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던 해, 김시습은 삼각산 중흥사에 있었다. 폐위 소식을 듣고는 ‘사흘 밤낮을 바깥 출입하지 않았다’, ‘모든 책을 불살라 버렸다’ 혹은 ‘똥통에 빠져 미친 척했다’라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때 머리를 스스로 깎았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때부터 전국을 돌아다닌다. 매월당 김시습은 이를 ‘탕유(宕遊)’라 표현했다.
하지만 매월당은 한양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세조 재위 기간 이뤄진 ‘원각사 낙성회’에 참여해 찬시(讚詩)를 지었으며, 도첩(度牒, 국가가 인정한 승려증)을 받기도 했다. 세조의 환도 명령을 무시하고 다시 경주 금오산으로 돌아갔지만, 훗날 수락산에 머물면서도 한양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하다.
김시습의 삶은 당대부터 현재까지 논쟁적이다. 지배적 조류로 성리학이 자리 잡아가던 시기에 불학(佛學)과 도학(道學)을 논했고, 왕도정치의 이상이 좌절되면서는 출가자로 삶을 살았다. 인생 중후반기, 대부분의 삶은 설잠(雪岑)이라는 승려로서의 삶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김시습의 삶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출발해 부여 무량사에서 마감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설잠’보다는 ‘매월당(梅月堂)’이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하다. 이 역시 우여곡절이 있었을 터.
방외인(方外人).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은 김시습을 지칭하는 단어다. 그럼에도 월간 「불광」에서는 승려로 삶을 살았던 설잠 김시습을 알아보고자 했다. 그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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