대체 가능한 일이옵니까?”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부티여, 실은 그렇지 않다. 수부티여, 어떤 이들이 반야바라밀을 글자들로 쓰고 나서 반야바라밀을 적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쓰인) 글자들 안에 반야바라밀이 계시지 않는다고 집착하거나, 혹은 쓰인 글자들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에 집착한다. 

수부티여, 이들은 이 또한 마라의 소행이라고 알아야만 한다.”

『팔천송반야경』은 경전의 필사본을 신앙의 대상으로 교시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부처님의 정각을 방해했던 마라(Māra)의 농간이 생겨날 수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한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필사된 반야바라밀 경전 자체에 집착하거나 혹은 필사된 반야바라밀을 진실하지 않다고 여기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의심하는 일을 경고한다. 

이는 ‘일체의 법을 공(空)으로 알아, 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반야 지혜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반야경의 가르침 자체가 필사본 숭배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적 행위로서의 사경 ‘싯담(siddham)’

인도 아대륙(현 인도와 파키스탄, 네팔 일대)을 걸쳐 경전의 유통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고층 필사본은 팔미라(Palmyra)나 탈리폿(Talipot) 같은 종류의 야자수를 재료로 한다. 패엽이 사용된 기원은 기원전 5세기 무렵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필사할 수 있는 형태의 패엽으로 만드는 과정 자체가 녹록지 않거니와 대규모 제작이 불가능하기에, 가로길이가 길게 만들어진 형태일수록 정교한 수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렇게 준비된 패엽에 사경하는 일을 인도인들이 특별한 의식으로 여겼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사본의 첫 문양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관습을 꼽을 수 있다.

기원후 11세기에 인도를 여행하며 풍토를 전했던 이란 출신 학자 알비루니(Al-Bīrūnī)는 당시 인도인들이 경전을 제작하던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인도인들은 필사를 시작할 때, 우주의 창조라고 여겨지는 ‘옴(oṃ)’으로써 시작한다. 이 음절은 글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축복을 내려줄 신과의 합일을 불러일으켜 주는 문양인데, 이를 먼저 적는다.”

여기서 말하는 간략한 모양은 싯담(siddham)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완벽히 준비된, (그러므로) 성취된’이라는 의미를 아우른다. 싯담이라 불리는 문양은 마치 물음표나 알파벳 ‘S’를 뒤집거나 비스듬하게 놓은 것과 유사하게 생겼다. 인도의 거의 모든 사본과 비문(碑文) 기록은 이 모양을 적는 것으로써 시작된다. 

인도인에게 있어 성스러운 경전을 기록하는 작업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필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종교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패엽은 첫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에 성스러운 가르침을 담는 그릇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필사자는 그 순간에 마음을 모아 사경이라는 전 과정의 염원을 바로 이 싯담 문양에 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경 문화는 불교 사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철필(鐵筆)을 들어 사본을 긁어 첫 글자를 새기는 순간이 필사자에게는 불보살에게 귀의하는 일종의 예경 행위였다. 경전을 필사하는 것은 그만큼 신중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문양 뒤에는 경전의 주요한 불보살을 향한 예경문이 뒤따른다.

싯담 문자로 작성된 『반야심경(般若心經, Prajñāpāramitāhṛdaya)』 패엽 사본, 일본 호류지(法隆寺) 소장.  
기원후 7~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 최고(最古) 사본 중 하나로 여겨진다. 사본 첫머리에 성스러운 문양인 싯담(siddham)이 그려져 있으며, “namas sarvajñāya(일체지자에게 귀의합니다)”로 시작하는 예경문이 뒤따른다. 

 

반야바라밀 불모(佛母)의 탄생

기원후 5~6세기 인도 중세기에는 우주의 여성 원리인 샥티(Śakti)를 강조하는 샥티즘(Śaktism)이 흥한다. 이에 힘입어 여성 존격들은 인도 신전(神殿, pantheon)에 서서히 들어와 정중앙에서 가장 주요한 우주원리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샥티즘은 밀교의 흥기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로써 반야경의 필사본을 붓다의 지혜 그 자체로서 존숭하는 신앙뿐 아니라, 반야바라밀을 여성 존격인 불모(佛母)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반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는 사상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인도의 경전 언어 산스크리트어는 문법적 성(grammatical gender)을 지니는데, ‘지혜가 완성된 상태’를 뜻하는 말인 ‘프라즈냐-파라미타(prajñā-pāramitā, 한역으로 반야바라밀)’는 여성형으로서 그 자체가 또한 여성 존격을 지칭할 수 있다. 

10세기 전후로 제작된 반야경 필사본에는 여성으로 묘사된 반야바라밀 불모의 그림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여성 존격인 반야바라밀 불모에 대비해 남성 존격에 해당하는 문수사리(Mañjuśrī) 보살도 그려진다. 문수사리 보살은 칼과 연꽃, 혹은 칼과 반야경을 들고 있다.  

오른쪽 페이지의 가장 상단의 첫 번째 필사본은 인도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대승불교의 주요 사원 중 하나였던 비하르(Bihar)의 날란다(Nālandā) 승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팔라(Pāla) 왕조는 8세기부터 12세기 중엽까지 벵골과 비하르 지역을 다스렸다. 이 기간에 수려한 삽화를 포함한 다수의 반야경 필사본이 계속해서 생산됐다. 그 유통 범위는 카슈미르는 물론 네팔, 티베트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비하르의 날란다(Nālandā) 승원대학 소장으로 추정되는 『팔천송반야경』 사본의 처음과 마지막 폴리오(folio), LA카운티미술관 소장.
위의 도판의 첫 번째 폴리오에서 중앙에 그려져 있는 반야바라밀 불모.
(오른쪽)인도 서북부 카슈미르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반야경 사본의 반야바라밀 불모. 
반야경 사본의 정중앙에 그려진 문수사리(Mañjuśrī) 보살의 모습.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필사본 형태의 경전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경전을 필사하는 의례

인도 밀교에서도 사다나(sādhana)라고 불리는 밀교식 의례와 수행에서 반야바라밀 불모는 특히 중요한 존격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반야경 필사본의 제작과 숭배 관습은 지금까지도 네팔 등지에서 맥을 이어 행해지고 있다.

