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야타적 사상경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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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카야타적 사상경향 2
  • 고익진
  • 승인 2009.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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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지난 번에 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학사상이라는 것이 잘못하면 (로카아야타) (順世派)적 사상 경향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는데 이러한 (로카아야타)적 사상 경향은 심지어는 불교 안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모으는 설법이나 논문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일례를 들면 중아함 권43 온천임천경(溫天林天經)에는 다음과 같은 발지나제게(跋地羅帝偈)가 설해 있다.
과거사기멸(過去事己滅) 미래복말지(未來復末至) 현재소유법(現在所有法)
피역당위사(彼亦當爲思) 염무유견강(念無有堅强) 혜자각여시(慧者覺如是)
약작성인행(若作聖人行) 숙지수어사(孰知愁於死) 나요불회피(我要不會彼)
시고상당설(是故常當設) 발지나제게(跋地羅帝偈)
(大正 권一.六九六)

과거사는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에 있는 법을 마땅히 생각하되 그 생각에는 견실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진 사람은 이렇게 깨닫고 성인의 행을 하나니 그럴 경우 누가 죽음을 두려워 하랴. 내 그것(死)를 모를 진대 커다란 재난을 끝나나니 이렇게 精動하여 밤낮으로 열심히 하도록 항상 발지나제게를 통하라는 내용이다.
[발지나제](Bhddekaratta)라는 말은 현성일야(賢聖一夜)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 게송을 [현성일야게]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이것이 설해진 인연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삼미제(三彌提)라는 比丘가 왕함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하루 밤은 온천림에 가서 몸을 깨끗이 씻고 앉아 있었는데 새벽 녘에 찬란한 몸빛을 뿌리는 한 천신이 내려와서 그에게 발지나제게라는 것을 수지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삼미제는 그런 가명마저도 들어본 일이 없었으므로 자기는 수지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고 천신에게 그대는 그것을 수지하고 있느냐고 물엇다. 그러자 천신도 아직 자기도 그것을 수지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남겼다. 날이 밝자 삼미제는 곧 부처님을 찾아가서 그말을 했더니 부처님은 그 천신은 正殿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으로서 제석천의 장군으로 있다고 말씀하시고 곧 그 게송을 읊어 주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발지라제게라는 것이 본래는 무사들 속에서 愛誦되고 있었던 시인데 그것이 불교에 도입되어 개조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발지나제게가 흔히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인용되고 있음을 본다.
지난 일을 생각해서 무얼 할까.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미래 일을 걱정해서 무얼 할까.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한 현실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발지나제게가 가끔 인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발지라제게를 과연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까? 발지라제게를 관하고 있는 첫 두 구절은 분명히 [과거사는 이미 끝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도 현재에 있는 법 그것을 마땅히 생각하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 대목을 자세히 살펴 볼 때 그것은 그 다음의 [念無有堅强 ]이라는 구절까지 이어서 새겨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현재를 또한 생각하되 그 생각속에 [굳게 집착함](堅强)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 대목을 이렇게 새겨야 할 이유는 경전에서 大迦栴廷(대가전정)이 그 대목을 [현재 법에 대해서도 탐착해서는 안된다(不欲染着)는 뜻으로 부연하고 있는 데에서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게송을 현재를 중요시하라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발지라제게의 첫 인상은 과거나 미래 보다도 현재가 중요하다는 쪽으로 강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것은 그 게송이 원래 무사들 속에서 愛誦되고 있었던 시였다는 상상이 가능하다면 더욱 그럴듯한 해석일 수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무사들에겐 당면한 현실이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전에 전해지고 있는 현상의 상태로는 그 게송을 그렇게 해석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문제의 게송은 과거와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의 법에 대해서도 탐착하지 말라는 곳에 불교적 특색이 완연히 들어나고 잇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본다. 우리 주변에서는 요즘 지나칠 정도로 불교 교리를 현실 중심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유행하고 있다. 불교는 인간의 現實苦를 해결하려는 데에 그 제일의 목적이 있다든가, 불교는 현실적으로 [잘 사는 데]에 그 궁극의 목적이 있다든가 발지라제게를 현실 중시의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것도 바로 이러한 풍조에 의한 것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오늘날 불교를 포교함에 있어서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 다. 