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연등회가 전면 취소됐다. 1961년 4·19혁명 그리고 1970년과 1980년 계엄령 발령이라는 정치적인 이유였지만, 자발적 취소 결정은 처음이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대승적 결정이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심사한 2020년, 연등회보존위원회는 국민을 선택했다.
2021년은? 대폭 축소했지만 1m 간격을 유지한 채 코로나19 고통의 치유와 희망의 등을 밝히고 행렬을 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온택트(Ontact) 연등회’를 새겼다. 줌(ZOOM)과 유튜브 실시간 중계로 ‘언택트(Untact)’에 온라인을 통한 외부와의 ‘연결(On)’을 더한 연등회의 탄생이기도 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주년, 연등회는 새로운 개념으로 한 단계 나아간 셈이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연등회보존위원회
역사의 한 페이지 한 귀퉁이에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연등회보존위원회다. ‘온택트 연등회’ 준비를 위해 분주했다. 참가단체 실무자들도 주인공으로 참여한 5월 11일 회의에서 ‘온택트 연등회’ 예행연습으로 만반의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다. 참가단체 실무자의 적극성 덕에 5월 15일 온라인으로 진행한 연등회에는 60여 개 단체가 ‘줌’을 활용해 연희와 율동으로 신명을 더했다. 연등회보존위원회는 무대에서 주연인 이들이 빛나도록 조연을 자처했다. 이거다. 유네스코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연등회를 등재한 또 다른 이유, 연등회보존위원회다. 유네스코는 결정문에서 특별히 연등회보존위원회를 기록했다.
“연등회는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정부와 참여 공동체에 의해 보호가 촉진되어 왔다. 이러한 면에서 연등회보존위원회의 역할은 특별히 언급될 가치가 있다. 체계적인 교육, 연구, 기록화와 함께 다양한 연구기관이 연등회의 진흥과 보호 활동을 전개해왔다.”
맞다. 연등회보존위원회의 역할이다. 과거 봉축기획단이라는 이름의 연등회보존위원회는 ‘봉축’이란 단어가 들어간 모든 문서를 수배했다. 조계종에 중앙기록관이 생기자 문서고와 각 부서의 먼지 쌓인 상자에 담긴 서류들을 전산화했고, 연등회보존위원회는 연등회 관련 기록을 목록화했다. 1980년대 이후는 실무자들과 참가단체들이 직접 경험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까지 기록도 서류에서 찾았지만, 그보다 앞선 근대의 기록이 필요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896년 개항기부터 1945년 광복 당시까지 불교계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료가 출간됐다. 1999년 선우도량에서 펴낸 『신문으로 본 한국불교근현대사』다.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 때부터 1945년 8월 「매일신보」 종간 때까지 「독립신문」·「제국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상해판 독립신문」의 불교 관련 기사 4,184건을 연대순으로 엮었다. 박상희 전문위원 표현을 조금 각색하면 가뭄에 단비 같은 일이었다.
연등회 관련 기록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았고, 연도별로 퍼즐 맞추듯 흩어졌던 조각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1907년 명진학교(현재 동국대)에서 봉축 행사가 있었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800페이지에 가까운 자료를 집대성했다. 그렇게 1907년부터 2007년까지 자료를 정리한 『초파일 행사 100년 – 연등축제를 중심으로』를 2008년에 발간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동화 『새봄이의 연등회』, 『천년을 이어온 빛 연등회』, 『연등회의 종합적 고찰』 등 연등회를 알리는 다양한 서적을 출간해왔다.
[인터뷰] 연등회 빅마마 박상희 전문위원
2년 전인 2019년 11월 한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삶 자체가 오직 연등회로 물든 사람이었다. 오직 연등회 기획과 실무로 30년 외길을 걸어온 종무원 박상희의 정년퇴임이었다. 퇴임식에서는 평생을 헌신한 공덕으로 연등회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는 감사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까지 함께 하자는 응원이 쏟아졌다.
그는 연등회 실무로만 30여 년을 봉직했다. 여의도 제등행렬에서 동대문 운동장의 흥겨운 축제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 연등회로, 202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바뀌는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서울 지역 불교청년단체협의회 총무였던 1989년 여의도 제등행렬 때부터 실무자로 참여, 1996년 봉축기획단이 상설된 후 현재 연등회보존위원회까지 연등축제와 연등행렬 등 많은 역할을 소화해왔다.
