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된 선비, 매월당 김시습] “설잠 스님은 저에게 큰바위 얼굴입니다”
상태바
[스님이 된 선비, 매월당 김시습] “설잠 스님은 저에게 큰바위 얼굴입니다”
  • 김남수
  • 승인 2024.11.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 소종섭 회장
소종섭 회장은 부여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고려대 재학 중 불교학생회 회장을, 이후 시사저널과 아시아경제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아시아경제 ‘정치사회 에디터’로 재직 중이다.

매월당과의 인연

매월당의 마지막 거처가 부여 무량사다. 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소종섭 회장은 무량사가 말 그대로 집이었다. 12살까지 무량사 한편에서 살았다. 증조할머니가 1930년 출가하고 곧이어 증조할아버지마저 출가하면서 집안이 무량사에서 살게 됐다. 

할아버지가 양자로 입양됐고, 집안에서 매월당 영정이 있던 산신각을 관리했다. 매월당 김시습 하면 떠오르는 영정(보물 1497호)은 본래 무량사 산신각(지금의 삼성각)에 모셔졌었다. 

“어머니가 매일 다기 물도 올리고 산신각을 청소하셨죠. 산신각 안 왼쪽 나무 각 안에 영정이 있었습니다. 비구니였던 증조할머니가 1931년 산신각 창건에 역할도 하셨는데, 매월당 영정이 그즈음부터 산신각 안에 모셔졌던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 할아버지가 누구인데, 부모님이 청소도 하고 관리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 무량사에는 20여 분의 스님이 계셨는데 공양도 함께하고, 청소도 하면서 초등학교 시절을 무량사에서 보냈다. 1979년 집안이 무량사를 떠나 마을로 내려왔다.

“비 내리는 어느 날, 2명의 도둑이 산신각에 들어 영정을 훔치려 했어요. 다행히 어머니가 소리를 듣고 ‘도둑이야’ 외치면서 탱화와 촛대만 들고 도망쳤어요. 그때 부모님이 논의하셔서 영정을 무량사에서 보관하시게 했죠. 이후 무량사가 사역을 정비하면서, 일주문 안에 있던 민가를 내려보낼 때 아랫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제가 열두 살이었을 때입니다.”

그렇게 보관돼온 영정은 무량사에서 보존했고, 지금은 조계사에 위치한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종교를 접한 이유를 물을 때 ‘모태 신앙’이라 하는데, 소종섭 회장과 매월당의 인연은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였다.

소종섭 회장은 어릴 때부터 매월당 영정을 보며 자랐다.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매월당 영정 앞으로 삼 형제가 앉아 있다. 가운데가 소종섭 회장.

 

‘매월당’이라는 운명

소종섭 회장이 매월당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확인한 시기는 고등학교 국어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금오신화’를 이야기하는데, ‘아~ 그분이 그분이구나’를 각인했다. 하숙하면서 부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나, 고려대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도 무량사는 마음의 고향을 떠나 실제 고향이었다. 틈나는 대로 무량사를 찾았고, 대학 졸업 때까지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다.

기념사업을 생각한 시기는 2009년. 대학 입학 시 부여 분들의 도움으로 등록금을 마련한 소종섭 회장은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면서 부여 군민 활동에 참여했다. 어느 날, 선배 한 분이 “부여 무량사가 김시습이 돌아가신 곳 아니냐, 부여 사람들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이야기를 스치듯 던졌다. 그 선배는 매월당과 소종섭 회장과의 인연을 모르던 분이었다. 

“그때 운명이구나 생각했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지인들에게 동참을 권유하면서 기념사업회가 2011년 4월 2일, 매월당이 머물던 무량사에서 창립했다. 기념사업회가 가장 주력한 사업은 매월당의 흔적을 찾는 답사 프로그램이다. 매월당은 살아생전 전국을 유람했다. 기념사업회는 가지 못하는 북녘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56차례 답사를 통해 전국을 훑었다. 그 외에 강연회와 공연, 전시회와 ‘김시습 학당’도 운영했다. 

2011년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모습.

 

김시습 전집

기념사업회가 지금 주력하는 사업은 ‘김시습 전집’ 번역사업이다. 부여군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매월당집』이 발간됐고, 1970년대 말 한글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매월당의 불교 문헌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매월당은 『십현담요해』를 비롯해 여러 불교 관계 글을 작성했습니다. 내년 말을 목표로 진행되는 ‘김시습 전집’에는 불교 문헌도 번역하여 실을 예정입니다.”

기존 전집과 가장 큰 차이다. 

“매월당 인생의 대부분은 ‘설잠 스님’으로서의 삶입니다.”

“매월당 인생의 대부분은 ‘설잠 스님’으로서의 삶입니다. 40대 중반 1~2년 잠깐 환속했지만 다시 불가(佛家)로 돌아오셨고, 무엇보다 돌아가신 곳이 사찰이고 사리가 나와 부도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매월당의 모든 불교 저술을 번역하는데, 의미를 둘러싸고 조금 논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저희나 불교계가 ‘설잠 스님’으로서의 김시습을 조명하고 선양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소종섭 회장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마친 이후 사회로 나와서도 무량사와 불교를 떠난 적이 없다. “매월당이 꿈꾼 이상사회는 유학이었지만, 삶의 대부분은 승려였다”라며 유학이 주류였던 시대 상황과 마음 내면의 양면성을 함께 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매월당은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그것을 탕유(宕遊)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모범생은 아니다’라는 거죠. 왕도정치의 이상이 좌절되면서 견딜 수 없었겠죠. 매월당의 유람은 치유의 과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유람에 불교적 사유가 녹아 있다. 소종섭 회장은 국토를 방랑하면서 민초들의 삶을 기록한 김시습의 글에서 애민(愛民) 사상을, 기존의 문법을 넘어선 글로 써진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혁신가로서 매월당도 읽는다.

 

큰바위 얼굴

소종섭 회장은 ‘지조를 지킨 김시습’을 넘어선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어찌 보면 그런 시각은 유학자들의 시선일지 모른다고.

“제가 그분의 행적과 글을 감히 따라갈 수는 없지만, 그분은 삶을 고뇌하신 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곳에 참여했고, 누군가는 방관하기도 했겠죠. 매월당은 출가를 선택했고, 방랑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우리도 ‘이 길이 맞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합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로 시작된 방랑이었지만, 시와 노동으로 치유하셨죠. 그리고 그분은 그런 고뇌를 숨기지 않고 글로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솔직한 분이었습니다.”

소종섭 회장에게 김시습은 그렇게 다가왔다. 가끔 어린 시절의 무량사가 떠오른다. 초파일이면 부여뿐 아니라 대천과 청양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옛 시절에는 몇 시간을 걸어야만 올 수 있는 길이었다. 국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는 축제의 시간이기도 했다. 

또 ‘어릴 적 영정이 모셔졌던 산신각 자리가 설잠 스님이 마지막으로 머물렀고, 돌아가신 자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무량사는 만수산(萬壽山)에 얹혀 있다. 만수산 언덕 편에 화장터가 있는데, 그곳이 설잠 스님의 화장터라고 믿고 있다. 

 

사단법인 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
『김시습 전집』 발간 후원 안내

국민은행   060401-04-153819
전화문의   010-3326-2482(오윤숙 사무국장)

•후원하신 금액은 ‘기부금 세액공제’가 가능합니다.

 

사진. 유동영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