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위주 수행 풍토에 일침
19세기 조선 사회는 변화의 시기였다. 성리학 사회를 재정립하려던 정조의 노력이 뜻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세도정치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새로운 모색을 도모하던 여러 주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청나라 학문의 대세였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관점으로 이 시기 새로운 시대사조를 이끈 중심인물이었다.
추사는 불교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졌는데, 선대부터 내려온 불교 신앙으로 불교를 가까이하여 충남 예산 향저 인근의 화암사를 중수하고 사경 공덕을 쌓기도 했다. 추사는 백파와 초의를 비롯한 당대의 고승들과 깊은 교류를 가지는 한편 불교의 정수를 표상한 듯한 명작 <불이선란(不二禪蘭)>을 남기기도 했다. 여러 스님에게 보낸 서신과 게송도 적지 않게 남겼고, 역대 종사들의 경지를 거론하여 평하기도 하고 선교 융합을 강조하는 논지를 펴기도 했다. 만년에는 봉은사에서 기거하며 자참(刺懺)의 실천 신행을 보였고, 봉은사에서 『화엄경』 판각 완성 즈음하여 일품 ‘판전(板殿)’ 현판을 써 남겼다.
강학의 성행과 백파의 수선결사
16~17세기에 스님들은 선 수행을 중심에 두되 교학 수련과 염불도 병행하는 삼문(三門) 수학을 보편적으로 따랐다. 주요 사찰에 열린 강원에서는 10년 정도 기간에 사미, 사집, 사교, 대교과의 이력(履歷)을 차례로 이수했다. 이에 따라 선에 뛰어난 종사(宗師)와 강학으로 이름을 날린 강사(講師)가 나란히 존경받았다. 청중들은 화엄을 중심으로 한 강의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당시의 선문을 대표하는 대종장이었다. 백파는 56세 때 화장대 소림굴에 수선결사(修禪結社)를 열어 교와 선의 균형 있는 탐구를 지향하는 새로운 불교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수행의 결의를 다지는 『수선결사문』에서 ‘배우는 이는 돈오점수의 두 문을 명확히 안 연후, 교의를 놓아버리고 일념으로 선지를 참구해 새로운 활로를 얻자’고 역설했다.
백파는 서산에서 환성으로 이어지는 임제 우위의 선 사상을 계승해 전통적인 선론을 재정립하고 『선문수경(禪文手鏡)』으로 정리했다. 백파는 임제삼구를 근본 명제로 삼아 삼종선설(조사선, 여래선, 의리선 등 3종으로 선을 구분)을 제창하고 이로써 교학을 포괄하고자 했다. 백파가 전통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새로운 삼종선설을 들고나온 것은 교학 중심으로 기울던 당시 불교계 흐름에서 선 수행의 주류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로 이를 반박했다. 초의는 왕성한 교학 경향을 수용하여 교학과 선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주장했다.
이 시기에 사족(士族, 선비나 무인 집안 또는 그 자손)과 스님의 교유는 그 폭이 확대됐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기간에 아암혜장(兒庵惠藏)을 비롯한 많은 스님과 교유하며, 대둔사 「만일암지」와 「만덕사지」와 같은 불교 사서의 편찬에도 도움을 주었다. 백파는 추사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당대 권문을 대표하는 김조순과도 교분이 깊었다. 김조순은 백파의 『수선결사문』 서문을 썼고, 백파의 「소림굴 선교결사회기」는 기정진이 썼다. 불교는 물론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초의는 홍석주와 신위, 추사 등 대표적인 문사들과 시문으로 교유했다.
추사는 여러 스님과 시서(詩書)를 주고받았는데, 불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추사는 19세기 강학의 쌍벽인 연담유일(蓮潭有一)의 비명과 인악의첨(仁嶽義沾)의 영정에 찬(讚, 기리어 칭찬하는 글)을 짓기도 했다. 추사는 호봉(虎峰)이나 무주(無住)에게 화두만 붙드는 것보다 사경 공덕이 제일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추사와 백파의 논쟁
추사는 불교의 역사와 교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바탕으로 시대적 상황을 전망하며 백파를 중심으로 한 전통 불교계의 고식적인 견해를 맹렬하게 비판했고, 백파는 당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불교관에 입각해 반박 논리를 펼쳤다.
