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10일.
이날은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행사기획단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에서 출판한 『초파일 행사 100년 - 연등축제를 중심으로』라는 책이 정식으로 발행된 날이다. 필자가 해당 책자가 나오기까지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100년 전 종이 냄새들을 맡아가며 정리작업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최초로 본 사람’이라는 연구자로서 자부심만 있었지, 이 작업이 인류무형문화유산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오래된 자료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골방에서 매일 맡아도 그때 심정은 참으로 간절하고 소박했다. 다 정리하면 이전 100년, 이후 100년도 계속 정리가 될 것이고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불사르고 불태운 연구자들과 ‘맨땅에 헤딩하듯’ 꺼지지 않는 불을 만들어 낸 ‘(당시 이름) 봉축위원회’가 바로 이 위대한 ‘빛의 연대기’의 연출 스텝들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연등 공양하는 그 순간의 빛
빛의 연대기, 바로 그 주인공을 찾아가는 짧은 여정을 시작해보자.
스스로 태워서 불을 밝히고 그 불을 부처님께 공양하는 연등(燃燈)의 기원이 바로 지금 연등회의 첫 모습이다. 요즘은 연등회라고 하면 대규모 행렬, 커다란 장엄등, 수많은 인파 그리고 현란하고 아름다운 불빛들을 가장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먼 옛날, 역사 속 연등회는 단 하나의 연등을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올리는 그 순간의 빛부터 연등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것이 바로 연등의 올바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역사를 거슬러 고대 동아시아까지 올라가 보자. 최초 연등회 자료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중국의 북위 시대 기록인 『위서』와 고승 법현의 인도 구법기 『법현전』에는 ‘연등’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2세기 후한이나 육조 시대에도 ‘연등’을 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 되면서 ‘연등 의례’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신라 경문왕 시대(9세기)가 되면 연등 의례가 이미 왕실과 일반 백성들에까지 널리 퍼져있었다는 기록도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8세기 신라 원성왕 때 신라 도시의 젊은 남녀가 탑도 돌고 등도 올리며 복을 빌었다는 기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면 부처님께 빌었던 그들의 소원들도 지금과 똑같이 간절하고 아름답고 다양했으리라.
불교가 크게 번성했던 통일신라 시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황룡사 대탑에서 펼쳐졌음 직한 연등 의례를 상상해보라. 그 장대한 불빛은 실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불교가 왕실과 백성 모두의 신앙이었던 고려 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국가신앙으로 불교를 숭상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다양한 불교 의례들을 제도화할 수 있었다. 왕실에서 제도화한 연등회라는 행사를 통해 왕실과 귀족들은 연등회를 연례행사로 확장했고, 자연스럽게 백성들도 연등회 행사를 함께 행하게 되었다. 왕실의 적극적인 장려로 연등회는 점점 더 발전했다. 초파일 연등회의 시작을 무신정권 시기 최우가 개최한 연등회(1245년 4월 초파일)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그보다 이전인 1166년 4월 초파일에 연등회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있으니 12세기 정도부터는 초파일 연등회가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다와 같이 넓게 퍼진 천 개 등불
불교가 국가종교였던 고려 시대 백성들에게 연등회는 어떤 의미였을까?
고려 시대 백성들에게 ‘연등’은 절 안에서만 행하는 의례가 아니라 생활 안에서 특별한 날 거행하는 특별한 ‘의례’로 자리매김했을 것으로 본다. 절 울타리 안에서만 등을 켜고 소원을 빌고 탑을 돌던, 그야말로 ‘성스러운 장소’에서만 할 수 있었던 ‘연등’ 의례는 이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과 오래된 전통이라는 힘으로 절 안과 밖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등을 달거나 등을 들고 절 안팎을 돌기도 하였다.
고려 학자 이규보가 쓴 「봉은사 연등도량문(奉恩寺 燃燈道場文)」을 보면 연등 전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한 묘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연등 전통은 처음 인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때 사람들은 등을 켜고 궁전 주위를 돌았습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이 전통을 따랐으며, 우리의 후손들도 연등회 개최의 공덕을 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옛 조상님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 상서로운 밤에 진실한 마음을 이 법회를 절에서 개최하오니 바다와 같이 넓게 퍼진 천 개의 등불은 온 세상을 비춥니다.”
이규보도 우리 선조(신라 사람들)들이 이 전통(연등 전통)을 따랐고 우리 후손들(21세기 지금의 우리)도 이 공덕을 지을 것이라고 한 부분을 다시 읽어 보자. 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짜릿한 문구인가! 그 상서로운 밤의 전통은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봄밤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국가적 종교정책으로 삼고 왕실의 지원이 줄어들자 대형 사찰에서 하는 다양한 불교 의례들도 점점 자취를 감추거나 소규모로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등 전통만은 달랐다. 『조선왕조실록』에 15세기 초부터 연등행사가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찰 안에서의 연등 행사와 전통은 용인했다. 또 1431년 9월에 명나라 환관의 요청으로 종이로 만든 700여 개 연등이 서울 거리에 설치되어 노등(路燈)이라고 불렸고, 1475년 4월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화재 위험이 있다며 집마다 연등 다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때도 연등 전통과 의례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개인 문집 등에서도 부처님오신날 연등 전통에 대한 기록이 있고 18세기 말 문신인 김매순의 『열양세시기』에는 1월 15일 중국 연등회와 4월 8일 조선 연등회는 모두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인도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적혀있다. 18세기 말 조선에서도 선조들의 전통 그대로 4월 8일을 기념하는 연등 행사를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와 부처님 세계 잇는 와이파이
우리 선조들에게 연등회라는 의례와 연등을 올리는 전통은 어떤 의미였을까?
