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평양에 세워진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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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평양에 세워진 사찰
  • 오택현
  • 승인 2024.03.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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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사, 누구를 위한 사찰일까?
북한 당국에서 근래 복원한 평양 정릉사 전경(사진 출처 『북한전통사찰 1』, 154쪽).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제공

평양에서 발견된 고구려 사찰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됐다. 고구려 소수림왕이 372년에 5호 16국 중 하나인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이다. 이후 광개토왕이 393년,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고구려 사회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사찰에 대한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수도였던 지역은 현재의 환인·집안·평양이다. 환인과 집안은 중국에, 평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에 위치한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인해 동북 지역의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있으며, 북한에서 발간된 발굴보고서 및 자료에는 북한 사회를 찬양하는 글로 인해 금서(禁書, 간행 및 소장, 열람을 금한 책이나 문서)로 지정돼 관련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고구려의 사찰 흔적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헌에 보이지 않는 사찰의 흔적은 북한이 평양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북한은 대동강을 중심으로 개발하고자 했기에, 대동강 유역에 위치한 기존의 유적들에 대해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여러 사찰이 확인됐다. 평양에서도 고구려 불교의 흔적, 사찰의 흔적이 확인된 것이다.

 

고구려 사찰의 특징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각각의 국가 상황에 따라 수용·변용됐다. 대표적인 것이 금당과 탑의 배치다. 백제의 가람배치는 1탑 1금당(한 개의 법당에 하나의 탑)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정릉사지가 대표적이며, 이러한 금당과 탑의 배치는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영향을 줬다. 신라의 가람배치는 2탑 1금당으로 보이는데, 감은사지와 불국사가 대표적이다. 고구려의 가람배치는 3탑 1금당으로 추측한다. 정릉사지, 금강사지, 원오리 사지, 상오리사지 등은 8각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 세 방향에 금당이 있는 구조다. 물론 고구려·백제·신라의 모든 공간이 이처럼 동일한 공간구조를 가진 것은 아니며, 대체적인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고구려 사찰의 공간구조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기단이 8각이라는 점이다. 정릉사지, 금강사지, 원오리사지, 상오리사지 모두 3탑 1금당의 형식에 8각 기단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8각 기단을 고구려 사찰의 특징이라고 봤다. 

이에 북한에서는 고구려 사찰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정릉사를 복원하기로 했다. 북한은 정릉사를 전(傳)동명왕릉을 위한 능사(陵寺, 능을 지키기 위해 능 근처에 지은 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정릉사를 복원할 때 (전)동명왕릉을 염두에 뒀다. (전)동명왕릉의 능사로 알려진 정릉사를 더 살펴보자. 

 

처음으로 알려진 고구려 사찰, 정릉사

문헌자료에 기록된 고구려 사찰은 많지 않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알려진 고구려 사찰 중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청암리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토성리사지 같이 발굴 당시 ‘지역명’+‘사지’를 붙여 사찰명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간혹 사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정릉사다. 

(전)동명왕릉과 함께 북한의 정릉사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이 발굴조사로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 사찰을 찾을 수 있었다. 발굴된 유물로 ‘정릉사’라는 사찰의 이름과 고구려 시기에 창건된 사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출토된 수막새에서 정릉사는 6세기 초반에 축초됐으며, 6세기 후반까지 지속해서 수리 및 수축, 증·개축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혀졌다.

정릉사지 실측도 전제헌의 『동명왕릉에 대한 연구』(사회과학출판사, 1994) 96쪽 도면을 수정.

정릉사는 총 5개의 구역으로 구획돼 있으며, 건물의 초석 배치가 질서 정연하다는 점에서 공력을 들여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조를 볼 때 정릉사가 왕실 관련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찰의 이름은 발견된 기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릉사 터에서 다양한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됐는데, 문자가 새겨진 유물은 건물지와 우물에서 모두 확인된다. ‘사(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손잡이 달린 독이 많이 출토돼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정릉(定陵)’과 ‘능사(陵寺)’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돼 이 사찰을 ‘정릉사’라고 명명하게 됐다. 

