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긍정의 힘
_김명기
바닷가 작은 마을 깨진 담벼락 아래
아무렇게나 쌓인 돌무더기 속
갓 자란 상추 한 포기 보며 반성한다
상추만 한 혓바닥으로 틈만 나면
힘들어 죽겠다고 말한 것과
고개 숙이면 지는 것이라고
주눅들지 않기 위해 쏟아낸
일그러진 말들에 대해
순응을 거부하는 것이 돌무더기 같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상처입지 않기 위해 조합해낸
은유와 비유의 모든 문장들에 대해 반성한다
사는 것에 손사래를 치듯 척박이란 말을 앞세워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부정했나
옅은 바람에도 일렁이며 낮은 곳으로만
푸르게 펼쳐지는 생, 끝내 저렇게 살아내는
상추 같은 이들과 이제 막 상추 씨앗으로
세상에 뿌려지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과 글들
바람이 비벼댄 자리마다 손금처럼 번져가는
잎맥과 잎맥 사이 가늠할 수 없는 넓이를 들여다보며
척박이란 말을 새삼 배운다
낮은 곳에서 흔들리고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
굳건한 저 긍정의 힘
(김명기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전당 2009)
[감상]
우리 동물들은 가끔 식물들을 보며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위틈에 아주 조금 있는 흙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나 소나무는 그 척박한 곳에서도 평생 불평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비가 올 때마다 뿌리내릴 흙이 조금씩 없어지는 계곡에 뿌리를 내린 귀룽나무도 아무 불평 없이 5월이 되면 향기로운 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어떤 조건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식물들을 배우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식물들의 속성을 비판하는 데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식물국회’, ‘식물정당’ 등 정치를 비판할 때 쓰고, 병으로 몸이 마비된 사람을 ‘식물인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는 식물의 생명력을 바라보며 시인은 ‘긍정의 힘’을 발견합니다. 깨진 담벼락 아래 아무렇게나 쌓인 돌무더기 속에서 싹을 틔운 상추 한 포기를 보고, 시인은 반성합니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
이렇게 말했던 것을 참회합니다. 돌무더기에서 싹을 내민 상추는 척박한 땅에서도 미소 지으며 묵묵히 살고 있는데, “고개 숙이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남들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대거리했던 일, “주눅들지 않기 위해 쏟아낸” 험한 말들을 참회합니다.
한때는 순응을 거부하는 것이 돌무더기 같은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 생각했었지요.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억지로 강한 척하기도 했지요. 남들이 칭찬하는 것은, 괜히 심술을 부려 부러 깎아내렸고, 잘나가는 친구나 이웃을 질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조금만 더 가면 넓은 상추밭이 있는데도, 돌무더기에 뿌리내린 것을 한탄하지 않는 상추 한 포기를 보면서 시인은 반성합니다. 세상에는 “옅은 바람에도 일렁이며 낮은 곳으로만/ 푸르게 펼쳐지는 생”이 있습니다. “끝내 저렇게 살아내는/ 상추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제 막 상추 씨앗으로/ 세상에 뿌려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시인은 “바람이 비벼댄 자리마다 손금처럼 번져가는/ 잎맥과 잎맥 사이 가늠할 수 없는 넓이를 들여다보며/ 척박이란 말을 새삼” 배웁니다. “낮은 곳에서 흔들리고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 굳건한 저 긍정의 힘”을 배웁니다.
오늘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식물들을 눈여겨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참으로 많습니다. 그 식물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그걸 바라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도 건강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