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반가사유상’ 명칭을 둘러싼 논쟁
반가사유상이란 의자에 앉아 결가부좌를 한 상태에서 한쪽 발만 가부좌를 풀어 의자 아래로 내려뜨린 자세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보살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앉는 자세를 절반만 가부좌를 틀었다고 하여 ‘반가부좌’, 혹은 줄여서 ‘반가좌’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칭은 틀린 표현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의하면 결가부좌란 스님들이 참선할 때처럼 두 발이 모두 양쪽 무릎 위에 올라가도록 앉는 것이며, 이에 반해 반가부좌는 한쪽 발만 다른 쪽 다리 무릎 위에 올라가도록 하고 다른 발은 반대쪽 다리 아래에 들어가도록 가부좌를 튼 것을 말한다. 결가부좌보다 다소 편한 좌법이다. 그런데 여하간 반가상이라고 할 때의 앉는 자세는 가부좌를 튼 자세는 아니므로 반가좌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헌 기록이나 보살상에 새겨진 기록에도 ‘반가’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체로 사유상이라고만 되어 있다.
이러한 사유상 앞에는 대체로 ‘미륵’이라는 존명이 붙어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이렇게 앉아있는 보살상을 왜 미륵보살이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면 어디에서도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제강점기 즈음에 한국이나 일본의 학자들이 직관적으로 ‘이렇게 독특한 자세로 앉은 보살상은 미륵보살인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다른 보살과는 다른 성격의 보살이기 때문에 이렇게 특이한 형식이 등장했을 텐데, 우선 보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음보살은 비교적 명확하게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는 표시가 있다. 바로 보살이 착용한 보관에 화불, 즉 작은 부처님상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관무량수경』 같은 경전에서도 분명히 언급된 내용이다. 그런데 반가상은 그러한 관음보살로서의 표식이 없다. 따라서 관음보살 다음으로 불교에서 많은 상징성을 지닌 보살이 미륵보살이므로, 이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이 아닌가 추정하게 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미륵보살은 현재 도솔천에서 붓다로 이 세상에 하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리는 모습이 이처럼 사색에 잠긴 모습이라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없다.
거기에 더해 경주에서 발견된 반가상들은 화랑 출신의 김유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었는데, 바로 석조반가상이 출토된 송화산이나 반가상이 포함된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은 모두 김유신과 관련된 유적이었다. 그런데 화랑은 미륵보살 신앙을 그 상징으로 삼았기 때문에 반가상은 이와 같은 화랑도의 미륵보살 신앙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신진연구자들이 이러한 ‘반가사유상=미륵보살’ 공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느낌상으로는 그런지 모르지만, 인도나 중국에서는 그 어디서도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인 경우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의자에 발목을 교차한 자세로 앉아 설법하는 보살상이 미륵보살로서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 되었다. 반가사유상은 오히려 이러한 미륵보살을 좌우에서 협시하는 도상이었을 뿐, 미륵보살 자체는 아니던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박물관에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불리던 보살상 설명문에서 ‘미륵보살’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앞서 ‘반가좌’라는 명칭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으니 결국 ‘반가’까지 빠지고 나면 ‘사유보살상’만 남게 되는 셈이었다.
반가사유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반가사유상은 결국 어떤 존상을 표현한 것일까? ‘태자사유상’이라는 주장이 가장 대표적이다. 즉, 싯다르타가 정식으로 출가하기 전 태자 시절에 사유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는 산동성 출토의 한 반가사유석상에는 ‘태자유상’이라는 명문이 있어 태자사유, 즉 싯다르타 태자가 고민에 잠겨 잠부나무 아래에서 사유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는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따라서 아직도 연구자 중에는 이 장면을 태자의 사유장면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반가사유상이 어떤 보살을 모델로 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 생각이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도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태자사유상이라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생각으로 가득한 모습일 것이며, 미륵보살이라면 세상에 나아가 어떻게 깨달음을 설법하고 중생을 구제할 것인가 계획을 고민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사유상인지, 미륵보살사유상인지 따져보는 것이 그다지 무의미한 고민은 아닐 것이다.
