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옹주와 정순왕후
영조 8년(1732) 11월, 조선 왕실에 큰 경사가 생겼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혼인하게 된 것이다. 영조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로 맞는 자식의 결혼이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연잉군 시절, 정실부인이었던 서씨에게서는 아이가 없었고, 첩실이었던 이씨에게서만 1남 2녀가 있었다. 첫 딸은 일찍 죽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실부인 서씨는 정성왕후가 되었지만, 첩실 이씨는 영조 즉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정빈 이씨로 봉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정빈 이씨 소생인 효장세자도 영조 4년(1728)에 죽었기 때문에 영조가 잠저(즉위 전 거주하던 사저)에 살 때 낳은 자식은 화순옹주 한 명만 남게 되었다. 화순옹주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 때 오빠인 효장세자도 죽어 외롭게 성장했다. 자연히 화순옹주를 향한 영조의 사랑은 애틋하고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윗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 영조는 품행이 방정하다(바르고 점잖다)고 알려진 김한신(1720~1758)을 사위로 맞았다. 김한신은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경주 김씨 문중 김흥경의 넷째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도 준수했는데 결혼 후에도 항상 겸손하고 검소한 데다 시문에도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월성위(月城尉)로 봉해졌으며, 영조는 이 부부를 위해 통의동에 집을 마련해줬고, 사람들은 월성위궁이라고 불렀다. 정원에는 백송이 한 그루 있었다. 예산 내포 지역에 땅을 하사하고 집도 한 채 지어 주었다. 바로 널리 알려진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 부조해 53칸짜리 저택으로 지었다. 한양의 장인들을 불러 지었기에 안채는 충청도 지방에서 흔하지 않은 ‘ㅁ’자 형태로 지어졌다. 지금은 ‘ㄱ’자 형태의 사랑채와 안채, 추사영당, 대문만 남아있지만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담장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려는 영조의 사위 부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실의 사위는 명예직 외 관직에는 나아갈 수 없는 제도가 있었기에, 땅도 집도 하사한 셈이다. 추사도 이 집에서 태어났고 그의 이름이 일세를 풍미했기에 추사고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김한신은 자손도 없이 39세에 병으로 요절했다. 화순옹주의 억장도 무너졌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오빠를 잃고 13세 때 동갑이던 김한신과 결혼해 아이도 없이 26년을 의지해 살아왔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하고 일주일을 굶자 영조가 찾아와 먹을 것을 명했다. 화순옹주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음식을 입에 넣기는 했지만, 곧 토해냈다. 영조는 딸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쓸쓸히 돌아갔고, 화순옹주는 14일 만에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조선 왕실 유일의 열녀였다.
신하들이 열녀문 내려주기를 청했지만, 영조는 ‘아비의 말을 듣지 않았고 아버지가 딸의 열녀문을 세울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결국, 정조대에 이르러 열녀문이 내려졌고 이 열녀문은 지금 김한신 부부 합장묘 재실 대문 앞에 세워져 있다.
두 부부가 죽은 다음 해인 1759년 6월, 영조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두 번째 왕비를 맞게 된다. 첫 번째 정비인 정성왕후가 먼저 죽어 삼년상이 끝났기 때문이다. 당시 영조의 나이 66세, 새로 맞은 정순왕후의 나이는 15세였다. 나이 차이는 무려 51세. 영조는 후궁 중에서 정비를 뽑지 않고 궁궐 밖에서 왕비를 간택했다. 숙종(영조의 아버지)이 후궁들 싸움으로 조정이 시끄러웠던 일을 경계해 후궁이 왕비가 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아버린 탓이다.