필사본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의례화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본이 여신으로서 숭배되는 종교 행위는 비단 불교에서만 발견된 것은 아니다. 12세기 초반의 사상가 락슈미다라(Lakṣmīdhara)는 『데비푸라나(Devīpurāṇa)』라는 서사시에 설해지는 ‘지혜의 보시(Vidyādāna)’라는 의례 절차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1. 스승을 찾아가 경전을 학습하고 이해한다.  

2. 잘 보존되고 제본된 경전의 사본을 붉은색 혹은 검은색 가죽 덮개와 함께 준비한다.

3. 북동쪽으로 경사가 진 장소를 필사할 장소로 선택하고, 그곳을 정화하는 작업을 한다.  

4. 중앙에 다채로운 색으로 연꽃을 그린 후, 주변을 꽃 등으로 장식하고, 천막을 설치한다.  

5. 필사된 사본과 필사할 패엽을 겹쳐 놓고 절을 올린다. 

6. 필사 후에는 물기가 없는 꽃과 전단향, 재 등을 써서 사본을 연마한다.  

7. 필사된 사본 앞에 향 등의 여러 공양물을 배치하고, 보호신들에게 먼저 공양을 올린다. 

8. 어린 소녀나 여인을 모셔와 이들을 여신으로 삼아 경배하고 필사한 사본을 공양한다.  

9. 재량에 따라 사제들에게는 헌금을 바친다.  

10. 경전에 해박한 필사자에게 공양 의례를 행한다.  

11. 의뢰자(제주)는 필사자에게 사본 필사의 시작에 바치는 시를 짓도록 하고, 필사하는 동안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물품과 환경을 조성해 제공한다. 

12. 필사가 완성된 다음 날에는 제주 자신도 정화를 위한 명상 수행을 행한다.

이러한 필사 의례는 인도 밀교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발견된다. 12세기 무렵 쿨라닷타(Kuladatta)가 저작한 주석서인 『크리야상그라하판지카(Kriyāsaṃgrahapañjikā)』에서 묘사된 밀교식 필사본 제작 의례가 그것이다. 

요약하자면, 밀교 수행자는 패엽에 필사하기 전 자신을 아미타바(Amitābha) 여래(아미타불)로 관상(觀想, visualization)한 후, ‘훔 아하 옴(hūṃ āḥ oṃ)’이라는 진언을 두 번 암송한다. 그런 후 다시 바즈라삿트바(Vajrasattva, 금강살타) 진언을 백팔 번 염송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준비한 패엽을 금강의 힘이 부여된 물건으로 성화(聖化)시켜야만 한다’고 서술한다.

사경을 위한 잉크는 불보살 지혜의 정수가 담긴 감로수로 관상하며, 글씨를 새길 철필 또한 최승본초금강(最勝本初金剛, Paramādya-vajra)으로서 관상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의 단계마다 그에 적합한 진언의 염송이 규정된다. 
다시 말해, 밀교식 사경 의례는 자신을 본존으로서 관상하는 신성요가(devatāyoga, 神性요가)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 필사본 제작에 관련된 모든 물건을 성물(聖物)로 명상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텍스트 그 이상을 전하는 필사본

기원후 13세기 전후로 인도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다. 불교는 점차 인도 내에서 설 자리를 잃고 네팔을 거쳐 티베트 등지로 거처를 옮긴다. 각 사원에 안치돼 있던 귀중한 필사본들도 길을 떠난 많은 승려와 신도의 손에 들려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인도 대승불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날란다 승원대학과 비크라마쉴라 승원대학에 보관돼 있던 패엽 필사본 중에는 이렇게 네팔과 티베트 사원들로 옮겨진 것들이 있다.

시간이 흘러 이 사본들이 근현대 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서 재발굴되기까지는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인도불교의 주요한 경전과 논서들이 현재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이제 일부 필사본들은 인터넷 아카이브 등에서도 공개돼 손쉽게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 필사본들을 살펴보다 보면, 경전과 논서를 공부하고 염송한 이들이 여백에 남긴 교정 메모나 주석 노트, 혹은 중요한 부분에 붉게 칠해진 표시 등을 발견하게 된다. 그 흔적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필사본이라는 것이 단순히 텍스트를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쓰고 읽고 사용했던 이들의 숨결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필사본이 제작되던 당시를 자연스럽게 상상하며 반야경의 구절을 다시금 떠올린다.  

수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불법이 전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게 그 가르침을 진실되게 여기고, 소중히 하며, 독송하고, 예경하며, 공부하여 이를 남에게 설명하고 전하고자 했던 각 개인의 노력이 거기에 생생히 담겨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상상도 한다. 

 

● 참고문헌

Kim, Jinah, ‘Receptacle of the Sacred: Illustrated Manuscripts and the Buddhist Book Cult in South Asia’(2013),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Kinnard, Jacob N., ‘Imaging Wisdom: Seeing and Knowing in the Art of Indian Buddhism’(1999), Routledge. 

 

방정란
독일 함부르크대학(고전인도학 전공)을 졸업하고, 현재 경상국립대학교(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인문학연구소에 있다. 산스크리트 사본을 기반으로 문헌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주로 샤이바(Śaiva)와 인도밀교(Vajrayāna)를 포함한 인도 탄트라 전통을 연구한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