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 용이 나르샤] 용왕이 거처하던 곳, 사찰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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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용이 나르샤] 용왕이 거처하던 곳, 사찰이 되다
  • 김희진
  • 승인 2023.12.2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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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水神 신앙과 용
양산 통도사 구룡지. 자장율사가 창건한 통도사는 연못 위에 세워졌다. 연못에 아홉 마리 용이 살았는데, 한 마리가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서원했다. 율사는 연못을 메우고 금강계단을 세웠는데, 한 귀퉁이는 남겨 뒀다. 그곳에 용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사진 유동영

사찰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용

경남 양산의 통도사 터는 과거에는 큰 연못이었다. 그 연못에 아홉 마리 독룡(毒龍)이 살면서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한다. 646년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의 설법으로 연못에 살던 독룡들이 교화됐다. 독룡 중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날아갔는데, 한 마리만이 남아서 터를 지키겠다고 했다. 자장율사는 독룡이 살던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세웠는데, 연못 한 귀퉁이는 메우지 않고 남겨 뒀다. 이곳이 현재 통도사 경내에 있는 구룡지로, 마지막 남은 한 마리 용이 사는 곳이라 한다. 통도사 창건 설화로 전해오는 이야기다.

물에 사는 악한 용이 불법에 감화되고 퇴치되는 이야기를 우리나라 사찰 창건 설화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울진 불영사 역시 의상 스님이 절 앞 큰 연못의 아홉 마리 용을 주문으로 퇴치한 뒤 세웠다 전한다. 이외에도 고창 선운사 자리의 연못에 살았던 용, 장흥 보림사 자리의 아홉 마리 용 등 많은 사찰의 창건 설화에 용이 등장한다. 

용과 물, 그리고 불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불교의 용이라 하면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룡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용이 처음부터 호법신의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용은 인도 신화에서 뱀의 신, 즉 사신(蛇神)이었던 나가(那伽)가 불교에 유입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된 존재다. 고대 인도의 토착신인 나가는 불교에 수용되면서 대부분 불법에 귀의하고, 호법신의 역할을 하게 됐다.

불교의 용이 모두 선한 존재는 아니었다. 경전에는 선악의 양면성을 가진 용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법을 행하는 법행룡(法行龍)과 그렇지 못한 비법행룡(非法行龍)으로 구분된다. 비법행룡은 세상을 파괴해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독룡(惡毒龍)이다. 이러한 악독룡은 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후 선룡(善龍), 즉 법행룡으로 변화한다. 

장흥 보림사 약수. 보림사 역시 연못 위에 세워졌다. 연못 속에 아홉 마리 용이 있었고, 보림사를 세운 원표 스님이 용을 제압하고 사찰을 세웠다. 사진 유동영
경주 기림사 용연폭포. 신라 신문왕이 신비한 힘을 지닌 옥대와 만파식적을 선물 받고 기림사에 잠시 머물렀다. 옥대에 새겨진 문양 조각 하나를 떼어 개천에 놓았는데,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사진 불광미디어
吾家有一客 定是海中人(오가유일객 정시해중인)
口呑天漲水 能殺火情神(구탄천창수 능살화정신)
우리 집에 한 손님이 있으니, 바닷속 사람이다.
입에는 하늘에 넘치는 물을 머금어,
불의 정신을 소멸할 수 있네.

통도사 대광명전 벽면에 적힌 글이다. 바닷속 손님은 바로 용을 뜻한다. 사진 불광미디어

통도사는 매년 단오제 때 용왕재를 올리고,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전각에 소금단지를 올린다. 사진 불광미디어

 

용신龍神의 탄생과 건국 신화 속 용

불교가 전래되기 전, 한국에는 고대부터 천신(天神)·산신(山神)·수신(水神) 신앙 같은 토착 신앙이 있었다. 이 중에서 수신 신앙과 용신(龍神) 신앙을 동일시했는데, 물속에 사는 용이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수신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용은 미래를 예시하는 존재로도 여겨졌다. 문헌이나 설화에는 용의 등장 이후부터 태평성대, 성인의 탄생, 임금이나 위대한 인물의 죽음, 농사의 풍년과 흉년, 민심의 흉흉(洶洶) 등과 관련된 기록들이 나온다. 용이 출현하면 길흉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기에 이러한 사건들을 미리 알려주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때 용이 미래를 예시하기 위해 나타나는 장소는 바다·못·우물 속이다. 옛사람들은 용과 물을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 생각했다.