그는 정년퇴임 후 현재 고문과 자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연등회 빅마마’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삶 is 연등회’가 돼 버린 그에게 연등회의 의미는 뭘까? 재미있고 수행이기도 한 일을 찾은 것만으로도 행복하단다.
“참가자들이 연등회의 중심이자 주인공이에요.
저는 그들이 신나고 즐거울 수 있는 날을 만들려고 굉장히 노력하죠. 주인인 이들을 잘 받쳐주는 게 제 역할입니다.”
전통과 축제 두 손에 쥐다
“자료가 정리되니 이를 토대로 기술을 축적하고, 다음으로 연구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연등회가 끝나도 전통등 제작이나 복원 등 연구와 교육을 이어가게 됐다.”(박상희 연등회보존위원회 전문위원)
연등회보존위원회는 연등회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업무를 전담한다. 연등 제작(전통등 장엄), 관불(관불 및 지화장엄), 연등행렬(연등행렬 선두위장 장엄) 등 세 가지를 전승 종목으로 지정했다. 이를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기록화 및 교육을 전개한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집마다 자녀 수만큼 대나무 장대를 이용해 등을 달았다는 등간(燈竿). 이 기록을 바탕으로 등간 복원과 연구를 하고 있으며, 전통등 제작과 보급 그리고 세대 전승을 위해서는 연등회의 주인공인 참가자를 대상으로 2000년부터 전통등 강습회 교육을 진행 중이다. 또 행렬등과 장엄등 정기 교육을 비롯해 지역과 계층의 등 보급을 위한 강습, 전승전통등 경연대회를 열고 있다.
LA 등 해외에서도 외국인을 대상으로 등 강습을 진행해 호평을 받았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대학생에게 전통등 강습을 여는 등 다음 세대에게 전통등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전통을 복원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은 공동체적인 요소와 결합하는데, 바로 연등공방이다. 연등공방은 연등회 참가자들이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협력하면서 직접 행렬등과 장엄등을 만드는 화합의 장이다. 해마다 연등회에 등장하는 새롭고 독창적인 등은 연등공방의 힘이다. 연등회보존위원회가 공을 들여 참가단체에 연등공방 운영을 독려하는 이유다. 여기에 온라인 강의, 교육 교재 개발, 등 제작 키트는 물론 기념품까지 제작해 누구나 쉽게 전통등 문화를 접하도록 대중화에 힘쓴다. “즐거울 수 있는 뭔가를 만들자.” 1996년 동대문 운동장으로 행사장을 옮기면서 청년 실무자들이 낸 의견이다. 이 제안은 연등회보존위원회가 상설기구가 되면서 실행되기 시작했다. 전통등 문화에 연희라는 축제 요소가 더해진 시점이다. 그런데 동대문 운동장은 한 곳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입체적으로 설계되어, 참가자 간 거리를 좁히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실험적인 시도를 거듭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공연, 김덕수패 사물놀이, 연예인의 공연…. 하지만 정작 연등회 참가자들은 같이 놀지 못하고 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함께 할 거리를 찾았다. 연희단을 구성했고, 율동과 노래를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각 소속 단체에서 몇 달을 준비해 율동과 노래를 익혔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연희단의 신명 나는 율동과 노래를 다 같이 즐기며 함께 율동하고 노래했다. 연등회의 축제는 여기서 발화했다.