추사와 백파는 수십 차례 서간을 주고받으며 변론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는 글은 추사의 글 4편과 백파의 글 2편뿐이다. 이 중에서 추사의 「백파께(與白坡)」 1과 백파의 「김참판께 답함(答金參判)」 1, 「백파께 증명하여 답하는 글(證答白坡書)」과 「김참판께 답함(答金參判)」 2는 앞 서간의 내용을 토대로 조목조목 논변한 긴밀한 대응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논변은 백파가 『선문수경』이나 『수선결사문』 등에서 펼친 논리를 추사가 비판하는 글에서 시작해 이에 대한 백파의 반박이 오가며 진행되었을 것이다. 「증답백파서(證答白坡書)」에 기록한 1843년은 백파가 77세, 추사가 제주에서 귀양 살던 58세 때다. 이를 전후로 논변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추사가 열다섯 항목에 걸쳐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을 보내자, 백파는 열 항목에 걸쳐 자신의 견해가 옳음을 천명했다. 추사가 다시 열다섯 항목으로 반박하고, 백파 또한 아홉 항목에 걸쳐 재반박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지금 남은 글이다. 서로 대응하는 주요 구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추사는 “화두 아닌 불설이 없다면서 법화, 화엄 같은 경전이 사구(死句)라 하니 두 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라고 논박하자, 백파는 “만법이 선지(禪旨)”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여래가 설한 화엄, 법화는 선지가 아닐 수 없으며 부처가 일음으로 법을 연설하셨는데 아난이나 대중은 교로 이해하고 가섭만은 홀로 선으로 깨달아 격외선풍이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이 논박은 백파가 『선문수경』에서 경전, 곧 교를 선에 못 미치는 낮은 단계로 평가한 것을 두고 추사가 경전은 불설이 아니냐고 추궁한 구절이다. 그러나 백파도 경전도 선의 뜻 아님이 없다고 하며 다만 대중은 교로 이해하고 가섭이 선으로 깨달았다 하여 격외선을 더 높이 평가할 뿐임을 말한 것이다.
추사는 한발 더 나아가 “염화(拈華) 소식을 가섭만이 알았다 하는데 묘유, 생멸, 수연, 관조반야 같은 말은 경전 중에 없는 데가 없는데 따로 염화를 들어 대중에게 보여줄 것이 있겠는가?” 반문했다. 그러자 백파는 “부처의 본뜻은 선과 교가 상즉(相卽, 모든 현상의 본질은 서로 융합해 걸림이 없다)하는 것으로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인데 어찌 다르겠느냐 하며 도리어 선과 교, 어묵(語默)의 둘로 나누어 집착하느냐?”고 반박했다.
사실 추사가 교선일치적 관점에서 백파의 화두 들기를 맹공했지만, 백파 역시 교와 선이 다르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기에 이런 답변이 나온 것이다. 선과 교를 보는 시각 차이는 있다. 추사는 교 또한 선과 의미나 수준이 다를 바 없다는 교선일치적 관점이고, 백파는 선교가 다르지는 않지만 격외선이 역시 우월하다는 인식의 차이다. 그 때문에 백파는 선과 교를 나누어 공격하는 추사의 논박이 부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추사와 백파의 논쟁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추사는 “달마가 와서 중국 문자가 번역과 필수와 윤색으로 와전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체를 쓸어버리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다”고 논박했고, 백파는 “중국이 문자 의리만을 숭상하는 풍조를 비판하고 불립문자 직지인심으로 격외의 바른길을 보여 스스로 본래면목을 깨닫게 한 것이지 경전의 잘못을 쓸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중국에서 선종이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인식의 차이이다. 추사는 고증학적 지식으로 불전 한역 상의 문제점을 알고 이를 내세워 달마선이 교학을 부정하고 선을 주장했다고 보는 것이고, 백파는 달마가 문자를 숭상하는 풍조를 깨뜨리기 위해 직지인심의 선을 내세웠다고 보는 것이다. 