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김승희 ‘모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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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김승희 ‘모란의 시간’
  • 동명 스님
  • 승인 2022.05.1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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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순천 선암사 법당에 그려진 모란
순천 선암사 법당에 그려진 모란

모란의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세상 모두 숨 죽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멀리 모란의 숨결이 불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한밤중에 홀로
경련으로 몸이 출렁이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뭐 이런 시간
뭐 이런 절벽
뭐 이런 벼락
죽을 수도 있는 시간
죽어가는 어떤 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숨을 죽이고
꿈틀거리는 심장 홀로
모란만 남는 그런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지나가는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들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망할 놈의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김승희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2021)

[감상]
마당에 모란이 활짝 피었습니다. 금강정사에 모란이 제법 여러 그루가 있습니다. 모란이 모두 피었습니다. 모란의 모양은 모두 다릅니다. 색깔도 조금씩 다릅니다. 언제 피었는지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모란이 핀 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시간
어느 시간”

그 시간은 “세상 모두 숨 죽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멀리 모란의 숨결이 불어오는 시간”입니다. 그만큼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시간이고, 모든 것이 준비해준 시간이며, 그렇다고 모란이 핀 시간이 한순간인 것도 아니어서, 모란의 숨결이 먼 곳으로부터 불어와서 지금 이곳에서 핀 것입니다.

그 시간은 “한밤중에 홀로/ 경련으로 출렁이는 시간”입니다. 절벽같이 ‘가파른’ 시간이며, 벼락같이 ‘번쩍이는’ 시간이며, “죽을 수도 있는 시간”이며, “죽어가는 어떤 시간”입니다. 이를테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숨을 죽이고/ 꿈틀거리는 심장 홀로/ 모란만 남는 그런 시간”입니다.

모란이 피는 시간을 이렇게 날카롭게 표현하고 보니, 모란이 정말 어떤 섬광같이 날카로운 시간 속에서 피어난 것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모란은 활짝 피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모란이 이를 데 없이 화려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모란이 활짝 피고서도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지나가는 시간”처럼,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들어오는 시간”처럼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무슨 시간이 그런 시간이 있을까요? 무슨 시간이 그런 시간이 있을까요? 그렇게 피어서는 어느 날,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말입니다. 시인은 “망할 놈의/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모란이 뚝 떨어져 버리는 것이 허망하다는 표현이지요.

허망한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미련 없이 손을 놓는 모란을 찬양합니다. 오래 살려고 버티지 않고, 조금만 더 있고 싶어 버둥거리지 않고, “염라대왕님, 참으로 억울하옵니다” 호소하지 않고, 툭 집착을 내려놓는 모란의 마음! 그래서 저는 마음대로 마지막 부분을 고쳐 읽습니다.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모든 시간을 총체적으로 자르는
니르바나의 시간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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