이외에도 ‘정(定)’, ‘정릉사강구(定陵寺講口)’, ‘만(卍)’, ‘중승(衆僧)’, ‘비(飛)’, ‘감(堪)’, ‘소왕(小王)’, ‘약원(弱元)’, ‘귀부(帰夫)’, ‘임목(林木)’, ‘고구려(高句麗)’ 등의 문자가 새겨진 유물들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모두 파편으로 남겨져 그 실태를 명확하게 살펴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북한의 발굴보고서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정릉사는 (전)동명왕릉과 관련된 것일까. 정릉사의 실체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풀어보자. 

 

정릉사에 대한 의문 ①
8각 기단은 고구려의 독특한 문화인가?

북한에서 발간한 발굴보고서에는 정릉사를 (전)동명왕릉과 연결된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구 초기에는 북한의 발굴보고서가 유일한 정릉사 관련 기록이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차용하는 선에서 정릉사를 이해했다. 그래서 (전)동명왕릉과 연결해서 보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정릉사와 (전)동명왕릉을 연결 짓고자 한다면 (전)동명왕릉이 정말 동명왕릉인지, 고구려 시기에 만들어진 사찰의 영역은 어디까지인지, 정릉사지가 (전)동명왕릉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다.

먼저 8각 기단에 대해 살펴보자. 팔각형 건물지는 고구려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유형으로 보고 있어, 고구려만의 독특한 문화로 이해한다. 팔각기단은 청암리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토성리사지 등에서 확인되며 발해에서도 일부 나타난다. 이를 두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신라의 경주에서도 팔각기단이 보여 고구려의 독특한 문화일까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원오리사지는 고려시대 건물지가 전체적으로 중복돼 있어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청암리사지도 고고학적 층위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층위 조사 내용이나 폐사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없이 팔각 건축 터만 가지고 고구려 시기라고 언급할 뿐이다. 게다가 신라에서도 영녕사지와 초기 제사유적인 나정에서도 팔각 건축 터가 보인다. 나정의 팔각 건축 터는 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7세기 후반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신라의 제사유적에 고구려의 독특한 특징인 팔각 건축 터를 만들 이유가 있었을까. 그래서 팔각을 고구려만의 문화로 이해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도 팔각기단이 유행하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10세기 고려시대 무렵이다. 당시 중국의 팔각기단이 우리나라에 유입됐는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남양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창경궁 팔각칠층석탑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그렇다면 청암리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토성리사지는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물론 고구려시대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만 고려시대에 해당 사찰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특히 정릉사 건물은 실용적, 조형적, 구조적 측면에서 두 단계에 걸쳐 건설됐을 가능성이 크다. 정릉사의 구조를 보면 사찰의 뒤편을 후원으로 이용했는데, 이는 궁전건축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실용적, 조형적, 구조적 측면을 염두에 둔 정릉사는 5구역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점차 사역(寺域, 절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 안)이 확장됐기 때문이라 추정한다. 그래서 사역이 확장되면서 대칭구조가 무너졌다. 사역의 확장은 백제에서 창건한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시대에 창건됐지만,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시대에 맞춰 개보축이 이뤄지게 된다. 

고구려의 팔각기단은 고구려의 독특한 문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보축 과정에서 중국의 문화가 유입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미 수막새를 통해 정릉사가 고구려 시기에 만들어졌음이 증명됐다. 팔각기단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해 보는 것이 어떨까.

‘능(陵)’ 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
정릉사에서 출토된 ‘사(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손잡이 달린 독
‘정릉(定陵)’, ‘능사(陵寺)’가 
새겨진 토기 파편

 

정릉사에 대한 의문 ②
정릉사는 (전)동명왕릉의 능사인가?

