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연행이 가지는 의미
청년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꿈에도 그리던 북경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린 것은 1809년 12월 24일이었다. 동지부사인 생부 김노경의 자제군관으로 사행하러 간 것이다. 연행(燕行, 북경 체험) 노정 중 40일간의 북경 일정을 마치고 조선을 향해 말에 오른 것은 다음 해 2월 3일이었다. 김정희는 자신의 학예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말에 올랐을 것이다. 북경 학계의 거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 두 경사(經師)와의 만남은 김정희와 19세기 조선문화에 무엇을 남겼는가?
24세 청년 김정희가 맞이한 겨울 한복판, 그는 연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대선배 연암 박지원이 ‘호곡장(好哭場, 울기 좋은 곳)’이라고 노래한 요동들판을 두고 시 「요동들판(遼野)」을 읊었다.
“천추의 커다란 울음터라니 재미난 그 비유 신묘도 하여라(千秋大哭場, 戲喩仍妙詮).”
청년 김정희의 새로운 학문에 대한 포부와 기대는 일거에 선배 연암과 북학파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흔히 북학파라 불리는 이들은 18세기 후반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시작으로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박제가(朴齊家, 1750~1805)를 손꼽을 수 있다. 연행이 18세기 후반 새로운 문화 창구로 주목받으며, 이제 이들의 뒤를 이어 김정희는 연행을 통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대표되는 새로운 학예(學藝)의 길을 열었다.
아마도 그 출발점은 추사의 연행을 통한 고증학의 자기화, 조선화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고 하겠다.
근대 문장가 변영만(1889~1954)은 “우리나라의 문장은 연암에게서 망했고, 시는 자하에게서 망했고, 글씨는 추사에게서 망했다”고 간명하게 표현한 바 있다. 18~19세기 세 명의 뛰어난 성취가 후학들이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희의 삶에서 20대 초중반 40일간의 북경 체험은 무엇이었으며, 그의 삶에 남긴 자취는 무엇이고, 거기서 제기된 과제를 어떻게 뛰어넘었는가.
완원과 만남 그리고 조선 금석학 연구
북경 체험을 통한 고증학의 조선적 수용은 추사에게 서예사와 필법 연구를 통한 추사체 창출과 조선 금석학 연구의 빛나는 성과로 남았다. ‘내 글씨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진 예술가형의 인간 김정희. 그는 남북으로 두 번의 유배를 다녀오고 정치적인 부침과 굴곡을 경험하면서 결국, 자신의 길을 갈고 닦아 예술로 승화했으며, 그것이 추사체이자 추사 금석학이라 하겠다.
운대(雲臺) 완원은 연경의 내로라 하던 학자로 청조문화 완성의 절대적 공로자이기도 했다. 『황청경해(黃淸經解)』는 청대 학자 79명이 쓴 188종, 1408권에 달하는 총서이다. 청대 고증학의 정수로 평가되는 『황청경해』의 편집자가 바로 완원이었다. 1829년 이 총서가 완성되자, 3년 후 추사에게 전해졌다. 김정희의 당호 완당(阮堂)은 완원을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은 김정희의 대표적인 당호로 사용됐다.
완원은 본래 강남의 항주(杭州)에 있었는데, 때마침 일이 있어 연경에 올라와 후실(後室)인 공씨(孔氏) 집안의 저택[衍聖公邸]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완원은 일찍부터 조선 학자에 호감이 있었다. 유득공이 박제가와 함께 연경에 갔을 때 완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유득공은 43세, 완원은 27세였다.
1810년 추사는 연성공저에 있는 완원의 서재 태화쌍비지관(泰和雙碑之館)으로 완원을 찾아간다. 당시 완원은 47세, 추사는 25세의 나이였다. 추사가 완원을 찾아갔을 때 완원은 대번에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신발마저 거꾸로 신고 나와 반겼다고 한다.
완원은 추사에게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를 대접하면서 그의 총기와 학식에 놀라고 진지한 학구열에 감탄한다. 그래서 자신의 경학관이나 예술관, 금석고증의 방법론 등을 자세히 얘기하게 되고 추사는 그 해박한 지식과 신예한 관점에 놀라고 감동했다. 완원은 그가 아끼던 당(唐) 정관연간(貞觀年間)에 만든 동비(銅碑)와 남송 우문 구장 송각 『문선(文選)』 같은 진귀품을 비롯하여 태산비(泰山碑)와 화산비(華山碑)의 원탁본 등을 보여주며 두 개의 비 탁모본과 자신의 저서인 『경적찬고(經籍簒詁)』 106권, 『연경실문집(揅經室文集)』 제6권,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疎校勘記)』 245권 등을 건넸다.
