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으뜸
상태바
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으뜸
  • 관리자
  • 승인 2007.09.2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 참회

많은 사람들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하고 고민도 해보았으며 주변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다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삶이란 가치관과 처해진 환경이 다르고 그 때의 마음 상태 또한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한 상황과 마음에 따라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옳다고 인정하기보다는 자기의 생각과 행동만이 최선이고 최고라고 주장하면서 주변과 마찰을 일으키며 갈등을 겪고 살아간다.
왜 이런 경향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자신의 성품, 즉 불성을 등지고 살아온 삶에서 얻어진 업의 장애인 것이다.
이 업은 탐욕에 물든 이기심으로 인하여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과보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뿐이다.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고 빼앗은 것은 물론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화내고 현혹하고 이간질하면서 살아온 과정이 한량없어 그 과보가 쌓이게 되었고, 그 과보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행위를 할 때 장애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품, 즉 불성을 어기고 살아온 업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불성과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새로운 방향전환의 계기가 필요한데, 이것이 참회이다.
부처님은 『유교경』에서 참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쇠갈퀴와 같아 사람의 법답지 못함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곧 모든 공덕과 착한 법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품 속에 불성이 있어 거슬리는 일을 했을 때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성품, 이것을 불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성에 거슬리는 일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성품이 업의 장애에 가리워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업의 장애로 마음이 온갖 탐욕에 오염된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다. 설령 받아들인다 해도 탐욕에 오염된 상태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탐욕의 씨앗만 키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참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참회할 때는 부처님의 계율과 경전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은 탐욕에 물들어 있어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율과 경전을 거울삼아 지난 날의 삶을 돌아보아 허물을 반성하고 이 순간부터 다시는 그러한 허물을 다시 짓지 않겠다고 자신과의 맹세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즉 신명을 바치는 참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 한다고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참회가 이루어질 때 지금까지의 업의 장애가 사라지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능엄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수행자가 계를 지키지 않으며 수행하는 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똥 막대기로 전단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아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이것은 불자가 참회를 했더라도 항상 몸과 마음을 계율로써 다스려 욕망에 이끌리는 것을 지켜나갈 때 청정한 마음이 되어 새로운 공덕과 착한 법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경우에는 광덕 스님이 쓰신 ‘한글 금강경’과 ‘보현행자의 서원’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보살은 현실 속에서 마음에 일어나는 상을 한낮 꿈과 같고, 허깨비 같으며, 번개와 같고, 이슬과 같이 보아 상에 머무르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항상 현실의 난관에 부닥쳐 두려움이 일어날 때는 ‘이 두려움은 꿈과 같아 실체가 없는 것으로 마음의 관념에 의해 두려움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래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다 보면 두려움이 저절로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실천적 측면에서는 보현행자의 열 가지 서원을 지표로 하여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성품과 다름 없음을 인식하고 인연 닿는 이들에게 예경하고, 찬탄하며, 모든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한다.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나의 관념에 얽매여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마음에 거슬리는 허망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이것이 아니다’ 하고 얼른 정신을 차려 현재의 상황에 거슬리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나은 세계로 향상해 나가는 것을 자신 스스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불도에 이르는 길은 한량없이 많다는 말은 누구나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습관에 이끌려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 한 길을 선택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여 일체중생이 불도에 이르기를 기원해 본다. 마하반야바라밀.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