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후예
인류가 생존을 위해 수렵과 채취로 떠돌아다니던 석기시대에는 신(神)도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경·목축 사회로 전환되고 인구가 늘어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인류 생존에 날씨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씨는 인류의 의지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연히 신들이 등장하게 된다.
구름·천둥·번개·비를 관장하는 신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났다. 서양에서는 모든 만물과 우주를 지배하고 비·눈·우박·번개·천둥을 관장하는 제우스(Zeus)가, 북유럽에는 토르(Thor)가, 인도에는 인드라(Indra, 제석천)가 있듯 한민족에게는 환인(桓因)이 있었다.
물을 전문적으로 다스리는 신도 나타났다. 동남아시아의 나가와 중국의 용이다. 중국은 일찍이 농경사회로 전환됐고, 물의 신인 용에 대한 신앙이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부족사회에서 차츰 국가 제도가 갖춰지자 천자(天子, 황제)나 임금은 용에 비견됐다.
심지어 중국 민족은 용의 자손이라는 신화도 등장했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모시는 인물이 바로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다. “염제 신농(神農)은 그의 어머니 여등(女登)이 화양땅을 지나다가 신룡과 감통하여 낳았고”라고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지은 『제왕세기』에 기록돼 있다.
일찍이 중국에 정착한 용의 문화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분화, 발전해 용의 아들들이 등장하게 된다. ‘용이 아홉 아들을 낳았다’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이 그것이다. 용은 천자를 상징하니 민간에서 함부로 거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용의 문화가 사회 저변에 골고루 스며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용의 아들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렇게 전승되던 설화는 명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문인에 의해 정리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용은 왜 ‘아홉’ 아들을 뒀을까?
아홉의 의미
각 민족에게는 민족 고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숫자 개념이 있다. 우리 한민족은 ‘3’을 기본으로 하는 홀수 문화를 선호한다. 곧 1, 3, 5, 7, 9를 길(吉)한 수로 생각해서 이를 문화 전반에 응용한다. 삼존불, 삼층석탑이 기본이 돼 숫자를 늘려가도 홀수를 지킨다. 국악과 택견도 기본이 삼박자다. 태극도 삼태극을 쓰고 음식도 삼함을 만들어 먹는다.
중국은 우리 민족과 다르다. 기본적으로 짝수를 좋아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국인들의 숫자 선호는 발음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숫자는 2, 6, 8, 9이고 싫어하는 숫자는 3, 4, 7이다.
우선 ‘3’은 ‘헤어지다, 흩어지다’는 뜻의 ‘산(散)’과 발음이 비슷하기에 기피하는 수다. ‘4’는 우리의 ‘사(死)’와 발음이 유사해서 싫어한다. ‘7’은 서양이나 우리나라에서 행운의 숫자지만, 중국에서는 장례와 연관이 있는 숫자라서 싫어한다. 중국에서는 49재를 ‘칠칠재’라고 부른다. 7일에 한 번씩 7번을 지내기 때문이다. 당연히 죽음과 연관이 있어서 ‘7’을 기피한다.
이와 반대로 ‘2’는 짝을 이루고 서로 화합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좋은 일이 2배로 늘어난다고 하여 좋은 숫자로 믿는다. ‘6’은 순리대로 잘 풀린다는 ‘류(流)’와 발음이 비슷해 행운의 숫자로 인식된다.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8’이다. ‘8’은 ‘발(發)’과 발음이 비슷해서 ‘발전한다, 돈을 번다(발재發財)’의 의미와 상통한다. ‘8’이 여러 번 겹치는 차 번호나 전화번호는 그 값이 상상 초월로 높다.
‘9’는 ‘오래가다, 장수하다’는 뜻을 가진 ‘구(久)’와 발음이 같다. 또 ‘9’는 가장 높은 수로서 완벽,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9’가 가장 존귀한 숫자다. 따라서 중국 황실에서 주로 사용했다.
