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올라갈 때마다 마음이 오지게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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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올라갈 때마다 마음이 오지게 힘들어요”
  • 김남수
  • 승인 2024.07.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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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 미황사 불사 30년, 현공 스님
현공 스님이 쓰레기를 줍고 치우자, 마을 사람들이 ‘청소부 스님’으로 불렀다.

해남 미황사 부도밭 옆에 부도암이 있다. 부도암 마당에 커다란 구멍이 있고 그 한가운데 비가 하나 서 있는데, 이 비가 미황사의 역사를 기록한 「미황사 사적비」다. 

“스님, 왜 큰 구멍을 파고 비를 세웠을까요?”

“유생들이 해코지할까 여차하면 묻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현공 스님이 미황사에 발을 들여놓은 때가 1991년 3월 말이다. 

“3월 말에 왔는데,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마음이 심란하고 정나미가 떨어지더라고. 며칠 뒤 광주에서 짐 10박스 가지고 왔는데, 10년 동안 풀지 않았어.”

대웅보전과 응진전만 제대로 있었고, 나머지는 민가와 다름없었단다. 사람도 없어서 “강도 같은 사람도 데리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스님은 쓰레기를 퍼 나르는 것으로 시작해 만하당, 세심당, 자하루 등 여러 건물을 짓고 석축을 쌓았다. 미황사가 아름다운 절로 거듭나기까지 30년간 불사를 진행한 현공 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봤다. 

현공 스님은 “나는 게으르지만, 천성적으로 수치에 밝은 사람”이라 한다. 

 

다가온 인연들

미황사는 해남 바닷가 사람들의 마을 절이었다. 스님들이 꾸준히 있기는 했지만, 어찌해 볼 도리를 못 내고 있었다.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을 비롯한 여러 권속이 얼기설기 조립한 건물에 있었는데, 어느 사찰에서 명부전 권속을 모시고 가려고 했다. 이를 마을 사람들이 막아 지켜낸 적도 있었다. 스님이 머무른 지 2~3년 넘을 즈음 인연이 만들어졌다.

“인연 있는 송광사 스님하고 멋있는 신사가 방문했는데, 당시 크라운제과 회장님의 자제분이었지. 여기가 해남 윤씨 본가가 있잖아? 시제(時祭)를 마치고 서울 가는 길에 들렀나 봐. 권선문 들고 서울로 오라 하더라고.”

올라가니 “하시고 싶은 것 하시라”며 여러 회사 명의로 각각 모아 1억을 기부했다. 만하당을 처음 올렸고, 남은 돈은 미황사 여러 건물이 올라갈 수 있는 종잣돈이 됐다. 
1995년 어느 날인가 마당을 정리하고 있는데, 해남군청 사람들이 석축을 쌓으려고 여러 명 모여 있었다. 사찰과는 일언반구 상의도 없었다.

“그길로 군청 담당자를 만나 ‘자본적 보조로 사찰에 내려주면 잘 짓겠다’ 이야기했지. 상대도 하지 않더라고. 군청 마당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 담당 실장을 만났는데 점잖게 이야기하며 ‘잘해 보라’ 하더라고.”

그렇게 석축도 쌓기 시작했다. 송광사 현고 스님과 신영훈 선생, 태창건축사무소 대표를 초청해 미황사의 대략적 그림을 그렸다. 지역의 여러 사람 손길과 도움이 모여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게으르지만, 수치에 밝은 사람”

사람들이 미황사를 많이 찾으며 대방(大房, 큰방)이 필요했다. 그때 지은 것이 세심당. 많은 사람이 묶을 수 있는 방이었고, 불편하지만 편의시설도 들어갔다. “세심당 지으면서 눈 떴지. 잘 모르던 시절에 지어서 지금 보면 마음이 아파” 한다. 현공 스님은 절 살림을 놓은 후부터 트럭을 타고 목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자하루 누각은 맘먹고 지었지. 기둥은 육송으로 하고 싶은 거야. 그런데 육송이 목재소에 많이 있나.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여러 군데서 모았지.”

목재를 구입할 때 2,000~3,000만 원에 계약하면, 500만 원을 별도로 얹어 주기도 했다.

