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무게는 얼마일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은 흔히 사유의 힘에 대한 찬탄으로 읽히지만 인간의 유한성과 왜소함에 대한 실토라고 하는 것이 맞다. 파스칼이 지적하듯이 사유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자신보다 월등히 우월한 우주를 만나지만 그것은 전 우주에 맞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영웅서사라기보다 인간과 세계를 분열시키고 인간 내면에 깊은 파열을 만들어 낸 근대적 비극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생각이 많은 자는 시름이 깊은 법, 인간사의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한 고민뿐 아니라 우주의 근원과 영원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에 이르기까지 사유는 우리를 불가피하게 한계에 대한 인식으로 이끈다.
지옥문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 지옥 같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뒤틀린 자세, 온몸에 불거진 근육, 꽉 다문 무거운 입술, 거칠고 투박한 청동의 질감으로 바라보는 사람마저 심연으로 가라앉히는 사유의 무게를 전달한다. 그는 지옥 같은 세상을 혁파하려 고심하지만 지옥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에 짓눌려 있다. 고통을 직시하는 일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
놀랍게도 서양에서 사유하는 인간이 조형적으로 묘사된 시기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위치한 산 로렌초 교회에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메디치가의 무덤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곳에 로렌초 메디치를 모델로 한 인물상을 조각했다. 턱을 괴고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벽화에도 같은 자세의 인물을 그려 넣었다. 구약에 나오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 타락한 시대를 고발하며 멸망을 예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깊은 수심에 잠겨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작품의 주인공들은 세상을 변혁하려는 그들의 도덕적 의지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자신의 분열로 인해 고통스럽게 어그러져 있다. 여기에 같은 자세를 하고 있지만 정반대의 표정을 가진 상이 있다. 반가사유상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반가상의 호리호리한 몸매, 경쾌하고 부드러운 윤곽선, 매끈하게 빛나는 금동의 표면은 사유에 대하여 미켈란젤로나 로댕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얼굴의 표정이다. 짙게 음영을 드린 광대와 퀭하게 움푹 파인 두 눈에 깃든 심각함과 엄숙함, 억압되었다가 다시 분출되는 <생각하는 사람>의 남성적 에너지와, 반가사유상의 반쯤 감은 눈과 옅은 미소에 응축되어 있는 고요함과 밀도, 여성적인 부드러움 속에서도 깊이 정신을 끌어당기는 힘은 양자 사이의 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인간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를 그려 넣은 사람은 고대 그리스인들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린, ‘아르카익 미소’라고 불리는 이 미소는 고전기 예술에서 나타나는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형상과 달리 어딘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집트 예술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표현이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뻣뻣하게 선 자세 역시 자연스럽지 않으나 돌에 갇힌 듯 경직된 이집트 신상과 달리 생동감이 느껴진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예술을 정신의 표현으로 보았는데, 정신의 단계에 따라 예술형식을 상징예술, 고전예술, 낭만예술로 나누었다. 고대 오리엔트 예술이 대표하는 상징예술에서 이집트 예술은 그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데, 헤겔은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의 형상에서 거대한 물질 덩어리에 짓눌린 정신과, 그로부터 해방되려는 정신의 고군분투를 읽었다.
그리스 고졸기 조각 작품은 이집트 예술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로, 훗날 빈켈만이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고 상찬했던 고전기 예술로 발전하게 되는데, 아르카익 미소는 물질에서 해방되려는 정신의 투쟁이 비로소 승리했음을 고하는, 정신이 자신이 이뤄낸 성취에 만족함을 알리는 첫 표정이다. 그것은 삶의 불확실성을 통찰하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으면서 긍지를 갖고 심연을 바라보는 긍정성, 니체가 ‘그리스인의 명랑성’이라고 명명한 바로 그 긍정성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리스 예술작품에서 자신의 표현을 얻은 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인류의 유년기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줄 알았던 미소가 다시 등장한 곳은 붓다의 얼굴이었다. 알렉산더 왕의 동방원정과 함께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 조각은 당시 불교에 나타난 새로운 대승적 경향과 만나 불상 조각을 탄생시켰다. 바로 붓다의 얼굴에서 미소는 자신의 영원한 거처를 발견한다. 그리고 해방된 정신의 첫 표정이었던 미소는 불상과 함께 깨달은 정신의 표정이 된다. 그런데 정말 깨달은 자에게 표정이 남아 있을까? 깨달음과 함께 오욕락이 사라지므로 그에겐 표정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미소가 생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무언가 만족스러울 때 짓는 표정이라면 오욕락이 사라진 존재에게 미소는 어떤 의미일까?
