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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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시대
  • 관리자
  • 승인 2009.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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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시심
산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는 똑똑히 볼 수 있어도, 숲 전체를 잘 보기는 어렵다. 한 때 한 곳에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사건은 알 수 있어도 역시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우리의 뜻대로 역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 것일까? 인류 역사 앞에 우리가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함께 산다는 그것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끼리 사람과 동물과도 이런 우리의 염원은 이루어져 가고 있다. 이제는 지구 일각에 있던 신과 사탄도 인간으로 돌아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수도 사랑하면서도 사탄만은 미워하기 2000년. 이런 신과 사탄의 애증(愛憎)의 갈등도 이제 현실에서 그 막을 내리고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야흐로 보편적인 인간시대가 도래하였다. 인간으로서 함께 산다는 일 , 거기 남은 것은 오직 노하우의 문제이다. 그 과제가 수미산에서 소(牛) 찾는 일만큼이나 어렵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려울 뿐이다.
인간의 역사에 인간의 노력에 불가능이 있었던가. 시행착오와 전진을 위한 후퇴. 거기에 회의를 느낄 수 도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기우에 그치고 만다. 인간이 역사를 장원심(長遠心)으로 대한다면 기대를 가져도 좋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가는 역사에는 뚜렷한 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지표는 이미 30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하여 완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표를 알아볼 수 있는 무수한 세계의 지성이 있다.
비록 아직도 무지와 아집과 망념이 어둠과 이기(利己)와 혼탁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인간의 역사가 그런 것들로 인해 좌절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지혜와 자비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니까. 이것들이 사람의 체(體)라면 거기에 따른 용(用) 또한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어 갈수도 있다. 사람은 이런 삶을 자진해서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쓰레기를 버리는 이가 있으면 그것을 줍는 이가 있고, 버리고 줍고 이렇게 거듭하다가 버리는 수가 줄어 갈 것이다. 물론 어떤 때는 버리는 이가 더 많은 수도 있다. 이런 역사의 역행도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그래서 역사는 기복(起伏)으로 진행한다.

방服隱明珠요.
石中藏碧玉이라.
麝香自然香하니
何必當風立이리오.

방함(蚌蛤) 속의 진주처럼,
돌속의 벽옥처럼,
사향은 그 향을 절로 풍기는데
굳이 바람 앞에 설 필요가 있으랴.
-야보(冶父) 스님의 게송-

자연의 만물이 이렇게 아름다운 체(體)를 가지고 있어서 필요에 따라 그 용(用)을 발휘할 수가 있다. 이렇듯 사람에게도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고루 갖추어져 있으니 그 살림 또한 자재롭지 않은가. 그래서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야보 선사는 송나라 때 유명한 스님이다. 법명은 도천(道川)이고 야보는 그 법호이다. 우리나라에는 금강경 오가해(五家解)에 야보송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스님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있다. 스님은 출가 전부터 법문 듣기를 좋아했다.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만 들으면 원근을 불문, 만사 제치고 달려갔다. 그런 습관은 장성해서도 변치 않았다. 관가(官家)에 벼슬을 살면서도 여전하였다. 그 때문에 직무태만 죄로 태형(苔刑)을 맞게까지 되었다.
형틀에 묶여서도 법문(法門)에만 골몰하였다. 곤장을 몇 대 맞았는데도 별 반응이 없자, 주위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를 지켜보던 상관이 형리(刑吏)에게 사정(私情)은 두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형리는 억울하다는 듯이 힘을 다해 곤장이 부러질 정도로 한껏 내리쳤다. 바로 이 순간에 이름을 못 이겨 아이구! 소리와 동시에 천지가 열리며 야보 스님이 크게 깨쳤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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