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로 성호 이익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의 책 『성호사설』(제5권)에 ‘용화(龍華)’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그 글에 나오는 용화는 불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경에서는 미륵이 천상의 도솔천에 머물면서 중생에게 설법하고 있다. 장차 먼 미래에는 미륵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세 차례 설법을 베풀 것이고, 그러면 억만 대중이 윤회의 사슬에서 풀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익이 쓴 글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민중의 판타지가 ‘용화’에 담겨 있다.
이야기를 간추려본다. 실학자 이익은 경기도 안산의 들판에 살고 있어 샘을 파지 못했다. 그곳 사람들은 장마철 빗물을 웅덩이에 가두고 ‘용화(龍華)’라고 불렀다. 그 웅덩이에는 기러기와 거위 등이 모여 놀았다. 새 똥과 오줌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그 물로 밥도 짓고 술도 빚었다. 때 묻은 옷을 세탁했다. 맛도 그만이요, 수종다리 병 따위의 풍토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안산의 용화는 민중의 생명수였던 것이다. 미륵은 풍토병에서 몸과 마음을 구제하는 민중의 은인이었다. 이익 자신의 글에 그렇게 쓰지는 않았으나, 행간의 뜻으로 보면 더 명백하지 않은가.
이 짤막한 글에서 미륵신앙의 역사를 쓰려고 한다. 아마 조금 색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민중의 마음은 시대의 물결에 따라 미륵신앙을 안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았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노라면 민중이 남몰래 쓴 거룩한 판타지가 보인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항상 한 가지 생각을 붙들고 있었다. 미륵신앙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다. 시대마다 민중의 미륵신앙은 색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그 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면에는 제약이 있기 마련이라, 주석도 붙이지 못하고 그저 몇 가지 이야기를 꺼내는 정도에 그쳤다. 어진 독자의 혜량을 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우선 말해둘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미륵의 인기가 항상 높았다는 점이다. 현재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미륵상은 400기쯤이란다. 그밖에도 자연석에 조금만 인공이 가해져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미륵이라고 부른다. 미륵은 마을 앞에도 있고, 논밭이나 호젓한 산기슭에도 있다. 민중의 사랑을 받아온 존재라는 점을 구구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섬이든 육지든, 산간이든 평야든, 아니면 해변 마을이든 미륵신앙은 어디나 현재진행형이다.
고대부터 민중을 먹여 살렸다
미륵신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늦어도 6세기부터는 이 땅에서 미륵신앙이 존재하였다. 571년(고구려 평원왕 13년)에 조성된 삼존상[辛卯銘 三尊像]이 좋은 본보기이다. 이 불상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태어나 미륵불을 친히 만나시기를 희망한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불경에 기록된 고전적인 미륵신앙이 아닌가.
그런데 그 시절에도 미륵불은 민중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574년(진흥왕 35년) 신라의 경주 황룡사에 미륵불(‘장육상’)을 봉안하였다. 그 이듬해 봄과 여름에 가뭄이 심해지자 미륵불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적셨다. 미륵불은 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았을까. 민중의 고난을 유독 슬퍼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민중은 이미 미륵불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믿었다는 이야기다.
미륵불은 민중의 가슴속에서 농업의 수호신으로 바뀌었다. 760년(경덕왕 10년) 4월, 경주 하늘에 열흘 동안이나 두 개의 해가 떴다. 마침내 월명사(月明師) 스님이 ‘도솔가’를 지어 부르고 꽃을 뿌리자 문제가 해결되었단다. 스님의 노랫말에, “너희는 참 마음이 시키는 그대로 미륵님을 모시어라”라는 구절이 보인다. 알다시피 해(태양)는 농사에 가장 중요하다. 만약에 하늘의 해가 괴이한 모습을 보이면 농사도 파탄 나고 세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미륵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판타지였다.
이 땅에 미륵하생신앙의 전성기를 가져온 이는 진표 스님(8세기)이었다. 스님과 관련된 미륵불 이야기 하나가 흥미롭다. 그때 강원도 강릉(명주)에 흉년이 들어 민중이 굶어 죽게 되었다. 진표 스님은 미륵불에게 기도하고 법회를 크게 열었다. 그러자 바닷가에 수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민중은 그 물고기를 팔아서 식량을 마련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도 미륵불은 민중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존재였다. 농사에 알맞은 날씨를 선사하는 영험한 힘도 자주 보여주었다고 전한다. 1835년(헌종 원년) 강원도 삼척 군수는 봉황산 아래 미륵불을 모셔서 요사한 기운을 막아냈다. 수년 뒤 무지한 군인들이 미륵불을 강물에 떠밀어버렸다. 그러자 가뭄이 계속되었고, 이를 안 마을 사람들이 미륵을 제자리에 다시 모셨다. 즉시 비가 풍족하게 내려 그해 농사가 잘되었다. 미륵불은 곧 민중의 밥이었다.