화두에 대한 추사의 공박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추사가 “화두는 조주(趙州)의 화(話)로써 화두를 삼지만 조주가 어찌 사람에게 화두를 가르쳤는가, 송대 이후 행해진 화두를 가지고 사람 가르치는 것은 말법시대의 거친 자들이 제멋대로 쓰는 것일 뿐”이라고 논박하자, 백파는 “화(話)에는 설화문(說話門)과 간화문(看話門)이 있는데 설화문은 팔만 장경의 부처 말씀과 1,700칙 선화(禪話)와 일체제법이 불법을 밝게 아는 해(解)이고 간화문은 스스로 마음 가운데 지혜를 일으켜 회광반조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하는 행(行)이다. 이는 새의 양 날개와 같이 어느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추사는 당시 조선 불교의 근본 문제가 교는 내팽개쳐 두고 화두만 들고 제대로 수행도 못하고 있는데, 그 우두머리가 백파라고 보았다. 이에 백파는 팔만대장경이나 선종의 1,700 공안은 설화문인데, 이와 함께 자신의 마음에서 참구하는 간화문을 병행 실천해야 함을 강조했다. 백파가 흔히 간화선만을 주장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의 논변에서는 백파는 분명히 교학의 의의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교와 선의 병행이라는 기본 전제는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다. 다만 추사는 간화선 일변도의 수행 풍토를 부정하려다 보니 간화선을 폐지해야 할 것처럼 주장했고, 백파는 간화선을 정점에 놓고 교학의 의의도 부정하지 않는다고 보았을 뿐이다.
교선일치와 조사선 제일주의
추사는 초의와 이에 대해 깊은 의견을 나누었고, 백파는 그간 불교와 유교의 같고 다름을 토론하던 사이인 홍재혁(洪再爀)에게 이 왕복 서간을 보내 살펴 달라고 요청했다. 추사와 백파는 각기 다른 유불의 상대에게 자문을 구하면서까지 상호 논변에 열중했다. 또 남아있는 「백파께(與白坡)」 1 원본은 추사가 2차 교정을 거친 치밀한 논리로 구조화한 논박 서간을 보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추사의 논박 글에 모두 등장하는 주제는 화두(話頭)이다. 추사는 당시 불교계의 가장 큰 병폐가 화두에만 천착하는 간화선 풍조에 있다고 보고, 이를 벗어나는 것만이 새 방책임을 역설했다. 그래서 추사는 간화선을 대성한 대혜야말로 조선 불교를 망치는 수괴라고 극언을 퍼붓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백파는 평생 선종계의 종장으로서 화두를 들고 수행해 온 자신감에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백파는 화두가 불교의 상승 수행임을 천명하고 제 논쟁점에 대해 거듭 반박했다.
두 사람의 논변은 서로가 자신의 관점을 철저하게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논제를 비판한 것이었다. 초의가 추사의 의견에 동감했지만, 초의 역시 선의 중요성을 내칠 정도는 아니었다. 추사는 초의와는 차를 매개로 따뜻한 관계를 지속했고, 백파와는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으나 그 바탕은 깊은 우의가 받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추사는 백파가 입적하자 그 비문을 손수 짓고 써서 명작을 남겼다. 여기서 추사는 백파가 평생 힘쓴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은 팔만 대장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서, 둘의 논변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공격하는 주장이 아니고 그 진실은 둘만이 안다고 회고했다.
추사는 화두에 천착하여 스스로 깨달음이 없는 선문을 맹공했다. 그래서 추사는 화두 구도를 떨쳐버리고 기본 경전을 익힐 것을 누차 강조하며, 선과 교학을 아우르는 교선일치의 관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불교계는 교학이 융성하는 가운데도 여전히 조사선풍이 더욱 중시되는 경향을 지속하면서 추사의 바람을 수용하지 못했다.
사진. 정병삼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명예교수. 간송미술관 수석연구원, 문화재청 사적분과 문화재위원, 한국의 전통산사 세계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 『나는 오늘 사찰에 간다』, 『일연과 삼국유사』, 『한국 불교사』 등을 집필했으며, 한국 불교사와 한국 문화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