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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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라”
  • 관리자
  • 승인 2007.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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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법단

어떤 사람이 장님을 업고 길을 갑니다. 가다 말고 장님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잡혀주면서 “나뭇가지를 잘 붙잡고 있거라. 잠깐 용변을 보고 와야겠다. 그런데 조심해라. 발 밑은 천길이고 독사가 우글거린다. 절대로 나뭇가지를 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옆에 과실나무에서 과실을 한 개 따서 입에 물려 주면서 “시장하면 이것을 따서 먹어라.”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조금 있자니까 팔이 아픕니다. 그러나 나뭇가지를 놓으면 천길에 독사가 우글거린다 하니까 팔이 아파도 매달려 있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 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무에 매달려서 고달픈 생활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하루는 지나가던 사람이 “왜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고생을 합니까? 어서 내려오시오.”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내려온단 말입니까? 발 밑이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독사가 우글거리는데. 그리고 이 맛있는 과실을 놔두고 어떻게 내려온단 말이요.”
지나가던 사람은 “그러면 내려와서 따먹으면 될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 밑은 독사가 우글거리는 천길 낭떠러지라는 생각 때문에 손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한손을 가만히 내려놨습니다. 그 다음 한손을 마저 놓으면 아주 내려오는 것인데 한손을 마저 놓지 못합니다. 끝끝내 한손을 마저 놓지 못하고 나무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사실 그 땅과 나무의 거리가 얼마인가. 손아귀 거리입니다. 손아귀만 놓아버리면 대지 위의 대장이 될텐데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집착을 놓는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본길입니다.

“선남자야, 보살이 정각을 깨달았으면 이 정각심으로 환화(幻化)와 고요한 모양을 취하지 아니하나니, 아는 것과 몸과 마음이 다 걸림이 되는 것이니 지각이 없는 밝음(無知光明)이 모든 걸림을 의지하지 아니하여 길이 걸리고 걸림없는 경계를 초월하여, 수용하는 것과 세계와 몸과 마음이 서로 티끌 지경에 있음이, 쇠북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거와 같아야 번뇌와 열반이 서로 걸림이 없느니라. 이에 능히 안으로 적멸하고 경안(輕安)함을 얻어 묘각을 수순하니 이것이 적멸경계라. 자타신심이 미치지 못하는 바며 중생의 수명이 다 뜬 생각이 된 것이니 이 방편자는 선나(禪那)라 하느니라.” -원각경 위덕장-

