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장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갔다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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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장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갔다 전해라”
  • 최호승
  • 승인 2021.09.0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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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당 고우 대종사 영결·다비식 엄수
고우 스님 영결식과 다비식이 거행된 문경 봉암사에 모인 사부대중은 스님을 추모하며 마지막을 배웅했다.
고우 스님 영결식과 다비식이 거행된 문경 봉암사에 모인 사부대중은 스님을 추모하며 마지막을 배웅했다.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친견했던 인연을, 한 출판인은 함께했던 소박한 점심공양 기억으로 영결식 자료집을 만든 인연을, 수행을 지도하는 재가자는 수년간 스승으로 모신 인연을, 수좌들과 스님들은 함께 탁마했던 인연을…. 저마다 인연 따라 문경 희양산 아래 봉암사에 모였다. 노장의 세연이 인연 따라 흩어짐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각자 인연으로 모인 사부대중은 9월 2일 오전 차량 소독기를 거쳐 마스크를 쓰고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지키며 문경 봉암사 경내로 향했다. 그리고 노장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두 손을 포갰고, 노장을 추모했다. 조계종 원로 은암당 고우 대종사의 영결·다비식은 그 마음으로 뜨거웠다.

고우 스님 영전에 하얀 국화를 헌화하는 무여 스님.
고우 스님 영전에 하얀 국화를 헌화하는 무여 스님.

한국불교의 선승이자 수좌, 도반이었던 큰스님들이 고우 스님 영전에 하얀 국화를 공양했다. 선원수좌회장 장의의원장 무여 스님은 고우 스님을 ‘매화의 지절(志節)’로 기억했다. 무여 스님은 “고결한 기개로 견성성불의 종지에 착안하고 온전한 달과 같은 자비로운 아버지로 요익중생의 행원을 펼쳤다”고 고우 스님을 기렸다. “선의 대중화와 선의 세계화가 이뤄져 모두 안심입명하는 날까지 무한향상의 죽비를 놓지 않겠다”는 결의도 밝혔다.

행장을 읽어 내려간 석종사 조실 혜국 스님이 선을 널리 펴왔던 고우 스님의 불연을 되새겼다. 작가가 꿈이었던 26세의 청년은 군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방황하다 한 생 포기하는 심정으로 김천 수도암으로 출가했다. 불연이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청년의 온 마음을 빨아들였고, 약도 버렸던 폐결핵은 자취를 감췄다. 고봉, 관응, 혼해 대강백에게 가르침을 받고 불교관을 정립한 청년 고우 스님은 29세에 향곡 스님이 주석한 묘관음사 길상선원에서 첫 안거를 지낸 뒤 제방 선원에서 두루 정진, 평생 참선의 길만 걸었다.

봉암사 대웅보전에 인사 올린 고우 스님의 법구는 표표히 연화대로 향했다.
봉암사 대웅보전에 인사 올린 고우 스님의 법구는 표표히 연화대로 향했다.

고우 스님은 1968년 문경 김용사에서 법연, 무비, 법화, 정광, 혜규 등 10여 명의 선승들과 ‘제2 봉암결사’에 뜻을 모아 구산선문의 유구한 수선도량이자 결사처인 봉암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후 한국불교의 유구한 참선 수행을 바르게 하고 선을 널리 전하고자 도반 적명 스님과 함께 선납회(禪衲會, 현재 전국선원수좌회)를 창립, 선문(禪門)에서는 보기 드문 법회로 당시 새로운 선풍을 불러왔다. 성철 스님의 『육조단경』 지침법문과 서암 스님의 『육조단경』 강의, 일타 스님의 『율장』 특강에 이은 수좌 500여 명이 탁마 정진하는 선불장(選佛場)을 열었던 것. 2002년에는 각화사 태백선원 선원장을 맡아 결제 대중이 15개월 15시간 가행정진하는 결사를 이끌기도 했다.

2006년에는 봉화 금봉암을 창건해 주석하면서 전국 각처에서 선 법문 청이 오면 거리를 따지지 않고 법을 전하던 고우 스님은 2011년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한자리에 모이는 이례적인 법석에 섰다. 스님은 위빠사나를 대표해 방한한 미얀마 파욱 스님과 2박 3일간 문답 법석을 펼쳤다.

