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 그 찰나의 미소에서 영원성을 발견한 조각가가 있다. 삼국시대 예경의 대상에서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추앙받는 반가사유상. 이를 독창적인 현대조각으로 재탄생시킨 원로 조각가 최종태를 서울 연남동 자택 겸 작업실에서 만났다.
가톨릭 신자의 ‘관음상’
최종태 작가는 1932년생으로 1958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일평생 조각가의 길을 걸어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절두산성지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명동성당 ‘예수 성심상’,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모상’ 등 수많은 가톨릭 성상을 만들어 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교황청에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한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부조’와 ‘성모마리아상’을 만든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불교계에서 회자된 때는 법정 스님과의 인연으로 2000년 길상사 ‘관음보살상’을 제작하고부터다. 소녀상, 어머니상, 성모상 등 여성형 인물상을 주로 만들어 온 그가 꼭 한번 다루고 싶었던 조각은 대자대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이었다. 가까이 지내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관음상을 만들면 천주교에서 나를 파문할 건가요?”라고 물었고, 추기경은 아니라는 대답과 함께 법정 스님에게 그를 소개했다.
“오전에 법정 스님과 이곳에서 만나 ‘합시다’라고 얘기가 됐어요. 스님이 가신 뒤에 흙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3시간 만에 다 완성했어요. 평소 머릿속에 있었던 거지요. 길상사로 전화했는데, 법정 스님이 직접 받으신 거예요. ‘다 만들었는데요’ 했지. 그 양반이 나랑 동갑인데, 또 성질이 급하시더라고. 당장 보러 오겠다는 거예요. 지금은 정리할 게 있어서 며칠 후에 오시라고 해서, 이틀인가 후에 왔어요. 보시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셔. 하지만 스님의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어요.”
길상사 관음상 점안식 날, 법정 스님을 비롯해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웅모 신부, 류시화 시인 등 각계 인사들이 모인 곳에서 최종태 작가는 소감을 말했다. “땅에는 네 것 내 것이 있다. 하지만 저 위 하늘로 올라가면 없다. 불교, 천주교, 무슨 종교 따질 일이 아니다. 관음상 봉안을 계기로 종교 간 화합이 이뤄지길 바란다.”
최종태 작가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이러한 발언에 쉽게 수긍이 간다. 최 작가는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장욱진 화가와 김종영 조각가의 제자다. 장욱진 화백은 독실한 불자, 김종영 조각가는 뿌리 깊은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 스승 아래서 수학한 최종태 작가는 정작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가톨릭 영세(領洗)를 받았다. 그 배경이 재밌다.
“1957년 대학교 4학년 때 버스 창밖으로 ‘불교사상대강좌’라는 포스터를 봤어요. 그게 머리에 딱 꽂혔어요. 그래서 조계사로 갔죠.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황산덕(제24·25대 법무부 장관), 소설가 유진오 등 당시 한국의 거물들은 다 온 것 같아요. 법회가 끝나고 나 같은 초년병들을 위해 대각사에서 불경 강의를 한다고 안내하더라고. 거기서 반야심경, 금강경 강의를 들었는데 방학이 돼서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가야 했어요. 고향에서 불교 강의 하는 데를 찾으려니까 없어. 가 봐도 할머니들만 앉아 있고. 고민하는데, 한 친구가 나를 천주교 성당으로 데려간 거예요.(웃음)”
이후에도 최 작가는 불교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졸업 논문으로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바탕으로 한 예술론’을 썼고, 가톨릭 신자였지만 서울대 최초 불교동아리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반가사유상에 담긴 진선미(眞善美)
최종태 조각가는 말한다. 그의 모든 작품이 “반가사유상에서 출발했노라”고. 구순이 넘은 그가 작품 활동을 하며 걸어온 70여 년의 세월 모두 ‘나의 반가사유상’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자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가’가 가장 큰 숙제로 다가왔다. 그때 불현듯 대학생 때 박물관 진열장에서 따로따로 봤던 반가사유상이 떠올랐다.