이처럼 영조 재위 시절에 왕실과 두 번의 혼인을 맺으며 막강한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 세력이 된 경주 김씨 문중은 어디에 근거지를 둔 집안일까? 경주 김씨 문중은 대개 신라 경순왕의 자손들로 그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전국으로 분파돼 나갔다. 추사에게 증조부가 되는 김한신은 원래 해미 한다리 경주 김씨 문중 출신이다. 서산에서 해미로 가려면 용두천에 놓인 큰 다리를 건어야 했고 이를 ‘한다리’라고 불렀다. 인근에 경주 김씨 동적 마을이 있어 ‘한다리 경주 김씨’라고 불린다.
이 문중의 선조는 상촌 김자수(1351~1413)로 경주 김씨 태사공파 후손이며, 안동이 오랜 세거지(世居地, 대대로 사는 고장)였다.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 건국 후 안동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태조가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상경하다가 정몽주묘 인근에서 자결하였다 한다. 고려 충신을 모시는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사림파로 있다가 차츰 출사하게 되었으며 1세기 중반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한 탓에 분묘도 경기도 광주, 시흥, 고양에 흩어져 있다.
김자수의 6세손 김연(1494~?)은 무과 출신으로 지리학에 밝아 서산 한다리에 정착,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가 되었다. 김연의 손자 김적(1564~1646) 때에는 집안의 비축 곡식이 수천 석에 이를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 김적은 네 아들을 뒀는데, 막내 학주 김홍욱(1602~1654)의 후손들이 가문을 크게 일으켜 정승 8명과 왕비 1명을 배출하게 되니 처음으로 영의정에 오른 이가 바로 김한신의 부친 김흥경이다. 추사도 바로 이 가계의 후손이다.
곧 김한신과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는 8촌 형제간이고, 정순왕후는 추사에게 집안 할머니뻘이 된다. 사대부 가문으로서의 위상이나 왕실과의 혼맥, 선대로부터 내려온 뛰어난 자질로 추사는 아무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타고난 금수저였던 셈이다.
내포와 추사고택
추사고택은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내포 지역 중심부인데, 내포는 보통 바닷물이 내륙 쪽으로 쑥 들어간 지형을 말한다. 그러나 내포 지역이라고 하면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됐다.
지리적으로 보면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한 금강 북쪽의 정맥인 금북정맥이 남진하며 서운산, 성거산, 광덕산을 거쳐 백월산에 이르고 다시 북서진하면서 용봉산, 덕숭산, 가야산을 세운다. 이렇게 반원을 그리며 산줄기로 둘러싸인 너른 들녘 한가운데로는 보령 오서산 북쪽에서 발원한 삽교천이 꿰뚫고 지나가 아산만에 이른다.
내포평야나 예당평야라고 부르는 이곳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도 병화가 들지 않았고, 들과 바다가 있어 산물도 넉넉한 고장이다. 예산, 신창, 홍성, 덕산, 당진과 가야산 서쪽의 해미, 서산, 태안을 보통 내포 지역에 넣는다. 이 지역에는 예안 이씨, 해주 오씨, 신안 주씨, 신평 유씨 등 수많은 동족 마을이 흩어져 있다. 해미 한다리 경주 김씨 세거지도 이런 지리적 환경 속에서 터를 잡았다.
