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는 북청에서 만 1년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돌아온다. 그곳은 예전에 부친 김노경이 별서(別墅)로 마련해둔 곳으로, 추사는 여기에서 4년간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71세로 생을 마감한다.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은 이때 추사의 삶을 “그 생활은 처연하고 담담하고 편안했다. 결코, 몰락한 귀족이 갖는 비애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불교적 의미로 마음의 비움 같은 것이었다”고 평한다.
이 시절 추사는 자신을 노과(老果)·과형(果兄)·과산(果山)·과파(果坡)·과칠십(果七十)·칠십일과(七十一果) 등으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단지 자신이 과천 사는 사람임을 나타내려는 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추사에게 과(果)자는 고단한 인생의 과보(果報)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기 학문과 예술의 완성일 수도 있겠고, 궁극적으로는 도달하고 싶은 택멸(擇滅)의 이계과(離繫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릭슨(Erikson)은 이런 말을 했다. “노년에 필요한 것은, 인생 전반을 관조하여 자기의 모든 과거를 수용하고 삶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적 차원의 초월로 이어진다”고. 추사는 과천에서 이런 열매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늙은 천재의 평범 속 비범
추사의 삶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금수저인 데다 천재였고 노력파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점은 그 천재성의 그림자, 즉 모나고 오만한 성격이었다. 추사 자신도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이라고 말할 정도로 직설과 독설은 너무도 유명하다.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과장된 오만함도 잘 알려져 있다. 김영한은 『완당전집』 서문에서 추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강직하고 모난 성품과 고결한 행실이 문제였다. 추사 선생은 스스로 재능을 감추고 세상의 속인들과 어울리지 못했기에, 봉록과 작위를 잃고 말았다. 선생을 미워하는 이들은 그 단점을 날조하여 퍼뜨리고 공격하였고, 급기야 선생은 세상에서 신뢰를 잃고 말았다.”
결국, 오만한 천재는 8년을 원악도에서 다시 1년을 북청에서 신산(辛酸, 세상살이가 고됨)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과천으로 돌아온 어느 날 촌 동네 노부부를 만나고서 그는 자기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길가 마을 집이 옥수수밭 가운데 있는데 거기에서 두 늙은 영감 할멈이 희희낙락하며 자득하고 지낸다. 그래서 내가 영감 나이가 몇이냐 하니 일흔 살이라 한다. 서울에 가본 적이 있느냐 했더니만 평생 관가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무얼 먹고 사느냐고 물으니 옥수수를 먹는다고 한다. 나는 평생 남으로 북으로 부평초처럼 떠다니며 비바람에 휘날리고 부대끼며 살았다. 그 늙은이를 보고 그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망연자실해졌다.
한 그루 늙은 버들 두어 서까래 집에(禿柳一株屋數椽)
머리 하얀 영감 할멈이 조용히 살고 있네(翁婆白髮兩蕭然).
그들은 석 자도 안 되는 시냇가를
건너본 적도 없이(未過三尺溪邊路)
옥수수 먹고 가을바람 맞으며 칠십 년을 살았다네(玉䕽西風七十年).
(『완당전집』10권)
인생의 진리는 오직 시간과 경험 속에 숨어있는 것일까? 평범한 삶이 가장 값진 진리라는 것을 추사는 숱한 풍상을 겪은 고희가 되고서야 알게 된다. 오만한 천재는 이제야 진리의 일상성을 깨닫는다. 그의 파격적 예술성이 비근하고 졸박한 경지로 돌아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의 마지막 예서체 대련인 <대팽두부(大烹豆腐)>는 70세가 된 추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요리는 두부와 오이, 생강과 나물이고(大烹豆腐瓜薑菜),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그리고 손자라네(高會夫妻兒女孫).”
그 글씨와 내용에는 옥수수를 먹고 자득하는 노부부의 삶과 이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그의 성숙한 만년이 온전히 투영된 듯하다. 이 작품은, 아무리 소박한 척 순수한 척 가식을 부려도 절대 만들 수 없는, 그저 여여(如如)한 평범함과 순후함의 결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만한 천재가 늙어서야 인생 앞에서 겸손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추사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다. 비범함을 평범함 속으로, 천재성을 졸박함으로, 신성함으로 세속 안으로 녹여내고 있다. 그는 예술이라는 장르의 특수성, 즉 미(美)의 추구라는 목적의식마저 지워버린 듯하다. 비근하고 평범한 삶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 그것을 떠나 추구될 아름다움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위대한 은자는 저잣거리에”
흔히들 추사의 만년 예술을 ‘졸(拙)의 미학’이라고 말하고 『노자』의 ‘위대한 기교는 마치 졸렬한 듯하다(大巧若拙)’라는 구절에 견주는데, 이런 표현도 탐탁스럽지 않다. 이것은 마치 추사가 또 하나의 상승 경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렇게 했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용수(龍樹)가 언어와 개념이 실재를 왜곡한다고 우려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추사가 ‘예뻐 보이려고’ 이렇게 글씨를 쓴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추사의 경지를 왜곡하는 것 같다. 추사는 그냥 여여하게 사는 대로 썼고 쓴 대로 살았던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도 엿보인다. 추사는 만년에 봉은사와 깊은 연을 맺고 거기에 거주했다. 마침 남호 스님이 『화엄경』 80권을 목판으로 인출할 때 봉은사에 경판전을 짓고 그 현판을 추사에게 부탁했다. 남호 스님은 예전에 『아미타경』과 『무량경』을 판각하여 추사에게 증정한 적도 있었기에 추사는 아마 흔쾌히 그 청을 들어, ‘판전(板殿)’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주었다. 그리고 3일 뒤 세상을 떠났다. 1856년 10월의 일이었다.