[인터뷰] 장엄등 제작 전영일 공방 대표
매년 부처님오신날 즈음을 앞두고 서울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에는 커다란 봉축장엄등이 불을 밝힌다. 이맘때면 모든 언론이 밝게 빛나는 장엄등을 촬영, 사진과 영상으로 전하면서 대중에게 부처님오신날 봉축 분위기와 연등회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그래서 카메라 세례를 받는 장엄등을 만드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연등회의 주요 작품들을 만든 이는 전영일 작가다. 전통등이란 분야는 불교적, 민속적으로 계승 발전되어야 하는 민족의 문화예술에 가깝다. 연구와 교육, 창작과 전시에 이르는 광범위한 작업이 필요하기에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현실. 이것이 연등회와 함께 오랫동안 장엄등을 제작한 그가 정성을 다하는 이유다.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는 1998년부터 연등회에 뛰어들었다. 등의 제작은 구상하고 뼈대 만들고, 용접하고, 배접하고, 채색하고, 전기 설치까지 하는 종합예술이자 손이 많이 가는 고된 노동이다. 그는 어떤 등을 만들든지 최선을 다한다. 작가는 작업으로 말하기 때문이란다. 전통등 작업은 그의 인생 전체와도 같다. 그는 연등의 배경이 되는 역사와 가치, 시대적 사명감을 공부했으며 불교와 민속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내세울 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 미륵사지석탑 장엄등 외에도 전통등 전업 작가 1세대로서 20~30여 차례 전통등 강습회를 열어 전통등 보급에 열성이다. 파리, 런던, 뉴욕 전시회에서 전통등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렸고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아쉬움이 없진 않다. 시대와 함께 흐르지 않는 전통은 고일 수밖에 없고 박제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전통등 계승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동시대의 사고와 조형언어로 연등회가 표현되길 바란다.
[인터뷰] 연등회 특급도우미 강문정 팀장
“2002년부터 했어요. 잠깐 도와달라는 말에 일을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한 분야에서 꾸준하게 매진한 이들의 대답은 싱겁다. 싱거운 만큼 담백하고 진솔하다. ‘연등회 특급도우미’ 강문정 연등회보존위원회 팀장 이야기다. 그 역시 연등회 관련 업무가 제일 좋아서 하는 일이다. 2002년부터 2021년까지 꼭 19번의 연등회(2020년엔 코로나19로 취소됐다)를 준비하고 치른 세월 동안 연등회 일을 향한 신념이나 마음이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단다.
팀장이니만큼 행정, 참여단체 조율 등 연등회 업무를 총괄한다. 특히 수많은 참가자와 단체들의 형편이나 불편함을 살펴 형평성 있게 조율하고, 단체들에 힘을 실어 연등회를 더 즐거운 축제로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게다가 연등회보존위원회가 하는 역할이 다양해 지면서 그의 업무 폭도 넓어졌다. 제등행렬에서 연등행렬로 명칭이 바뀌고, 동대문 운동장에서 동국대로 어울림마당 장소가 바뀔 때 형식을 정리하고 동선을 새로 짜고 관공서와 협의를 해야 했다. 국가무형문화재를 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까지 업무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아직 좀 아쉽다. 연등회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많이 달라졌지만, 일부 종교행사로만 인식하는 시선이 남아서다. 다른 해외 축제 역시 종교적 의례에서 축제로 발전했지만, 유독 연등회는 불교 행사로만 국한하는 시선들이 있다.
“시간이 좀 더 흘러야겠죠. 국내에서도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으로서, 축제로 온전히 받아들여 준다면 해외에서 연등회를 평가해주는 것보다 훨씬 뿌듯할 것 같아요.”
모였다 흩어졌다, 흩어졌다 모였다
연등회 업무만 담당하는 조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현재의 연등회보존위원회는 모였다 흩어졌다, 흩어졌다 모이는 임시 조직이었다. 부처님오신날을 2~3개월 앞두고 청년 단체 등 봉축행사 유관단체들에서 파견된 실무자들이 행사를 진행했다.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들은 당시 걷기에 집중됐던 연등회 문화를 바꿀 아이디어를 모아 조계종에 제안했고, 1996년 상설기구로 봉축기획단이 설립됐다. 1년 중 단 며칠뿐인 축제는 오랜 시간 준비가 필요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상설기구는 필수다. 봉축기획단은 행사기획단을 거쳐 2012년 연등회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면서 연등회 사무국으로 이름을 바꿨고, 2012년부터 축제의 공식 명칭도 연등회가 된다.
「연등회의 역사와 문화콘텐츠」에 따르면 “고려 시대 연등회 전통과 조선 시대 세시풍속인 관등놀이의 맥을 잇고 기존 연등행렬과 제반 축제 프로그램을 새로이 구성해 축제다운 축제로의 변화를 시도했다”고 평가했는데, 변화의 중심에는 200여 연등회 참가단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연등회보존위원회가 있다.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19는 나와 이웃을 위한 자비와 희망의 등을 밝히는 연등회를 주춤하게 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이 만드는 연등, 즉 법등(法燈)은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 연등회보존위원회 그리고 매년 등을 밝히는 우리가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