평소 제사와 불공을 일체 않고 오직 법문과 참선 수행만 하던 고우 스님은 재가자를 위한 지도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2012년 조계사 선림원 증명법사로 추대된 스님은 불교인재원과 더불어 서울 도심에서 중도 정견과 화두 참선을 안내하는 데 애썼다. 백일법문 대강좌에서는 좌석 수백 석이 동나기도 했다.

고우 스님의 법구는 대웅보전 부처님에게 인사 올린 뒤, 지체 없이 희양산을 뒤로 하고 표표히 연화대로 향했다. 계곡 건너 수차례 드나들었을 봉암사 일주문을 나섰다.
고우 스님의 법구는 대웅보전 부처님에게 인사 올린 뒤, 지체 없이 희양산을 뒤로 하고 표표히 연화대로 향했다. 계곡 건너 수차례 드나들었을 봉암사 일주문을 나섰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도 고우 스님의 발자취를 잘 알았다. 해서 “간화선법의 수승함과 한국선이 지닌 세계사적 가치를 찬탄했던 명안조사”라고 치켜세웠다. 또 “이 땅의 대중과 지구촌 인류 모두에게 ‘수행의 즐거움’을 전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웠던 원력보살”이라고 추앙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생전에 친견했던 두 번의 인연을 떠올렸다. 문 대통령은 조전에서 “봉암사에서 들었던 법문이 생생하다. 무한경쟁을 하지 말고, 나와 너의 분별을 버리는 ‘무한향상’을 강조했다”며 “스님 가르침대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더불어 잘사는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고우 스님은 청빈의 사표였다. 부처님오신날은 물론 절에 연등을 켜지 않았고, 외형의 등보다 마음의 등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절 아래 낡은 교회를 새로 짓는 일에 선뜻 적지 않은 돈을 보시했고,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전했다. 기력이 급격히 떨어진 80세에도 손수 빨래를 하며 검소하게 소욕지족하며 정진했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이 “청빈한 수행, 일의일발(一衣一鉢, 한 가지 옷과 한 개 발우)은 한평생 살림살이였고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다”며 고우 스님의 가풍에 두 손을 모은 이유였다.

연화대에 오른 고우 스님의 법구는 사부대중의 나무아미타불 배웅을 받으며 희양산 가을 하늘로 흩어졌다.
연화대에 오른 고우 스님의 법구는 사부대중의 나무아미타불 배웅을 받으며 희양산 가을 하늘로 흩어졌다.

때가 됐다. 성적당에서 나온 고우 스님의 법구는 대웅보전 부처님에게 인사를 올렸다. 지체 없이 희양산을 뒤로하고 표표히 연화대로 향했다. 계곡을 건너 젊은 시절 수차례 드나들었던 봉암사 일주문을 나섰다. 연화대에 스님의 법구가 안치되자 불이 들었다. 한 치 망설임이 없었다. 사부대중은 극락왕생을 간절히 기원하는 나무아미타불 염송으로 스님의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세연이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지듯 스님의 법구가 연기로 화해 희양산 가을 하늘 위로 흩어졌다.

49재를 회향하면 고우 스님은 세연의 고리를 끊는다. 애도는 하되 눈물은 아껴둘 일이다. 제자들이 법문을 엮어 『고우스님 육조단경 강설』과 『태백산 선지식의 영원한 행복』 등을 남겼다. 여러 매체에 스님의 중도 법문이 기록됐고, 수십 년 지도했던 참선을 이어가는 제자들이 있다. 스님의 뜻을 이어갈 사부대중도 여전하다. 그리고 고우 스님은 이미 말씀하지 않았던가. 생과 사에 연연하지 않는 여여함으로, 평범함의 비범함이 번뜩이는 그 말씀.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전해라.”

※ 은암당 고우 대종사 49재(054-571-9088)

초재(봉암사) 9월 4일 오전 10시
2재(금봉암) 9월 11일 오전 10시
3재(석종사) 9월 18일 오전 10시
4재(학림사) 9월 25일 오전 10시
5재(축서사) 10월 2일 오전 10시
6재(흥국사) 10월 9일 오전 10시
49재(봉암사) 10월 16일 오전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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