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창간 50주년] “마음 잘 쓰는 데에서 불가사의한 도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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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 창간 50주년] “마음 잘 쓰는 데에서 불가사의한 도리가 나옵니다”
  • 사기순
  • 승인 2024.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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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불광 ⑧ 1997~2005
교해선림 | 청도 운문승가대학장 명성 스님

지난 9월 17일 경북 청도 호거산 운문사 만세루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법석이 펼쳐지고 있었다. 30여 년을 하루같이 수행의 모범을 보이며 운문승가대학을 한국불교 최대의 승가대학으로 일구어 1,100여 분의 비구니 제자스님들을 한국불교의 동량으로 키워낸 운문승가대학장 명성 스님의 고희기념 불교학논문집 봉정식이 바로 그 화제의 현장. 명성 스님의 덕화를 기리는 사부대중의 마음 마음이 절절한 감동의 물결을 이룬 그날, 하늘도 기쁨을 함께하는 듯 산하대지가 환희로 충만하였다. 

세간에서는 스승이 부재한 시대임을 한탄하고 있는 이즈음,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스님이 계시기에 너무나 행복하다”는 후학스님들의 한마디만으로도 명성 스님의 덕망과 지혜의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극정성 초발심으로 정진하라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이라, 머리털은 희어도 마음은 희어지지 않는다는 서산 대사의 말씀처럼 이마에 주름살은 잡힐지언정 마음자리 주인공의 주름살은 잡히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늘 동안(童顔)의 밝은 모습으로 매사에 젊은 학인들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수자상(壽者相)은 일찌감치 타파하신 듯 늙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항상 초발심 때의 그 생생한 마음으로 수행정진하는 스님의 출가 인연 이야기가 신심을 북돋운다.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현전을 많이 읽었는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현을 닮아야겠다’는 마음을 키워나갔지요.” 

관세음보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스님의 이상형은 관세음보살이었다. 매사 ‘관세음보살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아무리 어려운 일에 맞닥뜨려도 속상하다거나 힘든 적이 없었다. 관세음보살 같은 마음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만사가 원만했던 것이다. 

20대 초반 진리에 대한 갈앙심이 더욱 깊어져 갖가지 종교서를 지극정성 읽었다. 어느 여름날 개울가에서 책을 읽다가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일견 징그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측은한 마음이 더 컸다. ‘축생의 몸을 해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뱀을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신이하게도 곧바로 그 자리에서 뱀이 죽은 것이다. 지금껏 그 순간 우연의 일치로 뱀이 죽었는지, 책을 지극하게 읽으면서 뱀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한 공덕으로 몸을 바꾸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그 일은 지금껏 산 교훈으로 자리 잡았다. 

“매사 정성을 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정성이 부족한 것을 반성하고 지극정성으로 행하면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뜻하는 바가 있어도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님께서는 원력만 세우면 무슨 일이든 그 원력의 결실이 알차게 맺어지는 데는 지극정성, 언제 어느 때나 초발심의 생생한 마음으로 지극하게 정진하는 데 그 비결이 있었던 것이다. 

 

5년 만에 전강받고 비구니 교육에 몸 바치다 

출가 전 한때 교직에 몸담은 적도 있었던 스님은 홀연히 해인사 국일암(선방)의 선행(善行) 스님을 은사로 삭발입산하였다. 행자시절 공양주 소임을 살면서 치문과 초발심자경문을 이수하였고, 일구월심 공부길이 열리기를 발원했다. 6·25전쟁 중이었는지라 총성과 포격소리가 산중에 요동치는 상황이었는데도 흔들리지 않고 지극한 기도를 올린 덕분인지 뜻대로 공부길이 열렸다. 

“스승복이 많아 모두 일곱 분의 스승을 모셨습니다.” 

스님은 당대의 대강백이셨던 관응 스님(사집), 경봉 스님(동학사, 원각경), 운허 스님(능엄경), 만우 스님, 탄허 스님, 성능 스님(선암사)들을 모시고 경전공부에 매진하였다. 마침내 성능 스님 회상에서 대교를 마치고 전강을 받았다. 

“어느 날 노장님께서 ‘오늘부터 전강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좌복을 하나 밀어주시더군요.” 

출가한 지 5년 만에 파격적으로 전강을 받은 것이 어찌 이생만의 일이겠는가 싶다. 출가도 공부도 불사도 다 다겁생의 인연의 소치이리라. 

“강원에서 경전을 가르치면서 내전과 외전을 다 겸해서 현 시대사조에 부응해야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실했지요.” 

선암사 강원에서 꼬박 3년간 강의를 하면서 스님은 종단 교육의 현실을 절감, 서울의 청룡사 강원에서 꼬박 10년간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동국대학교에서 학문연찬에 힘썼다. 

“명성 스님이 박사과정을 수료한 직후 당시 지도교수였던 김동화 박사님의 청을 마다하고 운문사에 내려와 비구니 후학양성에 평생을 바친 것은 크나큰 보살의 서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광우 스님(전국비구니회 회장)의 말씀처럼 당시 교수직을 사양하고 스님이 산중강원으로 돌아온 일화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 당시 김동화 박사가 “시골에서 하는 공부는 서울에서 낮잠 자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까지 대학강단에 남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문사로 내려온 것은 비구니 후학들에 대한 스님의 남다른 사랑 때문이었다. 

포교현장, 선방, 강원, 대학 강단 등에서 한국불교발전의 주춧돌을 놓고 있는 운문승가대학 졸업생들의 “개개인의 몫을 원만하게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신 명성 학장스님께 늘 감사드린다”는 찬사가 무색할 정도로 스님의 비구니교육에 대한 열정은 깊다. 