『황청경해』의 핵심은 무엇인가? 「경설합벽」에서 완원은 『황청경해』를 한마디로 “평범하면서도 알차고, 정밀하면서도 상세하다(平實精詳, 一部經解之要魚也)”라고 요약했다. 완원은 실사구시론을 통한 학적 방법론의 자기화와 북비납첩론(北碑南帖論)을 통해 서예사를 정립했으며, 이는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청대 고증학과 추사의 실사구시학이 이룩한 성과를 오늘날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서 잠시 근대라는 시기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은 가설이 검증된 것을 말한다. 검증되지 않은 것을 믿는 것은 미신이며, 이를 추종하는 것은 맹신이다. 18~19세기 근대 이전의 마지막 시기에 이룩한 학술적 성과는 이러한 근대의 과학에 육박하는 고증이며 동시에 당대에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 해석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의 근대에 육박한 수준의 학술을 구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옹방강과 만남 그리고 고증학 방법론의 수용
연경에 머물던 김정희는 그동안 친교를 맺은 옹방강의 문인 서송(徐松)의 소개로 옹방강과 만남에 성공한다. 서송이 김정희에게 면회 허락을 알린 서찰을 보면 구체적인 만남을 적고 있다. “옹담계 선생께서 한번 보실 수는 있다고 하시나 다만 묘각(卯刻, 5~7시)으로 시간을 정하시니 내일 아침 일찍 와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로써 1810년 정월 29일, 옹방강의 석묵서루(石墨書樓)에서 78세의 옹방강과 25세의 김정희가 마주 앉아 붓으로써 이야기를 나눴다. 필담서에 의하면, 김정희는 옹방강에게 보담재(寶覃齋,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와 유당(酉堂, 김노경의 당호)이라는 큰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고, 경학과 학문적인 의문점에 대한 지도를 청했다. 옹방강은 필담을 나누며 영민한 청년 김정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원적(原籍)과 탁본 등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경사(經師)로서 지도했다.
추사가 연경을 다녀온 후 옹방강은 스승으로서 김정희에게 4통의 긴 편지로 경학을 지도하게 된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옹방강이 보낸 4통의 편지로 김정희는 경학(經學)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정희는 옹방강이 두 번째로 보낸 1,800자에 달하는 긴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자 표구한 다음 16자를 공손히 써서 덧붙였는데 그 글은 아래와 같다.
핵실재서(覈實在書)
사실을 밝히는 일은 책 속에 있으나
궁리재심(窮理在心)
이치를 궁구하는 일은 마음에 있네.
고고증금(攷古證今)
옛일을 고찰해 새것을 고증하는 것은
산해숭심(山海崇深)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네.
조선 금석학 연구와 추사체 창출
그렇다면, 청조 고증학과의 만남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연행 6년 후 31세 때 김정희가 저술한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연행을 어떻게 소화했으며, 조선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보여준 논고이다. 이는 경전 해석에서 송학(宋學)의 의리론과 함께 한학(漢學)의 훈고적 방법론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한송절충론의 견해에서 저술한 것이다.
실사구시는 실제 일에 있어서 옳음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실사구시는 한송절충론의 학문방법론으로 실천할 것을 주장한 논설이다. 하학(下學)과 상달(上達), 그리고 박학(博學)과 독행(篤行)을 강조했다. 그는 마지막에, “널리 배우고 힘있게 실천하면서 ‘실제 있는 일에서 옳음을 구한다(實事求是)’는 한마디 말만을 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런 점에서 실사구시설은 특별난 논설이 아니고, 어쩌면 오래된 미래이자, 고전에 대한 김정희의 재해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증학의 수용은 구체적으로 조선 금석학의 연구와 추사체의 창출로 나타났다. 조선 금석학에 대한 김정희의 연구결과는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해동비고(海東碑攷)』이다. 특히 『해동비고』는 진흥왕순수비(북한산비와 황초령비) 이외에 평백제비, 당유인원비, 경주 문무왕비 등 7편의 금석문을 분석하고 고증한 결과이다. 김정희는 연행 이후 20대 후반부터 조선 금석학 연구에 몰두했고, 현장을 찾았으며 그에 대한 논설을 남기고 있다. 고고학자 도유호(1905~1982)는 한국 최초의 고고학 개설서 『조선원시고고학』에서 “한국의 고고학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시작된다”고 썼다. 그만큼 김정희의 금석고증학은 당대를 넘어 현재까지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추사의 서예사에 대한 탐구와 스스로 미감에 맞는 글씨를 추구한 고증학의 결과가 곧 ‘추사체’이다. 추사체란 무엇인가? 추사 김정희가 쓴 것만이 추사체이다. 19세기 중엽 이미 추사풍의 글씨는 논자에 따라 완급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일세를 풍미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추사풍의 글씨가 추사체인가? 아니다. 김정희가 쓴 것만이 추사체이다. 추사체는 학문적으로 완성된 서체인가? 아니다. 완성된 서체란 다소 거칠게 정의하면, 이른바 폰트로 만들 수 있는 서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정희의 글씨는 서예사의 관점에서는 금석기가 강하고, 획의 크기와 유려한 굵기 변화가 심하며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한학자 임창순(1914~1999)은 “그의 작품은 점과 획의 운용이 강철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布置)에 대한 구상은 모두가 평범을 초월한 창의력이 넘친다. 그대로 현대회화와 공통되는 조형미를 갖추었으니 이는 과거의 어느 작가도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다”고 1981년에 썼다. 이같이 조선 금석학의 연구와 서예사의 연구를 통한 자신의 서체로 그는 남아있다.
허홍범
과천시 추사박물관 학예연구사. 경희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경기문화재단 실학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10년간 생활사 강의를 했고, 지역사 분야 중 고문헌 조사와 지역문화에 관심이 많다.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실천한 추사 김정희 선생과 함께 노닐기 15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