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내 이름은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붓다의 제자요, 싯다르타 태자의 어머니입니다.
사람들은 싯다르타의 어머니라면 늘 마하마야를 떠올립니다. 맞습니다. 마하마야 왕비가 싯다르타를 낳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동생이고, 언니와 나는 함께 숫도다나왕의 신부가 됐지요. 내 언니 마하마야가 제일 왕비였고, 나는 그 곁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언니 마하마야는 왕비로서 품격 있고 우아했으며 행동거지가 반듯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언니의 모습에 반해서 숫도다나왕이 청혼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니와 숫도다나왕 사이에는 오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지요. 마침내 출산 시기가 임박해지자 언니는 우리의 고향 꼴리야 성으로 돌아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날 숲의 나무들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고 향긋한 꽃내음이 은은하게 진동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언니는 출산한 지 이레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숫도다나왕은 아들을 얻은 기쁨을 만끽할 사이도 없이 사별의 슬픔에 잠기고 말았지요. 왕은 서둘러 내게 싯다르타의 어머니가 되어 왕자를 보살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사실 나 역시 막 아들 난다를 낳은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아들 난다는 유모에게 맡기고 나는 오로지 싯다르타의 양육에 전념했습니다. 그 심성 곧고 아름다운 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그토록 기다리던 자식에게 어떻게 사랑을 담뿍 담아 키웠을지를 상상하면서 나는 싯다르타를 키웠습니다. 싯다르타 왕자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그 누구도 아닌, 이모이자 계모인 나 마하빠자빠띠의 무릎이었지요.(『대불전경』)
싯다르타는 참으로 반듯하고 아름다운 소년이었습니다. 영특했고 다정한 성격이어서 궁중의 누구라도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싯다르타가 혼자 조용히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는 한없이 다정다감했지만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는 고독 속에 머물러 있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숫도다나왕은 왕자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지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강자의 쾌락을 한껏 안겨주려 했습니다.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싯다르타는 부왕이 제공하고 허용하는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했습니다. 심지어 결혼 즈음해서 성인이 되어 여러 궁전에 궁녀들과 머물며 쾌락에 잠기도록 부왕이 유도할 때조차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자꾸만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습니다.
‘아, 저런 삶은 내 아들 싯다르타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
싯다르타는 궁중에서 누리는 온갖 쾌락에 젖어 있을 때조차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거나 다른 것을 깊이 생각하는 듯 보였습니다. 자신의 길은 권력과 명예의 왕자(王者)가 아니라 궁이 아닌 숲에서 머무는 구도자임을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고 있는 것만 같았지요.
어느 날 나는 기이한 꿈을 꾸었습니다. 흰 소 한 마리가 성안에서 큰 소리로 울면서 걸어가고 있었지요. 울음소리는 컸지만 길을 걷는 품새는 조용하고도 기품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 흰 소가 길을 걸어가는데 사람들 그 누구도 앞을 가로막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 위엄에 눌려 조용히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기이한 꿈이라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지요. 그날 숫도다나왕과 야소다라 왕자비도 기이한 꿈을 꿨고 묘한 불안감에 떨었습니다.(『불본행집경』)
이 기이한 꿈을 꾸고 오래지 않아 싯다르타는 한밤중에 성을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조바심을 내며 그를 궁중에 주저앉히려 애를 썼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숫도다나왕과 야소다라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나 역시 망연자실했지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구나. 그는 그 길을 가야만 해. 나도 어쩌면 아들 싯다르타의 뒤를 이어 그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습니다. 곧이어 왕자를 수소문해서 그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등의 소식이 속속 궁중에 전해졌고, 그때마다 내 마음은 조용히 물결쳤습니다.
붓다를 뒤따르며
내 아들 싯다르타, 태어나 이레 만에 친어머니를 잃고서 내 손에서 내 품에서 내 무릎 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 자라 성인이 되어서는 자신의 길을 찾아 성을 떠났고 6년이 지나자 그는 붓다라는 정신적인 스승이 됐습니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왕의 간청으로 내 아들 싯다르타, 아니 붓다는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궁으로 들어서는 붓다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전율했습니다. 내가 있을 자리는 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왕궁이 아니라 맨발로 마을을 돌며 하루 한 끼 탁발을 하면서도 모든 감각기관을 조용히 다스리되 자애로움이 온몸에서 고요히 뿜어져 나오는 저 붓다의 뒤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옛’ 어머니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붓다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그 마음에 얼마나 깊은 구도의 열망을 품었는지, 얼마나 간절하게 해탈과 자유를 꿈꿨는지, 그리고 길 잃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면서 그들에게 행복을 안겨주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붓다의 귀향으로 석가족의 왕자들과 귀족 청년들, 그 밖의 수많은 젊은이가 그의 제자가 됐습니다. 구도자는 고향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붓다와 그 제자들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달려갔습니다.