용이 황제를 상징하고 ‘9’가 가장 높고 존귀한 수였기에, 황궁에는 용 아홉 마리를 배치했다. 벽면에 9마리 용을 조각해 놓은 구룡벽(九龍壁)이 그것이다. 베이징 자금성의 구룡벽이 대표적이다. 이 자금성의 방 개수는 9,999개다. 자금성 대문에 박혀 있는 못의 개수도 가로 9개, 세로 9개로 구성됐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베이징 천단의 계단도 아홉 계단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9’라는 숫자는 불교문화에도 유입됐다. 인도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자 제석천과 범천이 더운물과 찬물을 부어가며 태자를 목욕시켰다는 간단한 기록이 후대로 내려갈수록 풍성한 내용으로 부풀려진다. 이러한 탄생 설화는 중국에 들어와서 더욱 신비로운 이적으로 변해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자 아홉 마리 용왕이 나타나 향기로운 물을 뿜어 태자를 목욕시킨 내용으로 바뀐다. 이를 구룡토수(九龍吐水)라고 한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도 내용을 부풀려 구룡토수 신화가 됐으니, 상상의 산물인 용이 9명 아들을 낳았다고 한들 매우 놀랄 일도 아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용의 아들 9명이 다 용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무기가 물속에서 500년을 지낸 후 여의주 한 개를 얻어서 용이 된다고 하듯이, 용의 자식이라도 성장해서 자동으로 용이 될 수는 없다. 이를 ‘용생구자불성룡(龍生九子不成龍)’이라고 한다.
그래도 용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특이한 성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제 그 자식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아홉 아들의 등장
흔히 용의 아홉 아들에 대한 기록은 명나라 사람 호승지(胡承之)가 지은 『진주선(眞珠船)』이란 책을 근거로 삼지만, 이 사람이 어느 시기 사람이고 언제 지은 책인지는 불분명하다. 좀 더 확실한 명나라 사람의 기록으로는 관료 출신 육용(陸容, 1436~1497)의 『숙원잡기』, 시인이자 정치가인 이동양(李東陽, 1447~1516)의 『회록당집』에 실려 있다. 용의 아홉 자식에 대한 이름과 순서는 서로 다르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용생구자’에 대해 기록을 남긴 이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이다. 성호 이익은 자신이 지은 『성호사설』 「만물문」 ‘용생구자’ 조에서 용의 아홉 아들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와 의문 나는 점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명나라 최후의 명군이자 한족 왕족 마지막 성군으로 알려진 효종(1470~1505)은 18년간 재위했으며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효종이 중국을 다스릴 때의 연호가 홍치(弘治, 1488~1505)인데 이 시기에 많은 충신과 인재들이 배출됐다. 효종의 자질과 인품이 빼어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 효종이 ‘용이 새끼 아홉을 낳았는데 용이 되지 못하고 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다(龍生九子不成龍各有所好)’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소첩(小帖)에 적어서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때 이동양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 차례대로 아홉 아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런 내용은 문인 양신(楊愼, 1488~1559)이 지은 『승암외집』에도 나오고 앞서 말한 이동양의 『회록당집』에도 나온다. 이 글에서는 『성호사설』에 실려 있는 용의 아홉 아들을 순서대로 따라가 본다.
용의 아홉 아들 특징
첫째는 비희(贔屭)다. 형상은 거북과 흡사하고 무거운 짐 지기를 좋아한다. 알려진 대로 거북은 수명이 길기에 영원함과 상서로움을 상징한다. 거북 모양의 받침대라고 해서 귀부(龜趺)라고 부르는 비석 받침이 이 비희를 가리킨다. 몸은 거북인데 머리는 용의 얼굴을 닮은 것이 많다.
둘째는 이문(螭吻)이다. ‘이(螭)’는 이무기를 말하고 ‘문(吻)’은 입술을 말한다. 형상은 짐승과 같고 천성이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기를 좋아하는데 불을 끄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궁궐이나 사찰의 용마루 끝에 설치했다. 이 이문을 치미(鴟尾), 치문(鴟吻)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당나라 때까지는 치미라고 부르던 것이 후대에 형상이 바뀜에 따라 이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치미에 대해서는 ‘동해에 뿔 없는 용이 있는데 꼬리가 마치 솔개(치鴟)처럼 생겼다. 입으로 물을 뿜으면 바로 비가 내리게 되는 까닭에 당나라 때부터 그 꼬리 모습을 만들어 건물 용마루에 세웠다’라고 했다. 곧 당나라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도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솔개 꼬리 모습을 세웠으니 경주 황룡사지 치미가 대표적이다. 치미는 바로 솔개 꼬리라는 말이 아닌가.