연등에 불을 밝히는 그 순간이 바로 부처님이 내 앞에 현현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절 안에서도 절 밖에서도, 혹여 초파일에 사정이 생겨 절에 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 등만 켜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부처님과 불자와의 연결고리, 즉 나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잇는 와이파이가 바로 연등이었다.
근대에도 연등 전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외세의 침입과 간섭으로 의도치 않게 강제 근대화를 겪고 있었던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도 사월초파일이 되면 집집마다 연등을 켰고 부처님의 가피를 기다렸다. 민족 전통이 모두 말살된 일제강점기에는 불교 민족 자본이 세운 명진학교(현 동국대) 학생들이 전통을 계승했다. 물론 그때도 집집에 혹은 근처 사찰에 가면 연등을 켰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1912년 수송동 각황사의 연등행사는 하루에 2번, 낮과 밤에 걸쳐서 할 만큼 대규모였고 순사들이 거리 질서를 유지했다는 기사도 있다. 특히 당시 신문에 ‘종로에 사람이 가득했다’라고 했고 봉축행사 입장권도 팔았다고 하니 그 규모나 인파는 어마어마했으리라. 부처님오신날이 일제에 의해 양력으로 변경된 1937년에도 행사는 그대로 했으니 당시 일본인들도 우리 전통을 짓밟지는 못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광복 후에는 당연히 부처님이 제때 오셨고(음력 4.8) 6.25 한국전쟁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등 의식이 축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대규모 연등회가 실시된 것은 1955년이다. 서울에서는 조계사 등 큰 절을 중심으로 제등행렬을 하였고 지방의 큰 절에서도 불자들이 각자 만든 연등을 들고 부처님 가피를 받기 시작했다. 또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이 되고 1976년부터 여의도 제등행렬에 일반 불자들이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연등회는 규모와 형태가 전국적으로 확장됐다.
어떤 연등회가 당신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가? 지금은 없어진 여의도 광장이나 동대문 운동장일 수도 있고 동국대와 종로 거리일 수도 있다. 우리 동네 작은 절일 수도 있다.
필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연등회는 동네 사찰인 안흥사(회주 수현 스님)에 연등을 단 후 깜깜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분홍 연등을 들고 절을 돌던 기억이다. 작고 이쁜 사찰인 안흥사는 그날 밤에 연등 불빛이 참 고왔다. 1980년대 초 여름, 안흥사 어린이 여름불교학교에 온 동네 친구들을 다 이끌고 갔던 인연이 커져서 다음 해에는 여의도 제등행렬에 참가, 여의도에서 종로까지 걸어본 기억은 아직도 알 수 없는 뿌듯함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여의도에서 연등회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현재의 여의도 공원이 커다란 아스팔트 광장이었고 그 광장 전체를 빼곡하게 메운 불자들과 연등만 보더라도 불심이 절로 나올 정도였으니 40년 전 연등회의 규모를 짐작해볼 만하다.
80년대 어떤 해에는 연등회 하이라이트인 제등행렬 인근에서 일어난 시위 여파로 많은 불자가 최루탄 연기를 맡으면서도 묵묵히 행렬을 이어갔고, 폭우가 쏟아지는 종로 거리를 대형 장엄등을 밀고 끌며 행사를 하기도 했다. 90년대 대학생들은 연등을 들고 오체투지를 하면서 여의도에서, 동대문에서 그리고 동국대에서 종로까지 무릎이 까져도 신나게 걸어갔다. 또 1990년대 후반부터 연등회를 ‘연등축제’, ‘Lotus Lantern Festival’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인의 축제가 되어 이틀 혹은 사흘씩 지속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수백만 인파와 더위 속에서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비를 담기 위해 밤늦게까지 전 세계인과 어울리며 즐거워했던 연등회의 기억들이 분명 있으리라.
작은 불빛으로 우주를 만들다
지금 연등회는 작년이나 올해 같은 코로나 상황을 빼면, 수일에 걸쳐서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세계인의 축제다. 연등회 사무국은 공식 명칭을 ‘연등회’로 하고 대한민국은 2012년 이 의례를 ‘국가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드디어 유네스코는 2020년 연등회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부처님오신날 시즌이 되면 불자들은 저마다의 특별한 기억을 연등에 투영한다. 연등이 연꽃등을 걸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으리라. 간절하고 애틋하고도 거룩한, 나와 가족과 국가와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작은 불빛에 투영하여 커다란 우주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바로 ‘연등’이다.
가족의 안녕, 사업 번창, 무병장수 등 개인의 소원을 연등을 통해 부처님께 전달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국태민안, 세계평화라는 커다란 소원을 적은 대형 연등을 대웅전 가장 앞쪽에 걸어두고 만민의 행복을 부처님께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역사를 이어오며 단 한순간도 천박해지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고귀한 행사를 이어온 것이 바로 나와 당신의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바로 나와 당신과 우리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연등회는 장대한 연대기이고 꺼지지 않는 빛으로 지속하는 것이다.
이효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며 종교문화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종교, 문화, 사회, 일상에 대한 공시적・통시적 시각을 아우르는 융합연구를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