“붓다시여, 나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나도 수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붓다께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법문을 들으니 마음이 벅차올라 궁중의 삶이 조금도 즐겁지 않습니다. 나도 길 위의 구도자, 숲속의 수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조용한 거부에 나는 말문이 막혔고 궁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자리는 붓다의 뒤가 아닌, 숫도다나왕의 옆이었나 봅니다. 그 후로 이제나저제나 붓다의 뒤를 따라 수행자가 될 기회만을 노렸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숫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붓다는 부왕의 임종에 즈음하여 다시 고향을 찾았지요. 성대한 장례식이 끝나고 나자 붓다는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차렸고 나는 많은 여성을 거느리고 다시 한번 붓다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조용하고도 단호한 거부와 맞닥뜨렸지요. 나를 따라 함께 출가 의사를 밝힌 석가족 여인들은 망연자실했습니다. 붓다와 그의 수많은 제자가 천천히 몸을 돌려 까삘라 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다시 왕궁에 눌러앉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숫도다나왕의 죽음을 곁에서 보니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쾌락은 그저 물거품이었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머리칼을 잘랐습니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품을 다 떼어냈습니다. 가장 허름한 옷을 입고 맨발로 붓다의 뒤를 따랐습니다. 내 모습을 보고 석가족 여인들도 모두 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거칠고 낡은 옷을 입고서 나섰습니다.
궁중에서의 그 안락하고 호화롭던 시간은 이제 등 뒤로 남겨졌고, 비단 신발 속에 감춰져 있던 나의 발은 돌부리에 걸리고 흙먼지에 뒤덮이고 생채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여인이 비틀거리며 서로 부축하면서 붓다의 뒤를 따랐습니다. 누군가가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며 붓다를 따라갔습니다.
여전히 붓다는 여인들의 출가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간절한 바람을 품고 뒤를 따랐건만 붓다의 거부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여인이 나를 보고서 내 뒤를 따라왔는데 나는 붓다의 거부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아난다, 그는 석가족 왕자였고 먼지투성이로 맨발인 채 뒤를 따르던 석가족 여인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마침내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을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수행해 아라한이 되는 데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붓다에게 확인받고 우리 대신 허락을 받아낸 것입니다. 물론 남성 출가자에게 깍듯이 예를 갖춰야 한다는 여덟 가지 조건이 있었지만 출가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여성 출가자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비구니 승가는 붓다의 옛 어머니, 바로 나 마하빠자빠띠의 간청과 아난다 존자의 설득으로 어엿한 승가 공동체로 인정받게 됐지요.
비구니 가운데 가장 웃어른
이제 내 이야기를 접을 때가 됐습니다.
붓다의 허락을 받고 비구니가 된 지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비구니 승가의 수장으로서 여성들의 출가와 수행을 격려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지요. 여성으로서 출가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나 마하빠자빠띠를 찾아와서 허락을 구했고, 나는 이 일을 비구 승가와 부처님에게 고하며 허락을 청했습니다.
비구니 승가를 관리하면서 나의 수행에도 매진했습니다. 나는 사람들, 특히 여성 출가자들의 모범이 돼야 했습니다. 자칫 나에게서 ‘내가 저 붓다를 어떻게 길렀는데…’ 하는 생각이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면 그건 내 자신에게는 물론이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도 커다란 흠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저분은 나의 스승이요, 나는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는 구도자의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관계입니다. 마하마야 왕비께서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고따마 싯다르타를 낳으셨고, 그분은 병듦과 죽음에 시달리는 자들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존재가 되셨습니다.(『테리가타』) 나는 붓다의 제자가 되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고통과 불안을 없앨 수 있었고, 마침내 아라한이 됐습니다. 붓다는 나를 가리켜 ‘세월을 아는 님 가운데 으뜸인 자’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비구니 승가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사람이란 뜻이요, 비구니들 가운데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어느 사이 내 나이 120세가 됐습니다. 마음속 번뇌는 깨끗이 사라진 지 오래고, 나는 수행자로서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왔지요. 이렇게 수명이 허락하는 선에서 살아오다가 문득 더 이상 수명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됐습니다.
자, 이제 몸을 일으켜 붓다에게 나아가야겠습니다. 스승보다 앞서 삶을 마쳐야 하니 작별 인사를 올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늙은 몸을 이끌고 붓다에게 나아가는 내 뒤를, 나만큼이나 나이 먹은 비구니 아라한들이 조용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번 생에 당신의 제자가 되어 행복했노라고, 이제 이승의 연을 다하고 번뇌 없는 고요한 열반의 경지로 나아가겠노라 고하려 합니다. 내가 전생에 얼마나 큰 복을 지었기에 부처님, 당신의 어린 시절을 책임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내 인생 후반에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 온전히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요.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의 제자요, 당신은 나의 스승입니다.
이미령
불교 강사이자 경전 이야기꾼. 경전 강의를 진행하면서 불교 칼럼을 꾸준히 써오고 있다. 동국역경원에서 『대당서역기』, 『직지』 등 다수의 번역서를 냈다. 저서로는 『시시한 인생은 없다』, 『붓다 한 말씀』, 『이미령의 명작 산책』, 『숲속 성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