“반가사유상이 갖고 있는 정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 그게 머리에 찍혀 있었어요. 비너스상은 세계 미술사에서 몇째 가는 아름다운 작품인데 거기에는 반가사유상이나 석굴암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것이 없어요. 친구들은 추상 조각으로 많이 갔어요. 저는 반가사유상을 본 뒤부터 진선미(眞善美)가 모두 담긴 한국 불상 쪽으로 방향을 잡은 거죠.”
1971년 떠난 세계 일주 여행 후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미국, 일본, 유럽, 이집트, 동남아 등지를 돌면서 고전미술, 현대미술을 모두 돌아봤다. 목적은 한 가지. 석 달간 세계의 아름다움을 모두 본 그 눈으로 반가사유상을 다시 볼 때도 과연 똑같은 생각일지 알고 싶었다.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바로 박물관으로 가서 반가사유상을 봤어요. 이튿날 경주에서 석굴암을 봤고요. 세계의 역대 미술품 중에 아름다운 것은 많지만 반가사유상과 석굴암 같은 어른스러움은 없어요. 깨달음에서 온 미소, 그걸 만든 사람도 그만한 경지에 간 어떤 스님이지 않았을까요.”
1990년, <생각하는 여인>을 만들고서 다시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막상 ‘나의 반가사유상’을 만들고 나니 반가사유상과 너무 닮았을까 걱정이 됐다. 모방작이 될까 봐서다. “반가사유상을 가서 보니까 괜찮더라고. 닮은 게 아니야.(웃음)”
소박한 재료들로 만든, 사람보다 크지 않은 등신대 크기의 여인상. 한국인의 얼굴을 닮은, 원과 직사각형으로 이뤄진 절제되고 단순한 형태. 평면 회화처럼 정면을 향하는 그의 독창적인 입체 조각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문다. 특히 턱에 손을 괴고, 깊이 사유하는 ‘생각하는 조각상’ 연작들에서는 근원적인 형태와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 어떤 것을 초월해 정신적인 것으로 도달하려는 작가의 분투가 느껴진다.
“入於有法(입어유법), 出於無法(출어무법), 我用我法(아용아법).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한 세 마디예요. 역사를 다 뒤져보고 했더니 내 자리가 무법으로 됐다. 그러니까 내가 내 맘대로 내 법으로 그린다. 예술이란 과거를 수용하고, 소화한 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생명을 얻는 것이에요. 이것을 거쳐서 오기 전에는 ‘내 법’이 안 돼요.”
사유가 끊긴 자리, 미소
“저는 종교와 예술을 따로따로 해왔어요. 작품은 작품대로 종교 생활은 종교 생활대로. 그런데 이 둘이 70년 하다 보니까 만났어요. 한 2~3년 정도 됐어요. 만난 것을 느낌으로 알겠는데, 참 좋아요. 작품들도 이제야 비로소 슬픔기가 없어졌어요.”
최근 입체에 색채를 입히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그는 새벽 4시만 되면 눈이 떠진다고 한다. 빨리 일어나 구상했던 작품을 얼른 작업하고 싶어서란다.
평생을 아름다움에 천착해 온 작가에게 예술, 종교 그리고 삶은 무엇일까. 그의 에세이집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2019)에는 “젊은 시절부터 세 가지 큰 의문을 안고 살아왔다”며 “하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며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할 것인가. 또 하나는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는 신이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견성성불이란 또 무엇인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구순이 넘은 그는 그 답을 찾았을까?
“글쎄 그것참 모르겠네. 거 참 모르겠어요. 예술은 알 수 없는 것, 앎의 차원이 아닌 것 같아요. 종교와 하느님처럼요. 3,000년 가까운 인류 역사 가운데 많은 철학자가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는데, 정답은 없어요. 모르는 것, 그게 답일는지도 몰라요.”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