정릉사는 왕실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추정되며, 북한에서는 이를 (전)동명왕릉과 연결해 생각한다. 그래서 (전)동명왕릉의 능사로 정릉사를 언급하고 있다. 능사의 사전적 의미는 ‘능을 지키기 위해 능 근처에 지은 절’이라는 뜻이다. (전)동명왕릉의 능사가 정릉사라면 정릉사는 왕릉을 지키기 위해 지은 절이 된다. 과연 정릉사는 (전)동명왕릉만을 위해 창건된 절일까?

복원된 정릉사를 보면 정릉사는 (전)동명왕릉을 위해 창건된 사찰로 보인다. 하지만 이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진 복원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북한에서는 1993년 (전)동명왕릉과 방향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릉사의 방향을 틀어서 복원했다. 남겨진 기단과 일치하지 않는 곳에 정릉사를 세운 것이다. 심지어 이어져 있는 기단의 중간을 잘라 담을 둘렀으며, 기단의 방향과 다르게 담을 둘렀다. 이는 (전)동명왕릉을 의식하고 복원이 이뤄졌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복원 전과 복원 후의 항공사진을 보면, 정릉사의 복원이 (전)동명왕릉에 맞춰 진행됐음이 더욱 명확하게 확인된다. 

복원 전의 (전)동명왕릉과 정릉사지
(전)동명왕릉에서 일직선으로 선을 그으면, 정릉사지의 뒤쪽과 서쪽 건물터를 지나게 된다. 
복원 후의 (전)동명왕릉과 정릉사지
(전)동명왕릉의 진입로에 맞춰서 정릉사를 시계방향으로 살짝 틀어서 복원했음을 알 수 있다.

정릉사를 (전)동명왕릉에 맞춰 복원했다면, 북한은 이 왕릉에 큰 의미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은 과연 (전)동명왕릉의 실체는 무엇인가이다. 북한에서는 5세기 집안에 위치하던 동명왕릉을 옮겨와서 평양에 이치한 것이라 한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동명왕릉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무덤 변천을 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다. 초기 고구려는 돌무지무덤에서 계단식 적석총(積石冢, 석곽 위에 흙을 덮지 않고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만들어진다. 이후 기단이 있는 돌무지무덤 혹은 굴식 돌방무덤을 사용한다. 평양에도 이 두 무덤 양식이 대부분이다. 북한의 주장대로 5세기에 동명왕릉을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겨왔다면 동명왕릉의 축조 시기는 5세기다. 하지만 정릉사지는 수막새를 통해 6세기로 창건 시점이 확인됐는데, 시기적으로 창건 시점이 맞지 않는다. 그리고 무덤의 제재와 고구려 무덤의 시기적 발전상을 염두에 두면 (전)동명왕릉보다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5세기 무렵의 왕 중 한 명의 무덤일 수도 있다. 

평양을 천도한 장수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광개토왕의 무덤을 여전히 집단에 남겨줬고, 안장왕은 531년, 평원왕은 560년에 졸본(卒本,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도읍한 곳)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최소 560년까지는 동명왕릉이 평양이 아닌 집안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5세기에 축조됐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동명왕릉 부근의 고구려 유적
(전)동명왕릉 부근 고구려 유적 분포

그렇다면 정릉사는 왜 만들었을까. 궁전건축과 사찰건축이 동시에 사용됐다는 점, 지속적으로 사찰이 확장됐다는 점에서 왕실과 관련된 사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동명왕릉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정릉사는 누구를 위한 절이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주변의 무덤군인 진파리고분군과 연결되는 듯하다. 진파리고분 주변에는 다양한 무덤이 존재한다. (전)동명왕릉과 비슷한 구조인 무덤도 확인된다. 

백제에 송산리고분군과 능산리고분군, 신라의 대릉원과 같이 무덤이 밀집돼 있는 진파리고분군에 관련 사찰을 세운 것은 아닐까. 능산리고분군 옆에 능사가 있었던 것처럼 진파리고분군 근처에 정릉사가 있던 것을 아닐까.

정릉사는 고구려에서 만든 사찰이며, 이름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릉사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관심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택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태학사과정 및 동국대 WISE캠퍼스 강사. 동국대 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자문화와 동아시아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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