한국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수신의 중요성은 더욱 확대됐을 것이다. 특히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는 우리나라 어민들에게 바다는 생업과 직결된 소중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이러한 물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물의 모습과 성질을 닮은 용신(龍神)이 탄생했다. 물과 관련된 기원과 소망이 간절한 만큼 용에게 더 높은 위치와 능력을 부여했을 것이다. 이처럼 수신으로서 강력한 존재인 용왕은 더 나아가 다른 곳에서도 신이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삼국의 건국 신화에서도 수신 신앙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다섯 마리의 용이 이끄는 수레인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고, 어머니 유화는 수신인 하백(河伯)의 딸이다. 탈해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으로 적룡(赤龍)의 호위를 받으며 계림의 아진포에 이르렀다. 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은 계룡(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건국 신화에 나타난 용은 왕을 용의 혈통이라 하여 권위를 더하며,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한다.

문무대왕릉. 경주 봉길리 앞바다에 위치한 수중릉으로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장사한 곳. 아들 신문왕은 동해의 용이 된 부왕을 위해 인근에 왕사(王寺) 감은사를 세우고, 수로를 만들어 바다로 통하게 했다. 사진 유동영

 

용신龍神 신앙과 불교의 갈등

인도 토착신이었던 나가가 불교에 유입돼 불교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처럼,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용은 우리 고유의 용신 신앙과 더해지면서 그 의미가 더 발전한다. 특히 한국은 호국룡의 의미가 강해지는데, 외세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을 거치며 발전하기 시작한 호국룡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 그 의미가 더 강화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토착 신앙인 용신 신앙이 자연스럽게 불교에 녹아든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수용돼 공인된 시기는 삼국시대다. 불교의 수용은 왕실 주도하에 이뤄졌고, 왕실의 보호에 힘입어 발전할 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비교적 큰 반발 없이 불교가 수용됐던 반면, 신라는 왕실의 반발이 아주 심했다. 결국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 난 뒤에야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유입된 불교는 토착 신앙으로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용신 신앙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통도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의 창건 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어산불영(魚山佛影)’ 조는 밀양에 있는 만어사(萬魚寺)의 창건 설화로, 용과 불교의 갈등과 융합 과정을 잘 보여준다. 

“옛날에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가 있어 독룡과 왕래하며 사귀었다. 그래서 때때로 비와 번개를 내려 4년 동안 곡식이 익지 않았다. 왕이 주술로 막고자 했으나 할 수 없게 되자, 부처님께 청하여 설법하였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나찰녀가 오계를 받았는데 그 후로는 재해가 없어졌다. 이로 인해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산중으로 모여들어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종과 경쇠의 소리를 내었다. 수로왕이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고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만어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독룡과 나찰녀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그 악행을 토착 신앙이 해결하지 못하자 부처님의 힘을 빌려 해결했다는 내용이다. 수로왕 자신의 힘만으로 독룡을 물리치지 못하고, 부처님 힘을 빌어야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토착 신앙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앙 체계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독룡들은 끝까지 불교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 결국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화돼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여기에서 용의 존재는 불교에서 말하는 호법룡이 아니라 토착신으로서의 수신이다. 물을 다스리는 능력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능력은 없다. 그렇기에 더 많은 신통력을 가진 부처님께 패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의 능력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불교’라는 새로운 신앙 체계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키는 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불교와 용신 신앙과의 갈등은 대부분 토착 신앙의 영역에 불교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불교가 전래될 때 사찰은 전통 신앙의 근거지인 산신을 모셨던 기도 터와 수신을 모셨던 연못에 세워졌다(여러 사찰의 설화에 용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결국 용신은 불교에 패배하거나 교화돼 호법룡이 됨으로써 불교에 수용된다. 토착신으로서 용신의 권위는 약화하고 불법 수호자로서의 역할만 강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용신을 제압하고 사찰이 들어서는 것은 불교가 유입되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토착 신앙과의 갈등, 그리고 둘의 화해와 융합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화엄경』에 “십대용왕(十大龍王)은 … 하나같이 힘써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여 모든 중생의 타는 고통을 소멸시킨다”라는 내용이 있다. 잦은 외세 침입으로 우리 민족에게 신앙적 존재가 된 토착 신앙의 용신(수신)처럼, 불교 신중으로서의 용의 역할도 결국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비록 둘 사이의 갈등은 있었지만, 결국은 더 나은 존재로 용이 변화한 것은 아닐까? 

 

김희진
국립문화재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원. 한국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 도상의 의미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 불교의 용 도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용왕각과 용왕도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불교문화와 불교민속을 중심으로 한 용(龍) 문화에 관한 연구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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