허공과 같은 큰 마음이 본래 마음

우리들이 우선 생각을 허공 같다고 하는(허공이 내가 허공 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을 비유하기를 허공으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허공을 비유해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허공 안에 우주가 건립되어 있고, 우주 그 안에 지구가 있다 하고 지구 가운데 만물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허공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입니다.
이 허공과 같은 큰 마음이 본래의 마음인데 거기서 바깥의 허공 가운데 지구라든가 지구를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태양을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아니면 어떤 별을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이렇게 그 허공 가운데 있는 어느 부분 하나를 붙잡아서 자기라고 매달릴 것 같으면 물론 자기가 아니고 자기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착각입니다.
그 가운데서 일체경계가 환상인데 고요한 깊은 마음에서 보면, 허공 같은 넓은 마음에서 보면 중간에 있다는 것, 크다는 것이 전부가 하나의 환과 같은 조그마한 부분적인 존재이며, 변화하는 그림자밖에 안 되는 존재들인데 그렇게 알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또 한 가지 그런 것을 다 아는 고요한 마음, 이것이다 하는 마음에 더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몸과 마음이 모두가 허공에 흩어진 별나라 세계와 같이 그것 전부가 장애물같이 걸리는 것입니다. 허공과 같은 맑고 투명한 무한의 마음이 본래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되어야지 그렇지 아니하고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태양이다 뭐다 하고 그것을 자기로 삼았다가는 그것이 걸리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것에 자기를 매는 것과 같아서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서 여기 무지광명이라고 지각이 없는 밝음이라 했습니다만, 지(知)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감각하는 것을 각(覺)이라고 해서 지각이 없는 밝음 이 말은 이 안에 있는 물건이 장애뿐만 아니라 그 장애가 없다고 하는 것을 지각하는 그것조차 없는 허공에서 허공이라는 것까지도 없는 완전 절대, 정말 청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지광명(無知光明). 지각이 없는 밝음. 완전무결한 순수한 진리본성을 무지광명이라고 했습니다. 일체 중생세계다. 악도세계다 뭐다 하는 수많은 세계가 다 망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망상이 다 끊어지니까 다 없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밝고 깨끗한 그 마음은 의지하지 않습니다. 일체 장애에도 걸리지 않고 걸리는 경계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태에 머물게 되면 바로 이 번뇌망상 세계에서 살고 있든지, 어떤 세계에 머물러 있든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든지 몸과 마음 하나하나가 청정 진리성 그대로 통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을 치면 종소리가 바깥으로 울려 나오는 것처럼 번뇌망상세계, 온갖 잡세계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열반청정세계 번뇌가 하나도 없는 청정세계와 조금도 막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나(禪那)의 기본입니다.
참선에서 화두는 근본적으로 고요한 데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깨달은 경지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는 즉 말을 바꿔 하자면 우리의 생각으로 알 수 없는, 생각이 다 끊어진 상태, 허공이다 맑다 무한이다 하는 것도 생각입니다만 그 생각이 다 끊어진 상태 그것이 진리의 본모습이고 그 진리의 모습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온갖 생각들이 다 무너져버려야 합니다.
말하자면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우리 생각 그것입니다. 감각세계와 감각의 대상이 되는 육진과 그 대상을 인식하는 육식, 십팔계(十八界)로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누에고치처럼 그 속에 살고 있어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 그 지식이 전부 자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무너져야 화두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무너져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허공이라는 생각마저도 무너져버려야 진짜 허공, 진짜 진리무량경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마음이 맑고 고요하고 무한한 청정을 성취하기 때문에 고요하고 참으로 편안해서 묘한 깨달음을 수순하는 것이 됩니다. 묘각수순, 진리 깨달음 그것을 그대로 자기가 받아쓰는 것이 되어서 열반상락, 적멸경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적멸(寂滅), 고요한 경계인데 고요한 경계라고 하면 번뇌가 다 끊어진 참으로 즐거운, 참으로 자유스러운, 참으로 무한절대를 성취한 대자유를 완성한 상태를 적멸경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는 자타심심, 나나 누구의 몸과 마음 생각 가지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생각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근본진리세계는 우리의 마음생각이 다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놓아라. 놓아라. 놓아라…

경전에 보면 허씨 범지가 오신통을 갖춰서 꽃이 가득 핀 오동나무 두 그루를 신력으로 뽑아가지고 부처님께 문안드리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놓아라.” 하십니다. 그래서 나무를 놓으라고 하시는 줄 알고 오동나무꽃을 놓았습니다. 또 “놓아라.”하십니다. 그래서 이쪽 오동나무도 놓았습니다. 또 “놓아라.”하십니다. 놓을 것이 없으니까 “부처님 저는 손에 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놓으라 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이 “내가 그대에게 손에 들고 있는 그 꽃을 놓으라 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육근의 감각을 놓고 육진을 놓고 중간에 육식을 놓아서 다시는 놓을 것이 없는 데 가면 그때 네가 생사가 없는 데 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뭇 이해하기가 쉬운 대목입니다. 우리 생각, 육근·육진·육식이라는 십팔계 구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이것으로는 진리의 무한성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육근·육진·육식이라는 이 마음이 무너져버리고 끊어져버렸을 때 그때 바로 완전무결한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무한성, 그 무한성을 직접 제시한 것이 화두(話頭) 즉 공안(公案)입니다. 참선공안입니다.
그런데 이 참선공안은 이론으로 따져서는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오직 알려고만 하는 이 모르는 마음으로 참구해들어갈 때 마침내 육근·육경·육식 이것이 무너지면서 자기 진리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