운문승가대학이 전인적 인격완성과 불법교화에 필요한 다양한 교과과정과 특별활동 프로그램·교육시설·도서실·시청각교육실·컴퓨터실 등 최고의 환경을 갖춘 교육전당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비구니 강원 최초로 승가대학원을 개설한 것도 다 스님의 “비구니스님들이 한국불교에 대한 책임과 지도력을 가지고 각계각층에서 불교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조력하겠다”는 원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심(公心), 기도가 불사와 화합대중의 원동력 

운문사를 찾는 사람들은 매번 놀라곤 한다. 갈 때마다 적재적소에 새롭게 신축된 건물에 놀라고, 그 넓은 도량 구석구석이 어쩌면 그렇듯 정갈하고 반듯한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푸릇푸릇 살아 있는 아름다운 생명력에 놀라워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와서 쉬고 싶고 살고 싶은 도량, 그야말로 운문사가 청정수월도량이 된 것 또한 스님의 공덕임을 알고 있던 터라 그 어마어마한 불사의 힘에 대해 여쭈었다. 

“다 사부대중의 공덕이고 부처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지요”라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상좌스님이 귀띔을 해준다. 

“학장스님께서 사심 없이 청정하게 공심(公心)으로 사셨기 때문에 이 큰 불사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투명한 재정을 원칙으로 세워놓으시고, 단 한 번도 사중돈을 개인적으로 쓰신 적도 없고, 단 한 푼도 허투루 쓰는 일 없이 공사 분명하게 정말 알뜰하게 사셨습니다. 요만한 못이라도 줍는 스님을 뵈면서 ‘복을 하나 줍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았지요.” 

1970년 운문사 강주로 운문사에 첫발을 내디딘 스님은 1977년 운문사 주지소임을 겸임하면서 운문사를 새롭게 변모시켰다. 범종 주조를 비롯하여 종각, 요사채, 대웅전 신축, 만세루 보수 등 10여 동에 불과하던 가람을 40여 동의 전각이 자리한 대가람으로 변모시켰다. 

“학인스님들 수용할 공간이 비좁아서 불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전국에서 비구니스님들이 수학하고자 몰려드는데 교육장소며 요사채가 마땅치 않아 방학 동안 전국의 사찰을 거의 다 돌아다니며 화주를 했다. 가는 곳마다 동참해준 덕분에 요사채 불사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었고, 그 후로도 계속 필요에 따라 불사를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편 피를 나눈 형제도 함께 살다보면 불협화음이 잦은데, 250여 명이 넘는 학인과 수많은 대중스님들이 아름다운 화합의 승가공동체를 일구면서 사는 것 또한 신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좌스님의 은사스님에 대한 찬탄이 곧바로 이어진다. 

“그 또한 학장스님 덕분이지요. 스님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아침이면 염주를 돌리시며 문수기도를 하시면서 전 도량을 도십니다. 잘못된 것을 일일이 바로잡아 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상하게 살펴주시지요. 스님의 기도 힘으로 도량이 청정해지고 모든 장애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했던가. 스님의 올곧은 신심과 기도정진, 매사에 철저한 생활태도는 후학들의 귀감이 되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운문의 가풍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마음을 둥글고 크게 쓰고, 매사에 진실하라 

“마음을 잘 쓰는 것이 복 중의 제일이요, 언제 어느 때나 진실하게 임하면(卽事而眞) 만사가 형통입니다.” 

유식학을 연구하여 석·박사 학위를 받고, 화엄경을 35회 이상 강의하는 한편 팔만대장경을 두루 익힌 스님은 ‘불교는 마음을 밝히는 종교’임을 역설하시며 마음을 잘 쓸 것을, 매사에 진실할 것을 간절하게 일러주신다. 

“학장스님의 일상생활 그대로가 수행이십니다. 스님처럼 평소에 복을 많이 지으시면서 빈틈없이 철저하고 진실하게 사시는 분도 참으로 드물 겁니다. 노끈 하나를 버릴 때도 매듭을 풀어서 버리시고(원결을 짓지 않기 위함), 물건이며 시간이며 얼마나 알뜰하게 쓰시는지,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도 가르치시랴 불사하시랴 그 바쁜 가운데서도 수행의 여가에 손수 만드신 것들입니다.” 

명성스님작품전시회장(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 장학기금마련)을 둘러보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미 수십 년 전에 국전에 입선한 경력을 가진 스님의 글씨가 빛을 발하고, 한지를 꼬아 만든 발, 항아리, 차 받침 등 갖가지 지승공예품이 프로의 수준을 능가한다. 그뿐만 아니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한지를 직접 만드셨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기도하며 삼매의 경지에서 길어 올린 작품이기 때문이리라. “我有一布袋 虛空無圭碍 展開遍十方 入時觀自在(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허공처럼 걸림이 없다. 펼쳐 놓으면 온 우주 법계에 두루하고 들어갈 적엔 관자재로다)”라는 포대화상 게송이 눈길을 끈다.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그 게송과 스님의 생애가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인생을 만약 주머니에 비유한다면 스님의 주머니는 마치 포대화상의 그것처럼 걸림 없이 온 우주법계에 두루한 자비와 지혜와 복덕의 주머니로 만중생에게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불가사의한 포대가 아닐까 싶다. 

 

*2000년 10월호(통권 312호)에 실린 사기순 기자의 명성 스님의 인터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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