“20~30만 원만 줘도 되는데, 내 나름대로 패를 던진 거지. 대신 ‘서까래로 쓸 목재는 나무 밑동으로 주시오’라 했지.”

그렇게 해도 들어오는 나무 10개 중 하나는 쓰기 힘들었다. 스님은 스스로 ‘천성적으로 수치에 밝은 사람’이라 한다. 건축 물량을 뽑을 때, 웬만한 것은 머리로 계산된다. 또 하나, 수평 맞추는 일을 기막히게 본다. 

“목재나 석축은 수평을 잘 맞춰야 해. 나무 위를 깎아야 할 것을 밑의 것을 깎으면 수평이 맞겠어? 공사장에서는 그냥 넘어가려 하지. 그러면 뜯어내는 거야. 석축을 쌓을 때도 석공들은 크고 매끈한 돌만 사용하려 하지. 석축은 아랫단과 윗단을 엇갈리게 쌓아야 보기 좋은데, 그런 돌들로 쌓으면 보기에 좋지도 않고 오래 못 가.”

건축 과정에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속이 타들어 갈 때도 많다. 현공 스님은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것은 잘 견뎠다” 한다. 

미황사는 석축이 아름답다. 특히 일주문을 지나 절로 올라가는 길은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스님은 “석축은 석공의 타고난 눈썰미와 감각이 중요하다”고 한다.

“스님, 돌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여기는 흙만 파면 다 돌이여. 완전 돌밭이여.” 

부도암 바로 옆에 미황사 부도전이 있다.

 

현장 소장이자 노가다 잡부

2001년까지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현공 스님은 현장 잡부이기도 했다. 또 ‘건축주이자 건축사업자이자 감리’이기도 했단다. 관급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행정절차가 중요해지기 이전 시절이라 그랬을까?

“요즘은 나무를 모두 기계가 치목(治木, 나무를 다듬고 손질함)하잖아? 조립식 건축물이지. 그런데 건물이 올라가다 보면 현장에서 수치를 조절하기도 해야 하잖아? 치목을 여기서 했어. 설계에서 조금 어긋나도 넘어가던 시절이기도 했고. 그런데 설계도면이 신(神)이여? 한옥 방에서 하룻밤도 자보지 않은 설계사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어.”

당시 스님이 특히 관심 기울인 것은 인부들과의 관계였다. 마을 사람들이 많았기에 노임 주는 일이 중요했다. 일당을 그날그날 주고, 명절을 앞두고는 미리 주기도 했다. 행정기관에서 기성금이 언제 내려올지 모르니, 인연 있는 대불련 출신들 이름을 빌려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기도 했고, 불심 깊은 분에게 현금을 빌리기도 했다. 

“기와집이 올라가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좋았겠어. 모내기 철에 ‘일 좀 합시다’ 하면, 자기네 모판 만드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이리로 왔어. 그런 사람들은 못 배웠어도 성실했어.”

스님 스스로가 농경이 중요했던 시기에 자라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하고 이렇게 맞춰 나갔다. 

 

부도밭 청지기

“옛날에 ‘17세 도편수’가 있다고 하잖아? 열넷이나 열다섯에 집 짓는 데를 따라다니다 보면, 서너 채 배우고는 도편수 일을 한 거지. 내가 그런 셈이야.”

현공 스님은 스스로 ‘주먹구구식’으로 일했단다. 건축일도 미황사 들어와서 알아갔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스님은 꼭 현장을 지켰다 한다. 돌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전기 배선 하나하나를 마무리했다. 

스님은 출가하고 15년이 지나 미황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지금은 일손을 놓고 부도밭을 벗 삼아 있다. 

“젊었을 때는 커다란 기둥을 쓰고 싶었지. 지금은 아기자기한 게 좋아. 나이가 들어가니 소박한 게 좋아져.”

근래 들어 ‘옛날 집에 풀이 나지 않는 이유’를 알아가고 있다. 매일매일 빗자루질을 하니 싹 틔울 새가 없는 것이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견디셨어요?”

“집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진퇴양난이 많아. 수렁에 빠진 기분으로 날 새지. 건물 올라갈 때마다 마음이 오지게 힘들어.”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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