불교우주론에서 세계의 위계는 의식의 수준에 따라 욕망의 지배를 받는 욕계, 욕망은 사라졌으나 아직 물질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인 색계, 순수의식의 세계인 무색계로 나뉜다. 삼계 중 만족이라는 감정이 있는 곳은 욕계천의 네 번째에 위치한 도솔천뿐으로, 도솔천은 산스크리트 투시타(Tuṣita)의 음역이며 지족천(知足天), 묘족천(妙足天), 희족천(喜足天)이라고 의역되기도 한다. 도솔천은 말 그대로 만족을 아는 세계, 만족의 즐거움을 누리는 세계다. 바로 이곳에 반가사유상의 주인공 미륵보살이 머물고 계신다. 만족이 결핍과 관련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욕계천의 하나인 도솔천에서 만족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일생보처에 오른 보살, 그러니까 다음 생에 성불하게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미륵보살이 욕계천에 머문다는 점은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다.
미륵보살이 더 높은 천상으로 가지 않고 도솔천에 머무는 까닭은 그의 서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욕계천 가운데 도솔천보다 낮은 사천왕천, 도리천, 야마천은 아직 욕망과 게으름이 남아 있고 도솔천보다 더 높은 타화자재천과 화락천은 깊은 선정에 들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자비심 깊은 미륵보살에게 적절하지 못하다. 또한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성불하지 않고 굳이 다음 생까지 기다려서 지상의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성불하려는 이유 역시 그의 서원과 관계 있다. 자신의 해탈이 아니라 중생의 구제를 위해 성불하기를 원하기에 그는 중생이 거주하는 욕망의 세계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욕망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늘세계라 하더라도 욕망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거듭하며 파국으로 끝을 맺는 것이 보통이다. 도솔천에서만 욕망을 멈출 수 있는 까닭에 대해 『화엄경수소연의초』는 희족천이 일생보처가 머무는 곳이므로 보리심과 공행이 만족한 곳인데, 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노력할 때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공덕을 자손에게 물려주고 나서야 비로소 넘치는 줄 아는 것처럼 보살도 스스로 부지런히 실천할 때엔 만족을 모르다가 중생에게 회향하고 나서야 만족을 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도솔천 아래서도, 위에서도 욕망의 만족을 알지 못하다가 도솔천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만족을 알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미륵 자신의 본원, 자신의 수행 공덕을 모두 중생에게 돌려주겠다는 서원 때문이다. 또한 도솔천은 욕계천 중간에 있으므로 지혜와 자비가 균등하여 중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보살은 이곳에서 우리들의 세상으로 내려올 때를 기다리면서 천상의 존재들을 제도하고 보살도 수행을 이어간다.
이렇듯 매우 특별한 장소인 도솔천은 『화엄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이 이루어지는 회상 중 하나다. 이곳에서 펼쳐진 법문은 십회향의 법문으로, 여기서 보살의 수행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수행의 모든 결과를 중생에게 회향하는 십회향의 수행을 통해 보살은 무공용의 경계, 즉 얻은 바 없는 경계로 들어간다. 더 높은 수행 단계로 오르겠다는 생각마저 버렸으므로 이제 무분별을 방편으로 삼아 수행은 깊어진다. 그러므로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가지 않고 더 낮은 사바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형식상으로 볼 때 퇴보지만 대승불교는 그것을 중생을 향한 보리심의 실천이자 높고 낮음, 청정함과 욕망 따위의 분별을 떠난 무분별지의 수행으로 전환시킨다. 십회향의 수행을 통해 십지의 단계로 나아가며, 무소득의 진리를 깨달은 보살은 현인의 지위에서 성인의 지위에 오른다. 어떤 것도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는 자, 가장 큰 공덕을 쌓으며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자, 미소가 그의 표정인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턱을 괴고 앉아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 반가사유상은 깊은 선정에 들어 있다. 그는 도솔천과 미륵보살을 관하고 있다. 다음 생에 미륵보살이 계신 도솔천에 올라 보살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 다시 하생하여 용화회상에서 성불하고자 그는 언제나 미륵보살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을 갖기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법을 증득하여 중생에게 베풀어 주기를 생각하며, 세상의 복전이 되고자 수행하는 스님들처럼 되기를 생각하며, 계를 지켜 선근을 기르고 아낌없이 베푸는 보시행으로 복을 닦기를 생각하며 천상의 존재들처럼 그런 공덕을 쌓아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기를 생각한다. 육념(六念) 또는 육수념(六隨念)이라고 불리는 이 관법 수행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에서 권하는 수행법으로, 수행이 깊어지면 도솔천과 미륵보살을 눈앞에 보듯이 경험하게 되며 미륵보살과 같은 자비심이 가득하게 된다. 선정 속에서 관하는 자와 대상의 구별이 사라진다. 미륵보살을 관하는 자가 미륵이고, 반가사유상을 관하는 내가 반가사유상이 되는 그곳은 그리스인의 명랑성이 갖는 생동하는 봄의 긍정성이 아니라 삶의 심연을 직시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 고통 속으로 달려가는 보살의 무분별적 긍정성이 고요히 빛을 발하는 곳, 사유는 자취가 없고 살포시 내려 감은 시선 아래 미소가 어리는 곳이다.
명법 스님
해인사 국일암 감원,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