조선 시대부터 온갖 소원도 성취!
조선 시대에는 또 하나의 판타지가 새롭게 작성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미륵은 민중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영험한 존재가 되었다. 이런 신앙은 최근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보자.
민중의 눈에는 사방 어디에나 미륵불이 보였다. 하필 손끝이 야문 장인(匠人)이 조형한 불상만이 미륵불은 아니었다. 땅도 바다도 강물에서 올라온 돌멩이도 미륵으로 섬기는 것이 민중이었다. 어느 날인가 우연히 지면과 수면 아래서 솟아오른 돌멩이는 전부 ‘미륵님’이었다. 미륵님은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갖췄다. 아무리 기다려도 태어나지 않는 아들도 마음대로 점지해 주었다. 잃어버린 물건도 되찾게 하고, 환자의 고통도 곧 해결해주었다. 민중의 갖가지 소원을 모두 이뤄주는 영험한 힘을 가진 존재, 이것이 ‘미륵님’이라는 믿음이 전국 어디에나 널리 퍼졌다.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토사리의 미륵도 그러했다. 수십 년 전 어느 날인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른 돌멩이 하나가 있었다. 집주인 김 씨는 이 돌멩이를 미륵님이라 믿고 정성껏 섬겼다. 덕분에 그 가정에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고 자손도 번성하고 모두 잘살게 되었다. 하필 김 씨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 미륵은 효험이 대단하다고 널리 소문이 났기에 아들 낳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나 먼 여행길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이웃이 찾아와서 기도한다.
미륵은 왜 땅이든 물이든 아래에서 솟구치는가. 미래의 부처라서 그런가 보다. 이미 고려 때부터 민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높이 18m로 우리나라 최대의 미륵불인 충청남도 은진 관촉사의 미륵 보살상(사실은 관음상)도 땅속에서 올라온 바윗돌을 다듬어 만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 시대 서울의 모시 장수 한 사람이 여기 와서 치성을 드린 다음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
남쪽 끝 제주에서는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우연히 그물에 돌멩이가 걷히면 ‘미륵님’이라고 부르며 섬긴다. 제주 북쪽 화북리에서는 그런 미륵이 신앙심 좋은 윤동지를 부자로 만들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마을 청년들이 이 미륵상을 훼손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온통 피부병에 걸렸다. 미륵에게 사죄하고 다시 정성을 다해 모셨더니 이내 피부병이 말끔히 사라졌단다. 그 뒤로 이 미륵은 피부병에 영험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미륵이 민간신앙의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후기가 되면 미륵을 남녀의 성별로 나누기도 하였고, 성별에 따라 기능이 다르다고 믿기도 하였다. 경기도 안성의 아양동이 그러했다. 그곳에는 할머니 미륵도 있고 할아버지 미륵도 있어 마을 사람들의 신앙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어느 연구자가 조사한 결과, 마을 주민들은 두 미륵이 도와줘서 한국전쟁(6·25 전쟁) 때도 마을에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아이들이 순산하는 일이며, 해마다 풍년이 거듭되는 것도 모두 미륵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 모두의 길흉화복이 미륵에게 달려 있다는 믿음은 대단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전국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전라남도 목포 발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발산마을에서는 정월마다 제관을 뽑아서 할아버지 미륵과 할머니 미륵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러고 나서 마을의 남성과 여성이 편을 갈라 줄다리기 시합을 한다. 여성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해서 늘 남성들이 져준다.
전남 영광읍 연동에도 할아버지 미륵과 할머니 미륵이 있는데, 마을 공동체가 제사를 주관한다. 두 미륵의 기능은 조금 다르다. 할머니 미륵은 질병을 낫게 하는 효험이 있고, 할아버지 미륵은 재물을 불리거나 도둑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예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는 ‘미륵님’
민중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보는 것이 미륵의 역할이다. 그들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 보면, 미륵불은 전쟁에 이기게 하여 민중도 지키고 나라도 지켜주었다. 충남 아산시 둔포면 봉재리의 미륵은 나라가 곤경에 빠질 때면 눈물을 흘려, 위기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또, 앞에서 언급한 관촉사 미륵은 외적이 침입했을 때 적과 싸우느라 땀을 흘렸다고 한다.