마조 스님과 방 거사의 얘기입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삼라만상이 다 무너지고 변해가고 늙고 병들고 세상이 다 변해가고 어떤 것도 변치 않는 것은 없는 것인데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과 상관 없는 자, 죽지 않는 자, 불멸의 자, 진리 그 자체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조 스님의 대답이 “단숨에 서해바다를 다 마시고 오너라. 그러면 내 일러주마.”
한 잔의 물도 다 못 마시는데 서해바다를 다 어떻게 마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런데 서해 바닷물을 다 마신다? 상식 이론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된다. 안 된다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이론으로 하려고 해야 되지 않습니다. 그 생각길이 끊어질 때 정말 단숨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는 도리가 거기서 나옵니다.
입은 자그맣고 배는 적고 서강의 물은 한없이 크고 그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논리적인 생각들을 내는 것, 그러한 우리의 인식구조 모두가 끊어져버려야 그 때에 정말 서강의 물을 마시는 도리,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도리, 천지 삼라만상 일체가 변해도 변치 않는 도리, 그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선에서는 이와 같이 일체가 걸림없는 근본적인 진리실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는 자타신심이 미치지 못하는 바다, 즉 우리 스스로나 남의 마음, 그 몸과 마음, 생각이나 이론 가지고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생수명이 뜬생각이라고 했듯이 중생이고 오래 살고 하는 이런 생각들이 뜬생각들입니다. 이 맑고 투명한 무한대의 본성, 이 진리, 이것을 닦아가는 것이 선나(禪那), 즉 선(禪)입니다.
“구름이 가고 구름이 오니 저 허공에 무슨 더하고 덜할 것이 있을 것인가. 물거품이 없어지는 큰 바다에 바닷물이 늘고 주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대의 생명은 맑고 투명한 무한대의 것이라

이것은 영가법문입니다마는 이것을 들으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여기서 “구름이 가고 구름이 온다.” 이것은 허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본성이 허공인 것입니다. 우리 본성이 허공인데 구름이 왔다 갔다 한들 망상이 왔다 갔다 한들, 생사가 왔다 갔다 한들, 우주가 왔다 갔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느냐. 즉 우리 본래의 본성을 깨달아야지 그것을 모르고 육체가 나인가. 이 지구상에 태어난 것이 나인가. 태양이 나인가 하고 부분적인 것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미혹해서 생사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거늘 이 한 물건, 길이 길이 멸하지 않는 신령한 작물, 즉 우리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본성진리 이 물건이야말로 생로병사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구름이 생겼다가 흩어지니 거기에 둥근달이 스스로 나타났고 또 금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금에 흙덩이나 모래 같은 것을 제련해서 다 닦아내니 진금이 스스로 나타납니다. 마음 가운데 헐떡거리는 마음, 번뇌망상 그것을 쉬어버리면 즉시 깨달은 것입니다.
성품이 청정하고 묘하게 밝으니 이것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닙니다. 보통 영가법문할 때 “너의 본성이 이런 존재다. 육체가 아니다. 하물며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가지고 있었 던 슬픔이나 원망이나 애착이 다 무엇인가. 그런 것 붙잡고 있으면 악도에 떨어지고 번뇌망상 때문에 윤회에 빠진다. 그런 생각 다 쉬어라. 그대의 생명은 무한대의 것이다.” 하고 생명의 근원을 깨우치게 해주는 법문이 주로 영가법문의 골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본성이 허공을 넘어선 크고 위대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해 주는 것이며 인간의 권위와 가치와 무한성과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해서 영원성을 한꺼번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워낙 우리는 조그마한 먼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허공보다 더 큰 얘기를 하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 용기를 가지고 믿음과 행을 닦아가십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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