이 현판은 추사의 마지막 작품이라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다. 어떤 이는 추사가 병든 노년에 쓴 것이라 조형미와 기교가 떨어진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획 하나하나를 분석하며 희대의 걸작으로 치켜세우기도 하고,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러운 작품’이라고 흥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상반된 평가들을 일단 유보하고 직접 보는 것이 추사를 이해하는 데 더 유익할 것이다.
보통 이 현판의 글씨만 찍힌 사진을 보게 되는데, 이 현판이 걸려있는 경판전과 함께 볼 때 더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보통의 사찰 건물 현판들보다 유난히 현판도 크고 글자도 크다. 글씨는 멋을 낸 구석이 전혀 없고 굵고 무뚝뚝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현판은 경판전을 대단한 장소로 주목하게 한다. 그 기교 없고 졸박하기만 한 글씨가 그 평범한 건물을 불법의 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이게 추사의 경지가 아닐까?
추사는 일전에 윤정현에게 ‘침계(梣溪)’ 두 글자 현판을 부탁받고 첫 글자의 예서 전거를 찾다가 30년을 지연한 적이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판전 두 글자는 어떤 전거에 기대지 않고 추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모든 서체를 완벽히 섭렵한 뒤 다시 내버린 것처럼, 자기만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자기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추사는 충분하였으리라. 그것이 화엄의 경지가 아닐까?
추사가 만년에 봉은사에 기거했던 정황은 상유현의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이것을 구해 보기는 쉽지 않다. 유홍준의 책에 일부가 소개되어 있는데, 추사가 발우공양을 하고 자화참회(刺火懺悔)하면서 불교에 귀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추사가 만년에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 세상에 적잖이 퍼져 있다(유홍준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추사방현기」의 이 부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스님이 저녁 식사시간임을 알리자 여러 어른(추사의 제자들)이 방에서 나가셨다. 나(상유현)는 일부러 서서 지켜보았다. 식탁이 없이 흑칠한 평판(平板) 위에 발우를 폈는데, 5개의 나무 접시가 있었고, 그 안에는 소찬이 있었고 옻칠한 수저와 젓가락이 갖춰져 있었다. 시중드는 사람[傔人]이 들어왔는데, 은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찬합을 들고 와서 공(추사)에게 진상하고는 또 무슨 말을 하고는 나갔고, 또 사기 항아리를 가지고 왔는데, 음식인 것 같았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나는 뜰로 나왔고 한 스님이 반상을 치웠다. 내가 다시 들어가서 보니, 한 스님이 대야에 물을 떠서 드렸고, 공께서는 세수와 양치질을 끝내셨다. 그러자 또 노승 한 명이 작대기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 끝에는 작은 종이 대롱이 달려있었다. 그 종이 대롱에서 까끄라기[針芒] 같은 것을 한 가닥 꺼내어 공의 오른쪽 팔뚝 위에 세웠다. 그러자 사미승[小闍黎]이 성냥[石硫黃]으로 불을 켜서 그 까끄라기 끝에 붙였다. 촛불처럼 타더니 서 있는 채로 다 탔다. 나는 평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급히 서쪽 방에 가서 여러 어른께 여쭈었다. 그러자 어른들은 바로 노승에게 물었다. “김공께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하시는가?” 노승이 “그렇습니다. 김공께서는 아침저녁으로 비록 공양간[香積]에서 음식[膳需]을 제공하기는 하나 대부분 당신께서 집에서 가져오신 것을 드시는데, 어류와 육류가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이런 의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노승이 간 다음 내가 어른께 여쭈었다. “저 의식은 무슨 의미이고 어떤 법이며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어당 어른(이상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불경에 있는 자화참회라는 것이다. 또 수계(受戒)라고도 이름한다. 승려가 되려는 이가 처음 삭발하고 스승에게 계를 받을 때도 이와 같은 의식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속세의 더러움[塵穢]을 없애고 청정함에 귀의하겠다는 맹세이다. 불법에서 그렇게 한다.
추사가 만년에 출가했다면 정말 대사건이어서 기록이 없을 리 없다.
추사가 그럴 이유도 없고, 봉은사 스님들이 출가를 권했을 리도 없다. 그는 이미 불교에 대해 매우 해박한 데다 불법을 깊이 체득했으니 말이다. 그는 봉은사에서 어른으로 대우받았던 것이지 젊은 수행승처럼 지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청정한 불법을 따르기 위해 육식한 것에 대해 이렇게 재계와 참회를 했다. 그래서 이상수는 상유현에게 추사가 청정한 불법에 귀의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추사는 굳이 출가하지 않아도 이미 출가와 속세, 정토와 예토, 번뇌와 열반, 중생과 부처가 구분되지 않는 불이(不二)의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위대한 은자는 저잣거리에 은거한다(大隱隱於市)’라고 하지 않던가? 그에게 성과 속의 경계는 없었다. 그가 해동 유마거사라고 불렸던 것도, 〈불이선란(不二禪蘭)〉을 그린 것도 다 그가 추구한 불이의 경지와 맞닿는다. 추사는 세속의 무진 번뇌에서 벗어나고 탈속의 열반에서도 다시 벗어나서 진정한 무주상(無住相)의 이계과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홍성민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에서 「주자 수양론의 구조와 실천적 성격」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감정과 도덕: 성리학의 도덕감정론』을 썼고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국역주자문록』 등을 공역했다. 조선 유학과 불교의 감정론과 수양론을 연구하면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