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가을비
_강연호
가을비 며칠째 질척거려서 방죽 너머
모여 핀 쑥부쟁이들도 제각기 젖는다
물결 위 무수한 파문이 제풀에 어지러우면
방울 맺혔다 터지는 자리마다
슬며시 끼어들던 부표 화들짝 정신차린다
다만 몇 번의 자맥질로도
바닥 알 수 없이 계절은 깊어
우산으로 얼굴 가리고 지나는 사람조차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 같다
귓불 시렵다며 전신주가 징징거리는 한나절
도랑이나 쳐야지 고샅길 나서면
머리 맞대고 장기 한 판 두던 처마끝 낙수
어정칠월 동동팔월 다 지났는데
무슨 물꼬 틀 일 있느냐며 혀를 찬다
(강연호 시집, ‘비단길’, 세계사 1994)
[감상]
올가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여름에도 비가 잦았었지요. 새벽하늘에 흰 구름이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예불 들어갔는데, 대웅전을 나서니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아침 먹으러 갈 때 다시 흰 구름이 보여 비가 그치나 싶었는데, 밥 먹고 나오니 또 빗방울이 떨어지더군요.
그렇게 가을이 질척거릴 때가 있습니다. 방죽 너머 쑥부쟁이들이 젖고, 개울가의 여뀌들이 눈물을 또르르 굴리는 날, 저수지에선 빗방울 세례를 맞으며 무수한 파문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암초를 살짝 덮은 부표들도 빗방울을 맞으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시간, 계절은 또 자맥질하며 올라오는 듯하다 깊어집니다.
바람이 불어서인가요? 우산으로 얼굴 가리고 지나는 사람이 시인에겐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처럼 느껴집니다. 어찌 만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는 때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깊은 인연이 될 수 있는 법이지요.
전신주가 징징거릴 때 농부는 도랑이나 쳐야지 고샅길을 나서는데, 처마 끝 낙수가 한마디 합니다.
“어정칠월 동동팔월 다 지났는데
무슨 물꼬 틀 일 있습니껴?”
가을비를 맞으며 우리 마음도 더욱 깊은 곳으로 움직입니다.
동명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