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은 오른손을 뺨에 대고 한쪽 다리를 반대편 다리 위에 걸치고 사유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상을 말한다.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2층 ‘사유의 방’에 전시된 일월식보관 반가사유상과 삼산관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반가사유상 가운데 대표작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7세기경에는 100여 년간 반가사유상이 집중적으로 조성됐다. 반가사유상은 크게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과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3세기경 간다라에서는 미륵보살상 대신 관음보살상이 반가사유상으로 처음 조성됐다. 그렇다면 깊은 선정에 든 모습을 한 사유상은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그 기원은 인도의 초기 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경에 조성된 중인도 바르훗(Bharhut) 대탑에서 시작된 사유 자세 도상은, 월지족이 세운 쿠샨 제국의 간다라 미술에서 다양한 도상으로 등장했다. 간다라 불전미술(佛傳美術)에서는 싯다르타 태자, 마왕, 야소다라의 아버지 등 다양한 인물이 사유 또는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됐었다. 또한 관음보살이 반가사유상으로 조성된 것도 2~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미술에서부터다.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상으로 표현된 중국, 우리나라, 일본의 경우와는 다른 흐름이다.
간다라의 영향을 받은 중국에서도 반가사유 자세의 상은 싯다르타 태자사유상과 미륵보살상 그리고 미륵수행자로 조성됐다. 인도와 중국 미술 속 반가사유상의 기원과 전개를 다룬 대표적인 논고로는 『인도미술사』를 저술한 미야지 아키라(宮治 昭)의 글을 들 수 있다(「半跏思惟像の成立と展開」, 『インド仏敎美術史論』, 中央公論美術出版, 2010).
간다라와 중국 불전미술에 나타난 반가사유상 도상을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자.
사유하는 싯다르타 태자
간다라와 중국 불전미술 속 싯다르타 태자가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된 예로는 염부수 아래 첫 선정에 든 장면에서다. 간다라에서는 두 손을 아래위로 겹친 선정인(禪定印)을 한 모습(사진 1)과 반가사유 자세(사진 2)로 표현된 경우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가 후자보다 많은 편이다. 대부분의 불전 경전에서는 싯다르타 태자가 염부수 아래 첫 선정에 들었을 때 가부좌를 맺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내용대로라면 사진 1의 선정인 자세로 결가부좌한 싯다르타 태자 모습이 어울린다. 그러나 『수행본기경』의 내용은 사유상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태자는 염부수 아래 앉아서 밭갈이하는 것을 보았다. 흙덩이가 부서지면서 벌레가 나왔다. 그러자 까마귀가 따르면서 쪼아 먹었고, 또 개구리는 지렁이, 뱀은 개구리를, 공작은 뱀을, 매는 공작을, 독수리는 매를 잡아먹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중생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고 인자한 마음으로 가엾이 여기면서 나무 아래서 제일선(第一禪)을 얻었다. 햇빛이 빛났기 때문에 나무가 태자를 위하여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 『수행본기경』 중에서
눈앞에 펼쳐진 약육강식의 세계를 경험한 싯다르타 태자가 고통으로부터 헤어 나올 방법을 모색하는 장면으로는 사유하는 자세가 선정인의 태자사유상보다 더 잘 어울린다. 사유하는 싯다르타 모습은 북위(386~534) 때 개창된 용문석굴 보태동에서도 그대로 수용됐다(사진 3). 반가사유 자세로 중생계를 걱정하는 싯다르타와 무릎을 꿇고 앉은 정반왕의 모습(사진 2, 3)에서 태양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신들의 도움으로 태자에게 나무 그늘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유하는 야소다라의 아버지
간다라 불전미술에 등장한 반가사유 자세의 또 다른 인물로 야소다라의 아버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정반왕으로부터 싯다르타 태자의 비로 딸을 달라는 청혼을 받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반왕은 태자를 위해 명문가의 여인을 채택하려 했지만 뜻에 맞는 이가 없었다. 선각왕의 딸 구이는 단정해 천하에 짝할 이가 없었다. 정반왕은 여덟 나라의 왕들이 아들을 위해 선각왕에게 구혼했지만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선각을 불러서 ‘나는 태자를 당신의 딸에게 장가를 들게 하고 싶소’라고 하였다. 선각은 집에 돌아온 후 근심하고 언짢아하면서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다.”
- 『수행본기경』 중에서
사진 4는 싯다르타 태자와 야소다라의 약혼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향좌측 모서리에 반가사유 자세로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인물이 바로 야소다라의 아버지다. 그는 정반왕이 아들을 위해 청혼을 하자 허락하지 않으면 정반왕에게 벌을 받을 것이고, 허락하면 여러 나라에 원한이 맺힐 것을 고민하고 있다.