현세주의적인 사상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현대에서 불교는 은둔적인 종교로 오해되고 있음이 사실이므로 이러한 속에서 불교가 행해지기 위해서는 그 현실중시의 면이 강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그러한 해석들은 그 공로가 크게 인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아무래도 그것이 불교의 진정한 뜻을 발휘하는 것으로는 보기가 어렵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 現實苦]의 근본적인 해결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을 중시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우리들이 눈앞에 대하고 있는 현실은 각자의 마음 깊이 깃들어 있는 무지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그것의 전폭적인 부정없이는 인간고의 근본적인 해결은 기대할 수가 없다는 곳에 불교의 근본입장이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폭적인 現實否定이 전제되지 않는 어떤 現實肯定적인 말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불교라기 보다는 차라리 現世爲主적인 [로카아야타] 적 사상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불교의 소위 現實觀이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입장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기 보다는 그러지 못하다는 경우를 더 많이 대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불교의 業報輪回說에 대해서는 거의 대개의 경우 [로카아야타]적인 입장에서 대하고 있음을 본다. 바꿔 말하면 그 교설을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고 있음이 대개의 경우라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업보윤회설을 설하는 사람 자신부터가 그에 대해서 확고한 자신을 못 가지고 있는 경우를 왕왕히 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불교학자들의 저술 속에도 [불교의 윤회설은 民衆敎化를 위하여 불교 안에 채택한 하나의 통속적 종교관념]이라고 결론 짓고 있음을 본다. 불교학자들의 저술속에 이러한 견해가 있을 정도라면 윤회설에 대한 일반 견해가 어떠할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교리적으로 살펴 볼때 불교의 業報輪回說은 그의 無我說과 모순되는 듯한 감이 없지 않음이 사실이다. 윤회설이 성립하려면 한 생으로부터 다음 생 사이에는 어떤 불면의 존재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바라문 철학에서는 그것을 [아아트만 atman] 我 이라고 하였고 沙門들에 속한 邪命派나 [자이니즘]에서는 그것을 [지이바 jiva]命라고 불렀다. 그러나 불교의 無我說은 일체는 無常이라고 하여 그러한 불변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無我說이 성립하려면 輪回說은 부정되어야 하고 윤회설이 성립하려면 무아설은 부정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윤회설과 무아설은 서로 兩立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윤회설이 성립하려면 무아설은 부정되어야하고 무아설이 성립 되려면 윤회설이 부정되어야 하고 무아설이 성립 되려면 윤회설이 부정되어야만 한다. 이런 문제성 때문에 학자들은 윤회설을 일종의 방편설이나 또는 하나의 통속적인 종교관념으로 보고자 함이 사실이다. 왜 그러냐면 윤회설과 무아설에서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은 전자보다는 후자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과연 불교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는 바로는 불교의 윤회설과 무아설은 하등의 모순관계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이에 대해서 나는 조그마한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지만 그 요점은 불교의 무아설은 (나)를 부정하고 있음이 사실이지만 그 부정은 맹목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불교의 무아설은 그의 연기론에 입각해 있다. 연기론이란 우리들의 현실 세계는 각자의 내심 깊이 자리잡고 있는 무명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시 그 무명이란 진리에 대한 무지 바꿔 말하면 일종의 [착각(錯覺]과 같은 성질을 띤 망념이다. 따라서 그러한 무명에 의해 일어난 일체는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왜 그러냐면 어떤 사람이 새끼줄을 맴으로 착각했을 경우 그런 착각에 의해 놀람과 달아남 등의 법이 연기하지만 이렇게 연기한 법에는 (實體) 곧 법이라는 것은 있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바로 이러한 연기설에 입각해서 [나] (實體)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연기한 법에는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착각과 같은 망념에는 실다운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해서 妄念에 의해 연기한 그러한 법까지도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毘曇家(비담가)의 말을 빌리자면, “實로는 없지만 假로는 있는것”이다.
불교의 무아설이 이러한 내용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을 어찌 윤회설과 모순된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무아설과 윤회설이 충돌할 때 가장 문제되는 것은 윤회의 主體에 관한 점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은 [假我]의 존재성은 처음부터 인정하고 있으므로 우선 假我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그 정에서 윤회의 주체에 관한 문제가 해결될 실마리가 보인다고 할 것이다. 다음, 불교의 윤회설을 吟味(음미)해 볼 때 그도 또한 윤회의 主體를 결코 [實我]적인 것으로는 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윤회의 모습을 [이 陰(假我)이 멸하고 다른 陰이 相續한다] (雜阿含 卷23)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바라문교나 [자이나즘]이나 [지이바]로 설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과 윤회설은 서로 모순된다고 볼 수가 없다. 그 두 교설은 미묘한 표리(表裏)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윤회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나 논문들을 대할 때, 나는 다시금 저 現世爲主적인 [로카아야타]적 사상 경향을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로카아야타]派는 인도 철학에서 윤회설을 부정하는 唯一한 學派인 것 같고, 윤회설에 자신을 못 갖는 說法者들의 말은 대개가 [現實執着] 적인 방향으로 전개됨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교 밖에 [로카아야타]적 사상 경향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불교속의 [로카아야타]에 대해서는 더욱 더 조심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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