그러나 한양에서 한다리로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배를 타고 삽교천으로 들어오면 가야산을 넘어야 하고 당진으로 우회하면 긴 육로를 통과해야만 했다. 반면에 추사고택에서 가까운 예림리 삽교천 나루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다 백석포를 거쳐 지금 아산만 방조제 북쪽에 있었던 계두진 나루나 당포진 나루로 건너가면 포승, 발안을 거쳐 수원까지는 90리 육로였다. 아산 및 내포 지역 백성들은 이 길을 주로 이용했고, 추사 집안의 사람들도 이 길로 한양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또 내포 평야의 곡식과 산물은 삽교천 포구에서 배에 싣고 아산만을 지나 마산포를 거쳐 강화해협을 통과하면 바로 한강으로 진입해 마포나 용산 나루로 갈 수 있었다. 한양으로 가는 직송 해상로였다. 이런 이유로 웬만한 사대부들은 다 내포 지역에 사유한 토지들을 가지고 있었고, 영조도 사위 부부에게 집과 농토를 하사한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김한신이 자식도 없이 일찍 죽자 맏형 김한정의 3남 김이주가 가계를 잇고 봉사손(奉祀孫,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이 되었다. 김이주는 네 아들을 뒀는데 맏아들 김노영이 또 자식이 없어 막내아들 김노경의 큰아들 추사 김정희가 김노영 앞으로 출계(出繼, 양자로 들어가 그 집의 대를 이음)하여 대를 이었다. 물론 추사고택도 한양 월성위궁도 물려받았지만, 제주도로 유배당한 후 살림이 어려웠던 탓인지 월성위궁은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정조가 별안간 붕어(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후 정순왕비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하면서 한다리 경주 김씨 문중은 여전히 유력가문으로 조정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정순왕비도 불과 5년 뒤인 1805년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자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차츰 외척세력을 확대하여 안동 김씨 문중은 세도 가문으로 성장한다. 서서히 경주 김씨 문중을 적대시하고 밀어내면서 결국, 추사의 부친 김노경이 고금도로 유배됐다. 훗날 추사도 제주도로 유배길을 떠나면서 경주 김씨 문중은 조정의 중심 세력에서 멀어지게 된다.
문중사찰 화암사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제자 계로가 공자에게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대답한다. 공자의 말씀대로 유교는 사후관이나 내세관에 집중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렇지만 모든 종교는 대개 내세관이 있다. 고대 이집트에도 사후세계가 있고, 선사시대 유물에도 그런 흔적이 있다. 불교에도 극락과 지옥이 있고 기독교나 이슬람교에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
신라나 고려의 왕실에서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원찰(願刹)을 지었다. 초상화인 진영을 모신 건물 중심으로 사찰을 세우면 원당(願堂)이라고도 불렀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힘 있는 귀족들이 원찰을 세우기도 했는데, 충렬왕 때 조인규가 세운 과천의 청계사가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는 중심부에서 밀려났지만, 이런 풍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왕릉이 조영(造營, 집이나 건물 따위를 짓거나 세움)되면 선왕의 명복을 빌고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을 그 인근에 두었고, 이를 능침사(陵寢寺)라고 불렀다. 광릉 봉선사, 영릉 신륵사, 선정릉 봉은사, 정릉 흥천사가 다 능침 사찰들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사찰들을 조포사(造泡寺)라고도 불렀다.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으로 품격을 낮춰 부른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이 풍습을 다 버리지는 못했다. 왕실이든 민간이든 선조를 좋은 세상으로 보내고 싶은 후손의 마음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상이 돌아가시면 명복을 빌고자 묘소 근처에 조그만 절을 지었다. 이를 ‘분암(墳庵)’이라고 했다. ‘묘소 근처에 지은 암자’라는 뜻으로 묘소를 지키고 선조들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재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절이다. 당연히 스님이 머물렀고 문중이 관리했다. 원찰, 원당이 주로 왕실 관련 사찰이었고 문중에서 지은 절은 공식적인 사찰이 아니었기에 ‘분암’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 분암이 전국적으로 조성됐는데 파주 성재암(파평 윤씨)과 오봉암(함안 조씨), 청송 보광사(청송 심씨), 논산 영사암(광산 김씨), 봉화 구가암(진성 이씨) 등이 다 문중 선영 근처에 건립된 분암들이었다. 성재암, 오봉암(현재 오봉사), 보광사는 지금도 사찰로서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영조의 사위 김한신도 부친 김흥경이 죽자 부친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고자 영조 28년(1752) 묘소 인근 오석산 병풍바위 옛 절터에 절을 중창하였다. 이 절이 바로 화암사다. 당시 사대부 문중의 풍습을 따라 절을 세운 것이지 사대부가 불교 수행을 위해 세운 것은 아니었다. 원래 병풍바위 앞에 있었던 석탑은 지금 화암사 대웅전 오른쪽에 옮겨져 있는데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절이 있었던 듯하나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문중에서 지은 절은 보통 여염집(보통 백성의 살림집) 형식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화암사도 마찬가지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ㄱ’자 사랑채처럼 오른쪽으로 누마루가 튀어나와 있고 왼쪽 두 번째 칸에 대문을 설치해 절 마당으로 진입하게 돼 있다. 곧 안채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당에 들어서면 계단 위로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약사전이 있다. 화암사는 월성위 가문의 분암으로서 내려오다가 추사 때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추사가 불교를 깊이 궁구하고 노년에는 불교에 크게 의지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추사는 고증학, 훈고학, 실학, 금석학, 불교학, 서화론 등 모든 학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추사를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 ‘해동유마거사(海東維摩居士)’라고 부르는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다.
