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권대웅 ‘화무십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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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권대웅 ‘화무십일홍’
  • 동명 스님
  • 승인 2022.07.19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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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화무십일홍
_권대웅

마당 한구석. 윤기 나고 탄력 있는 피부로 자라던 옥잠화 넓은 잎사귀 속에서 쪽찐 머리에 꽂은 옥비녀 같은 꽃이 피었다. 어느 집 규수였을까. 옥잠화 몸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그윽하여 아침마다 모두머리 단장하고 있는 꽃방. 두근거리며 훔쳐보던 그녀의 흰 뒷목.
지난겨울 담장 아래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해바라기가 피어올라와 물끄러미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을 갈아 입다 깜짝 놀라 커튼을 쳤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볼이 두툼한 여자 같았다.
아침마다 나팔꽃이 목청껏 외치는 소리들.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꾀어내듯 휙휙 휘파람을 불며 허공으로 뻗어가던 넝쿨들, 낭창낭창하던 것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칠 년 만에 땅 속에서 나와 7일만 살면서 오직 사랑을 찾기 위해 울던 매미. 당신은 그토록 간절하던 당신을 만났는가.
등줄기에 후줄근하게 땀이 흘렀다. 나도 녹아가고 있었다. 여름의 눈사람처럼 있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백일홍을 심었는데 백일홍도 그만 져버리고 말았다.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2017)

[감상]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열매나 씨앗을 만들기 위해 최대한 아름다워진 꽃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시인은 마당의 꽃들이 그저 꽃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옥잠화는 어느 집 규수로 보입니다. 언젠가 두근거리며 훔쳐보던 규수의 흰 뒷목 같은 꽃 옥잠화! 지난겨울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피어난 해바라기는 어디선가 본 볼이 두툼한 여자 같습니다. 휙휙 휘파람을 불며 허공으로 뻗어가는 나팔꽃의 낭창낭창한 목소리는 누구의 음성이었더라?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알에서 깨어난 매미 애벌레는 땅속으로 사라져 짧으면 3년 길면 7년 동안이나 숨어지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실종신고하고 사망신고까지 했다간 나중에 유령 나타났다고 야단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견딘 후 땅 위에 올라와 성충이 되어서는 겨우 한 달을 산다고 합니다. 권대웅 시인이 그들의 수명을 더 짧게 7일로 줄여버렸습니다. 7일만 산다고 하니 더욱 간절해집니다. 매미들의 울음이 애처로웠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래 견디는 것은 없을까? 백일홍을 심었는데, 백일도 너무 짧습니다.

출근길, 마당에 죽은 매미, 아니 누군가의 여름이 마당에 떨어져 있습니다.

나도 저 매미처럼 누군가의 여름일지 모릅니다. 인간의 여름은 저 매미의 여름보다는 조금 길 뿐, 백일홍의 여름보다도 더 길 뿐, 그저 ‘한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화두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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