애마와 이별하는 싯다르타 태자
출가 후 마부 찬나 및 애마 칸타카와 이별하는 싯다르타 태자는 간다라 불전미술에서는 서 있는 모습이지만, 중국에서는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됐다. 중국에서는 염부수 아래 첫 선정에 든 모습과 출가 후 애마와 이별하는 싯다르타를 반가사유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운강 제6굴(사진 5), 오사카시립박물관 소장품(사진 6), 홍경사 제1굴(사진 7), 북오장 출토 미륵보살상 뒷면(사진 8) ‘애마별리(愛馬別離)’ 장면의 싯다르타는 반가사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싯다르타가 탄생할 때 마부 찬나와 애마 칸타카도 동시에 태어났기 때문에, 태자로서의 마지막을 이들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애마별리’는 출가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애마별리’ 불전 장면은 애마와 태자의 이별이 중심이다. 애마 칸타카가 무릎을 꿇고 싯다르타의 발을 핥으면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니 마부 찬나도 슬피 울었다는 『태자서응본기경』의 내용과 잘 부합한다. 특히 이 가운데 나무 아래 반가사유 자세의 싯다르타 모습(사진 7, 8)은 염부수 아래 첫 선정에 든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사유하는 마왕
인도 불전미술에서 가장 먼저 사유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싯다르타의 성도를 인정하고 자신의 패배를 수용하는 마왕 마라다. 마왕 마라는 갖가지 수단으로 싯다르타의 성도를 방해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 보는 마왕의 모습 역시 사유상으로 표현됐다.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경에 조성된 바르훗 대탑을 두른 울타리에는 석가여래의 성도 장면이 새겨져 있다. 석가여래의 성도를 찬탄하는 신들은 상하 2단으로 표현됐는데, 터번을 쓰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하고 있다. 향좌측 아래쪽에 왼손을 뺨에 대고 쪼그리고 앉아 오른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는 인물이 바로 패배한 마왕이다(사진 9, 10).
마왕 마라는 석가여래가 성도하자 곧바로 열반에 들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석가여래께서는 세간에 삼보(三寶)가 아직 갖춰지지 못했고, 중생이 아직 조복되지 못했기 때문에 열반에 들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마왕은 한쪽에 앉아 지팡이로 땅을 그으면서 “이 욕계 안이 이제부터는 나의 소유가 아니로구나” 하면서 마음으로 근심하고 괴로워했다(『방광대장엄경』). 마왕이 오른손에 막대기를 들고 무언가 땅에 기록하고 있는 모습(사진 10)은 이것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된다.
간다라 항마성도 장면에서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마왕이 향좌측에 사유 자세로 앉아 있다(사진 11, 12). 나무 아래 앉아 깊은 사유에 잠긴 마왕의 모습은 “마왕이 크게 패해 이익 잃음을 슬퍼하며 정신없이 물러나 쭈그리고 앉은” 『태자서응본기경』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사유하는 관음보살
3세기경 간다라에서는 대승불교 미술 시대가 열리면서 석가여래의 좌우에 대승불교의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상징하는 미륵보살과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의미하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됐다. 즉 미륵보살은 물병을 들고 긴 머리칼을 올려 묶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표현됐고, 관음보살은 연꽃을 들고 터번을 쓴 왕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연꽃을 든 쿠샨 시대 간다라와 마투라의 관음보살상은 서 있는 상이 대부분이지만 반가사유 도상도 새롭게 등장했다(사진 13, 14, 15).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미륵보살상이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간다라 관음보살상은 왼손으로 연꽃을 들고 오른손을 뺨에 댄 채 고개를 약간 숙여 사유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마투라 반가사유 관음보살상(사진 15)은 보관에 화불이 표현됐고, 왼손은 연꽃 대신 허벅지 위에 뒀으며,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반가사유상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태자사유상, 미륵보살상, 미륵수행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태자사유상은 불전미술과 단독의 상으로 조성됐다. 단독의 태자사유상은 대좌에 태자상(太子像, 사진 16) 또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사유상(思惟像, 사진 17), 백옥상(白玉像), 옥상(玉像) 등의 명문이 있을 뿐 미륵상이라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대좌에 기록된 내용과 도상을 통해 미륵보살상으로 조성된 다양한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그루의 용화수를 배경으로 반가사유상이 독존(사진 18) 또는 쌍으로 표현된 예(사진 19)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용화수 아래 성도할 것이라는 미륵보살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운강석굴에는 중앙에 두 다리를 교차시킨 미륵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반가사유 자세의 도솔천에 상생하고자 하는 미륵수행자를 나타낸 예(사진 20)도 있다.
반가사유상을 중국에서 태자사유상과 미륵보살상으로 표현한 것은 두 존상이 갖는 공통된 성격에서 비롯됐다. 즉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서 석가여래가 될 것이고, 미륵보살은 용화수 아래에서 미륵불이 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유 자세는 결국 성불을 향한 수행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근자
동국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불교미술 전공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강원도·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과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한 간다라 불전미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가 있고, 공동 저서로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와 『치유하는 붓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