화암사는 추사의 정진처가 됐다. 조상의 명복을 빌던 단순한 기도처에서 불교를 궁구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수행처가 된 것이다. 그런 추사의 생각들이 법당 뒤 병풍바위에 남아있다. 병풍바위 오른쪽 끝에는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라는 추사의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추사가 옹방강을 만났던 서재의 이름이 보소재(寶蘇齋)였다. ‘소동파를 보배롭게 받드는 집’이라는 뜻이다. 안에는 소동파의 초상화가 걸렸고, 좌우에 옹방강이 직접 쓴 대련이 있다.
‘想見東坡舊居士(상견동파구거사),
儼然天竺古先生(엄연천축고선생).’
동파에 (살던) 옛 거사를 떠올려 보니,
엄연히 천축(인도)의 옛 선생이네.
소동파는 황주에서 귀양살이할 때 손수 개간한 동쪽 언덕을 동파(東坡)라고 했고, 스스로 동파거사라 했다. 소동파를 생각하니 인도의 옛 선생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다. 추사는 이 글귀를 생각하고 ‘천축고선생댁’이라고 썼으니, 인도의 옛 선생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집이라는 의미와 소동파처럼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는 학덕을 갖추겠다는 의미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병풍바위 왼쪽에는 ‘詩境(시경)’이라는 각자가 있다. 이 빼어난 글씨는 원래 육방옹의 글씨인데, 옹방강이 탁본해 뒀다가 추사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시의 경계’, ‘시를 읊을 만한 풍취’를 뜻하는데 추사가 품은 뜻은 스승 옹방강을 잊지 않고 시문에도 능하고 글씨에도 능한 인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결국, 병풍바위에 새겨진 각자의 의미를 종합하면 스승 옹방강을 잊지 않으며 옹방강이 소동파를 흠모하듯이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추사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시와 글에도 뛰어나고 글씨에서도 기필코 대성하겠다는 결의도 피력한 셈이다. 병풍바위를 바라보며 필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병풍바위에서 남쪽으로 400m 떨어진 쉰질바위에도 ‘小蓬萊(소봉래)’라는 각자가 있다. 아래쪽에 ‘秋史題(추사제)’라는 작은 글씨도 있는데, 스승 옹방강의 집 앞 석순(石筍, 돌기둥)에 ‘蓬萊’라는 각자가 있었기에 추사는 몸을 낮춰 ‘소봉래’라고 각자를 남긴 것이다.
추사에게 화암사는 학문에 열중하던 시기의 수행처이자 공부처였다. 추사가 안동 김씨 세도가문에 밀려 제주도로 유배 갔을 때 김한신이 중건한 화암사는 몹시 쇠락해졌다. 유배 중에도 추사는 동생들과 화암사를 중건하고 ‘화암사중수상량문’을 지어 보냈다. ‘詩境樓(시경루)’, ‘無量壽閣(무량수각)’ 현판 글씨도 써 보냈다. 1846년, 추사 61세 때의 일이다.
사진. 유동영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