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뚫는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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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뚫는 벌
  • 관리자
  • 승인 2007.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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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心詩心
 

  사람살이란 바른 길을 찾아가는 걸음걸이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찾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다. 눈에 보이는 길이 수천수만의 가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은 더구나 그 갈래가 헤아릴 수 없이 더 많다. 진실한 길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이 마음의 드나듦에서 그 길을 오히려 놓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양을 잃었다. 그래서 이웃사람까지 청해서 찾아보도록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가닥 길이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살림살이가 이 많을 길 때문에 원래의 삶의 진실을 잊는다는 경계로 비유된 말이다. 이렇듯 눈에 보이는 길도 그 가닥이 많아서 갈피를 못 잡는 것인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길이야 어떠하랴.

  그렇다면 차라리 없다고 해 놓고서 이 없는 중에서 하나만 찾아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래서 찾아지는 그 순간을 개달음이라 하고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의 본바탕을 찾은 바른 길이라 하면 어떨까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허상에 집착되어 이 실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허상, 실상이 따로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허상, 실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서로 같은 자리에 있건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고령탁(古靈卓)선사가 경을 강하고 있는데 벌이 방으로 날아들었다가 나가려고 창문에 붙어 애쓰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열린 문으로 나가려 않고

  창문을 뚫으려는 저 큰 어리석음

  백년동안 이 묵은 종이를 뚫은 들

  언제 나갈 날 있으랴

  空門不肯出 投窓世大癡

  百年鑽故紙 何日出頭時


  제가 날아들어 올 때에 열린 창틈이 바로 옆에 있지만 빛이 드는 창문의 밝음에만 집착되어 뚫으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리석음, 이것이 벌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깨우침이 없는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선가(禪家)에서 문자를 여의자는 것도 이 창문의 종이로 비유되는 묵은 종이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문이 있어도 나갈 수 있는 문은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청매인오(靑梅印悟) 선사는 위의 고령탁선사의 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송고시(頌古時)를 썼다.


 바람부는 수면엔 주름살이 일고

  새 지난 백사장엔 글자 쓰이나

  머리 한 번 돌려 자물쇠 부수면

  부질없이 신선 꿈 버리고 산을 내리네

  風來水面皺初發 鳥去沙腮篆字生

  好是回頭扄破後 空携爛柯下山行


  바람불어 물결이 일지만 물의 본성은 항시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이는 주름살이란 물의 수평적 속성을 잠시 상했을 분, 바람이 자면 다시 평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배교사장에 써놓은 새발 글씨는 바람이 불면 다시 백사장의 원 모습으로 환원한다. 이러한 현실에 국집됨이 없이 속박을 여의면 자성본체는 항시 여여한 것이다.

  저 벌이 창문의 햇빛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빠져나갈 길을 찾았을 것이고,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신선 찾기보다 산 아래의 현실에서 신선을 찾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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