또 ‘당나라 이후로는 궁전과 사찰에서 물고기형을 만들어 지붕 위에 세웠는데 꼬리는 위로 치켜들게 하였다’고도 했다. 마치 큰 물고기가 입으로 지붕을 물고 있는 모습으로 세운 것인데 이것이 이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송나라에서는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장식기와를 용미(龍尾)라 했고, 송나라와 교류한 고려에서도 치미와 함께 용미를 썼다. 현재 고려시대 치미는 있어도 용미는 보이지 않지만, 고려불화에 지붕 위의 용미가 그려진 것이 남아 있다.
일본에는 용미와 비슷한 샤치호코(호鯱)가 있다. 사찰이나 궁궐, 전통가옥 지붕에 많이 남아 있는데 호랑이 얼굴에 몸은 물고기, 꼬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다. 불이 나면 물을 뿜어 불을 끈다는 의미는 똑같다.
셋째는 포뢰(蒲牢)로서 용의 모습을 제일 많이 닮았지만 크기가 작고 소리 지르는 것을 좋아한다. 바다에 살고 있는데 고래를 제일 무서워해 고래가 다가오면 더욱 크게 운다. 사찰 범종 꼭대기에 고리 모양으로 용을 앉혀 놓은 것이 바로 포뢰다. 종을 치는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다듬어서 쓰는 것도 이런 이유다.
넷째는 폐안(狴犴)이다. ‘폐(狴)’는 감옥을 뜻하고 ‘안(犴)’은 들개라는 뜻인데 몸뚱이는 검고 얼굴은 호랑이를 닮았다. 지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옥이나 법정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새겨 놓는다.
다섯째는 도철(饕餮)이다. 도철은 식탐이 많아 과도하게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흉악한 괴수로 늑대를 닮았다고 하여 사람의 음식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솥이나 그릇에 새겨 넣는다고 한다.
여섯째는 공복(蚣蝮)이다. 물을 좋아해 물속에서는 왕이지만 물밖에서는 개미에게도 놀림을 받는다고 한다. 돌다리의 아치 아래에 머리만을 조각해 끼워 놓기도 하고 짐승 모양으로 물가에 배치하기도 한다. 물을 따라 들어오는 악귀나 재앙을 막아준다고 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애자(睚眦)다. 두 글자가 다 눈초리라는 뜻으로 노한 눈으로 노려본다는 의미다. 승냥이처럼 몹시 험상궂게 생긴 데다 죽이는 것을 좋아한다. 전쟁에서는 힘과 용기를 북돋는다고 하여 칼의 손잡이에도 새기고 입으로 칼날이나 도끼날을 물고 있는 모습으로도 새긴다.
여덟째는 산예(狻猊)로 금예(金猊)라고도 한다. 형상은 사자와 흡사하고 불과 연기를 좋아한다. 또한 앉아 있기를 좋아해서 향로의 다리나 뚜껑에 앉은 모습으로 새긴다.
아홉째는 초도(椒圖)다. 개구리와 소라를 닮았다는 기이한 형상으로 문을 닫고 숨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문의 문고리에 주로 장식한다.
이렇게 용의 아홉 아들들이 있지만 이를 기록한 사람마다 이름 혹은 좋아하는 것이 다르게도 나온다. 『박물지』에는 용의 종류가 10가지로 나오기도 한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용의 아홉 자식이 형성됐다는 뜻이고 그래서 기록이 각각 다르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용의 아들들은 옛 문화유산 속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이는 건축술이 점차 발달하면서 그 건축물의 특성과 보호를 위해 여러 상징물이 출현하게 되고 그것들을 신령한 용의 아들로 만들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장엄물들로 인해 그 건축물의 위엄을 높이고 그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저서로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 『사찰에 가면 문득 보이는 것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