미륵불이 호국 신앙의 핵심이라는 믿음은 오래되었다. 6세기 후반 신라 진지왕(576~579) 때부터도 그런 신앙이 있었다. 흥륜사의 진자(眞慈, 貞慈라고도 함) 스님에 관한 설화가 떠오른다. 흥륜사의 주존(主尊)인 미륵불 앞에 나아가서 스님은 기도하였다. “원컨대 우리 부처님이 화랑으로 오신다면 제가 항상 모든 뒷바라지를 맡겠습니다.”
과연 진자 스님은 미륵불의 화신인 미시(未尸)를 만나게 되었다. 미시는 국선(國仙)이 되었다가 7년 뒤에 갑자기 사라졌다. 미륵불이 화랑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니, 미륵불이 호국의 부처라는 믿음이 굳셌다고 해야겠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명장 김유신, 그에 관한 전설도 미륵신앙의 맥락에서 주목할 만 하다. 그는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따르는 화랑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했다. 미륵이 승리를 가져다주고 마침내는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한다는 믿음이 없었더라면, 하필 ‘용화’를 언급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고려 때도 미륵불은 호국 신앙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1109년(예종 4년) 4월, 국왕이 개경의 미륵사를 찾아가 불사에 참여했다. 왕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이기기를 빌었다. 이처럼 미륵불은 전란에서 나라와 민중을 지켜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왕실과 귀족은 성대한 의례를 베풀며 미륵불을 섬겼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성리학이 국시(國是)로 정해졌고, 미륵불은 민간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미륵불과 함께 새 세상을 열다
미륵신앙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될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든 중국이든 마찬가지였다. 기록을 보면 중국 수나라 때 송자현(宋子賢)이란 사람이 미륵불을 자처했다. 그런 전통은 맥맥이 이어져 명나라와 청나라 때도 미륵불과 백련사(白蓮社), 명존교(明尊敎), 백운종(白雲宗) 등의 모임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지배층은 그들에게 백성을 선동하고 현혹한다는 죄목을 씌워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명나라의 법률인 『대명률』에도 그런 법규가 명시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도 잊을만하면 다시 여기저기서 미륵불의 화신을 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앞에서 인용한 『성호사설』(제17권)에도 ‘미륵불(彌勒佛)’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황해도에서 한 여성(촌부)이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그 세력이 갑자기 커져 관청에서도 함부로 대처하지 못할 정도였단다. 그 여성은 추종자를 동원하여 무속을 섬기는 장소, 신사(神祠)를 모두 파괴했다. 나중에 조정에서 그를 처형하였으나, 산골짜기에는 아직도 그 무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는 자칭 미륵불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많은 편이다. 주목할 점은, 이런 사건이 당시에 유행한 『정감록』 등의 정치적 예언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무척 혼란스러웠고, 민중은 전폭적인 변화를 꿈꾸었다. 결과적으로 예언과 미륵신앙을 토대로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움직임이 거듭해서 일어났다.
꼭 부정적으로만 여길 일은 아니었다. 그런 흐름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19세기부터는 동학과 증산교 등 신종교가 우후죽순으로 나타났다. 필자는 그 점에 관하여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했다(예컨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등).
이상에서 보았듯, 미륵불은 평화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풍농과 풍어, 사업의 성공, 질병의 치료, 아들의 점지가 미륵님 덕택이었다.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민중을 지켜주는 것도 미륵님이었다. 이 땅에서는 미륵신앙이라는 신심을 통하여 지상 낙원을 이루려는 소망이 실로 깊었다. 그것이 때로는 기성체제를 뒤엎으려는 시도를 낳기도 했다. 민중의 미륵신앙은 11면 관음상처럼 다면적이었다고 할까.
백승종
통사와 미시사를 넘나드는 입체적 접근으로 다양한 주제의 역사를 쓴 학자. 독일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 보훔대와 베를린자유대에서 한국학과장, 서강대 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의 전통사상을 재해석해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선비와 함께 춤을』 등 20여 종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