우선 몇 가지 점에서 새롭게 생각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싯다르타 태자가 처음 인생에 대해 고민한 점은 생애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후의 다른 일대기를 묘사하는 것보다 특별히 더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실제로 중국에서 태자사유상으로 추정되는 작품 중에는 대작이나 큰 비중을 가지고 조성된 것 같은 상은 보이지 않으며, 여러 이야기 중의 일부로서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 분명하게 발목을 교차하고 앉은 미륵보살상의 양옆에 협시로 등장하는 반가사유상은 태자사유상일 수는 없기에 반가상이 꼭 태자사유상의 의미만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반가사유상이 특별한 의미로 조성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국보 78호 일월식보관 반가사유상이나 국보 83호 삼산보관 반가사유상은 금동상으로서는 매우 큰 편에 속한다. 태자의 첫 고민 장면을 이처럼 큰 비중으로 다룰 필요까지 있었을까에 대해 다소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인도에서 반가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꼭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어떤 규칙이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종교적 도상도 흔하게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무엇보다 중국의 도상을 들어 반가상이 미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반가상은 발목을 교차하여 앉은 모습으로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다양한 도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발목을 교차하고 앉은 보살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불교 조각사에서 이러한 도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보살은 조성된 적이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분명히 미륵보살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발목을 교차한 보살상이 없다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보살이 다른 형태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뜻한다. 그런 와중에 반가상은 중국에서 대체로 미륵보살을 옆에서 협시하는 보살이었으니 뭔가 미륵보살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실제로 한국에서 반가상들이 등장하는 경우를 보면 미륵보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리 잡은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경주 단석산의 신선사 마애불상군이다. 이 마애불을 보면 일렬로 늘어선 불·보살상 그룹을 볼 수 있는데, 왼쪽에서 차례로 불입상-보살입상-불입상-반가사유상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왼쪽에서부터 존상들이 각자의 오른쪽에 있는 존상으로 안내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 가장 끝에 반가사유상이 위치한다. 이 보살상은 어떤 존재이길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아있을까? 이분이야말로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수기를 받아 이 세상에 등장했던 과거의 붓다들과 함께 결국 미래 시점에 등장하게 될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도상이다. 마침 이 상들이 조각된 절벽 바로 옆에는 거대한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미륵불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렇게 불-보살-불-보살의 단계를 거쳐 수기에서 수기로 이어진 붓다의 계보가 결국 미륵보살이 미륵불이 되어 세상에 하강하는 이야기를 단계적으로 풀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중국에서 미륵보살은 발목을 교차하고 앉은 모습이었고, 또한 반가상은 태자사유의 명문이 있는 경우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반드시 같은 상황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에서는 반가상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지닌 존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중국에서와 같은 미륵보살이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는 독자적으로 미륵보살을 표현하는 방식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에서처럼 붓다로부터 수기를 받고 기다리는 위치에 있는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일 가능성이 매우 큰 셈이다.
태자와 미륵의 경계를 넘어
그렇다면 종교 도상이 중국에서는 태자였다가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이었다가 이렇게 마음대로 바뀌어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싯다르타 태자인가, 미륵보살인가 하는 존명(尊名)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각을 조금 넓혀보기로 한다. 즉, 태자의 사유장면은 행복에 겨워하던 싯다르타가 인생의 번뇌를 알게 되면서 삶의 양상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던 순간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삶에서 붓다의 삶으로 나아가는 중간과정을 의미한다. 미륵보살도 그런 시점에서 보자면, 수기를 받은 보살이 도솔천에 올라 미륵불이 되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다. 도솔천은 이처럼 보살과 붓다의 중간과정에 있는 분들[이를 한 번의 윤회만 남겨두었다고 하여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이라고 한다]이 머무는 곳이다. 이 역시 어떤 중간과정을 뜻한다.
어쩌면 반가좌라는 자세, 즉 결가부좌한 것도 아니고, 의자에 앉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는 이러한 중간과정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도상은 태자사유의 도상에도, 그리고 도솔천에서 대기하는 미륵보살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도상인 셈이다. 제멋대로가 아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규칙은 이처럼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반가사유상은 붓다가 싯다르타로 태어나기 전 도솔천에 머물 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문제는 없다. 원래 인도에서도 싯다르타의 도솔천 장면과 미륵보살의 도솔천 장면은 도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반가사유상을 보면서 단순히 태자인가 미륵보살인가를 추궁하기보다는 이러한 경계에 있는 존상들 앞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게 무엇인가 고민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불상이란 원래부터 우리가 참선하고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옛사람들은 반가상을 보면서 사후에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랐다. 지금은 대부분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꿈꾸지만, 과거에는 도솔천도 중요한 왕생지 중의 한 곳이었다. 이렇게 도솔천을 꿈꾼 사람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다음 생에는 꼭 붓다가 있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었으리라. 극락정토에 태어나면 언제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오는지 시간을 정확히 맞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솔천에 태어나면 언제 미륵보살이 지상에 내려올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 함께 윤회하면 붓다의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
우리는 윤회하는 동안에 무엇을 갈구해야 할까. 만약 다음 생에 붓다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아프리카나 혹은 아마존에 태어난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저 붓다의 말씀을 계속 들을 수 있는 곳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나아가 아예 붓다가 정말 세상에 출현했을 때 환생해 그 설법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자로서 가장 소망하는 바가 아닐까.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지 그렇게 무언의 설법을 하고 있다.
주수완
불교미술사학자이자 우석대 조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인도와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미술 도상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불꽃 튀는 미술사』 등이 있으며, 법보신문에 ‘불교를 사랑한 예술가들’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