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부다가야에 가보셨나요? 그곳에 가면 보리수나무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나무 아래서 7일간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럼 부처님이 얻은 그 깨달음이 무엇이냐.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깨달음의 핵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그간 이 문제에 너무 소홀했어요. 1만 2천이나 되는 스님들 중에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재가신도님들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지요.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이해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 건 우리가 불교의 핵심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몇 퍼센트나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불교의 핵심에 대해 저의 짧은 이야기라도 듣는 것이 전혀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말은 뭘 깨달았다는 거냐. 한 마디로 요약하면 중도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고를 이분법적으로 합니다. 가족이란 아내와 남편이 함께 모여서 구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너와 나를 서로 나눠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식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이웃 간에는 다릅니까? 사회생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정치권은 가장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집단입니다.
부처님도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던 시기에는 그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괴로움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어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고부터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남을 이롭게 하고, 도와주는 사고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중도를 이해해야 불교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불자가 아닙니다. 그건 껍데기일 뿐이에요.
중도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루 24시간 내리 그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악몽을 꾸면 꿈속에서도 내가 도망갑니다. 꿈은 무의식이죠. 무의식 너머 잠재의식에서까지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것은 허울이다. 뽑아내자. ‘나’는 없다. 그걸 이해하면 비로소 매일매일 좋은 날이 펼쳐집니다. 순간순간 좋은 날이 됩니다. 스님이 너무 허황한 얘기를 하는 것 아닌가? 과연 그런 방법이 있는가? 하겠지만 그런 방법,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얘기해서 아직 꿈에서까지 ‘나’를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모르고 살 때와 알고 있을 때, 그래서 깨어 있을 때만이라도 그렇게 하려고 할 때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당연히 후자가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내겠지요. 우리가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것은 무의식까지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이때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은 어마어마합니다.
| ‘나’로 인한 이분법이 불행의 시작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모두 중도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태란습화胎卵濕化,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 알로 태어나는 것, 습한 곳에서 태어나는 것 등 모든 생명의 종류들이 다 중도로서 존재하고 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도,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다 중도의 법칙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 번 사람에 대해서만 생각해봅시다. 모든 사람들은 다 다릅니다. 생긴 것, 말투 등등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때로는 외적인 조건이 나에게 맞으면 행복하다고 느끼다가, 외적인 조건이 나에게 불리하면 화가 나고 상심하게 됩니다. 불행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행·불행을 느끼는 조건이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경계에 꺼둘리는 겁니다. 경계라는 건 아무리 좋게 만들려고 해도 좋게 만들 수 없습니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도는 다른 말로 ‘나’를 바로 보자는 의미입니다. 나를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겁니다. 외적인 조건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그러나 내가 나의 내면을 고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것을 고치면 외부의 조건이나 경계에 상관없이 내가 그것을 수용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를 바로 봅시다.
여러분들 생각에 나를 바로보자는 게 무슨 소리일까 싶을 겁니다. 내가 나를 바로 본다는 게 대체 뭘까요? 부처님은 그걸 깨달은 겁니다. 지금 현재는 ‘나’가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얽히면 부부싸움을 합니다. 도장도 찍고요. 그런데 부처님이 보니까 부모자식은 말할 것도 없고 인종, 민족, 종을 초월해서 우리는 하나로 존재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태란습화, 유정무정의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니 늘 둘로 나누어 보면서 사람이다 짐승이다, 너다 나다 이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 새끼든 가마니든 본질은 ‘짚’이다
외적인 형상은 다르더라도 본질은 하나다.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알리는 것이 가장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본인도 아마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완벽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자주 예로 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핵심을 바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를 돕는 데는 아주 괜찮은 비유입니다. 새끼 보셨죠? 가마니 보셨죠? 그 둘은 서로 다른 제품입니다. 그런데 그 제품들의 재료는 뭡니까? 짚이죠. 제가 그렇게 강조하는 ‘공’의 핵심은 ‘짚’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제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부부 간에도 서로 다른 제품이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니 티격태격할 수밖에요. 하지만 두 제품도 ‘짚’이라는 하나의 근원은 똑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입니다. 수백 가지 제품이 있지만, 재료는 모두 똑같은 ‘짚’이에요. 이걸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정리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공’인 줄 알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럼 왜 ‘공’이냐.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서로 연기법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공’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단일하게 독립돼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존재들이 개별적으로 독립돼 있다고 이해하면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가 생기고 존재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공’입니다.
그럼 뭐가 중도냐. 내가 공한 줄 알고 행위하는 것, 그것은 ‘나’를 버리고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나’를 버리면 내가 중도로서 존재하고 있고, 중도로서 행위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중도를 이해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중도의 사고방식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훨씬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중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중도에 있습니다.
법문. 고우 스님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대종사, 대표적인 대강백이다. 1968년 문경 봉암사에서 선원을 재건해 조계종 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진 장본인으로 봉암사 주지, 축서사 주지, 각화사 태백선원장, 조계종 법계위원 등을 역임했다. 전국 선원수좌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현재 경북 봉화 금봉선원에 주석하며 포교를 위해 대중들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법문을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