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광개토태왕비 이해하기 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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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광개토태왕비 이해하기 ➋
  • 조경철
  • 승인 2024.03.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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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연호 ‘영락(永樂)’, 왜 중요한가?
국립중앙박물관 1층 홀 중앙에 광개토태왕릉비를 디지털로 복원해 탁본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뒤편으로 경천사탑이 보인다. 

2024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 1층 홀 가운데 광개토태왕릉비 탁본이 걸렸다. 1880년대 비석이 훼손되기 전 탁본한 몇 안 되는 원석탁본 가운데 하나를 재편집한 것이다. 청명 김창순 선생이 소장했던 탁본이라 ‘청명본’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박물관 1층 홀을 지켜온 유물은 국보 경천사석탑으로 조각이 화려하고 이국적인 탑이다. 13층 탑 또는 10층으로 높이 솟은 탑이라 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이 탑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원나라 간섭기 때 만들어진 이 탑은 몽골 황제와 황후 황태자를 위해서 세운 탑이고, 대표적인 친원파인 강융과 고용보가 돈을 대서 만든 탑이다. 그리고 탑을 만든 기술자는 몽골의 장인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구석기부터 이 땅에 남겨진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전시하는 곳이다. 경천사탑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처럼 전시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여러 차례 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별관을 따로 지어 경천사탑을 전시하자는 것이었다. 자랑스러운 문화재는 아니더라도 경천사탑 또한 어떤 문화유산보다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우리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유산을 전시하자는 것이었다. 필자가 제시한 문화유산은 반가사유상, 광개토태왕릉비, 한글 등이었다.

먼저 반가사유상은 2021년 2층 사유의 방에 들어섰다. 이제 박물관에 왜 가냐고 물어보면 ‘반가사유상 보러 간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다 올해 1월 광개토태왕릉비 탁본이 1층 홀 중앙에 전시됐다. 물론 경천사탑도 1층 홀 끝에 전시돼 있지만, 이제 광개토태왕 탁본이 관람 동선상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돼서 감회가 새롭다. 

 

광개토태왕릉비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이번에 새로 전시된 광개토태왕릉비 탁본 전시가 계기가 됐다. 1,775자의 능비에는 추모(주몽)에서 광개토태왕까지 이어지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왕실의 간략한 계보, 태왕의 업적, 그리고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한 여러 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수묘인) 등이 언급돼 있다.

광개토태왕릉비 ‘이구등조 호위영락태왕(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부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이구등조 호위영락태왕(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태왕이 왕위에 오른 해는 18세(2×9)이고 그를 영락태왕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영락태왕은 ‘영원한 즐거움을 주는 태왕’이란 뜻이다. 능비에는 태왕의 업적을 ‘국부민은 오곡풍숙(國富民殷 五穀豐熟)’, 즉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이 늘어나고 오곡이 잘 익어 풍년이 들었다’고 했다.

광개토태왕릉비 ‘국부민은 오곡풍숙(國富民殷 五穀豐熟)’ 부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연호는 중국에서 시작됐고 원칙적으로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통일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도 연호를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사용한 연호는 광개토태왕이 사용한 ‘영락’이었다. 백제 칠지도에 나오는 연호를 가장 오랜 연호로 보기도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광개토태왕은 391년 영락 연호를 반포했다. 영락 원년은 391년이다. 391년은 광개토태왕릉비에도 매우 중요한 연대다. 능비에 쓰인 1,775자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소위 ‘신묘년(391)’조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통설은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 6년(396)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로 해석한다.    

필자는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왔다. 백잔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 6년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로 해석한다.

이처럼 능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 백제 토벌기사다. 영락 6년 태왕이 백잔(백제의 멸칭)을 토벌한 이유는 391년부터 백제가 왜를 끌어들이고 신라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락이란 연호를 사용한 391년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가 감히 영락태왕의 권위에 도전했기에 백제를 토벌해서 58성 700촌을 점령했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디지털로 복원한 광개토태왕릉비문을 볼 수 있다. 

百殘違誓與倭和通(백잔위서여왜화통)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약을 맺고 내통했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야)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기틀을 여시니…  ”

 

‘영락’이라는 연호

광개토태왕릉비에 불교와 관련된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주목할 부분은 ‘영락(永樂)’이란 연호다. 영락은 연호이기도 했지만, 생전에 영락태왕이란 호칭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도 매우 컸다. 그 의미가 어떻게 불교와 관련되는지 짚어보자.

‘영락(永樂)’의 뜻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영원한 즐거움은 특정 종교나 특정 시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영락교회의 이름으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의 ‘영락’은 기독교적 의미다. 

영락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재위 1360~1424) 연호이기도 하다. 영락제의 영락은 유교적 의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영락이라는 단어가 꼭 불교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이 한때 승려였고, 그의 아들인 영락제도 승려 요광효(1335~1418)와 정난의 변을 함께했다. 요광효는 태자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영락제의 ‘영락’ 연호에는 불교적 의미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락이란 연호에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국가가 중국에 있던 5호 16국 시대 전량(前涼, 301~376)이다. 영락이라는 연호를 쓴 최초의 국가다. 전량의 5대 군주 장중화가 346~353년까지 썼던 연호다. 

물론 전량의 영락도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낙토’ 등의 의미를 지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이나 종교에 가까운 의미인지 말뜻으로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전량이란 나라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중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쪽은 동진이었고 북쪽은 여러 나라로 분리돼 5호 16국의 나라가 멸망과 건국을 반복했다. 전량은 지금의 감숙성에 위치했던 나라로 과거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활발히 전해졌던 지역이기도 하다. 

『위서』 「석로지(釋老志)」에 의하면 전량은 1대 군주인 장궤(張軌, 재위 301~314) 이래로 대대로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랬다면 전량의 영락은 불교의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낙토’의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도 전량의 영락이란 연호를 알고 있었고, 그 뜻이 좋아 자신의 연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감숙성의 전량과 고구려가 너무 떨어져 있어 고구려가 과연 전량의 ‘영락’이란 연호를 알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수 있다.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5호 16국 가운데 하나인 전진이었다. 전진은 처음에 전량과 이웃했고 전량은 곧 전진에 복속했다. 전진이 동쪽으로 진출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게 되자 고구려는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즉, 고구려는 전진을 통해 전량과 전량의 연호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용 과정에서도 감숙성 등의 실크로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지역과 고구려 사이에는 일찍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경에도 ‘열반영락’이 나온다. 『현우경』에 ‘일체 생사의 고통을 널리 제도하여 열반영락(涅槃永樂)의 곳에 안착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고승전』에 기록된 강승회(?~280)는 ‘악을 행하면 지옥의 오랜 고통(지옥장고地獄長苦)이 있고, 선을 닦으면 천궁의 영원한 즐거운(천궁영락天宮永樂)이 있다고 했다.

관람객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1층 홀에 전시된 광개토태왕릉비 탁본을 관람하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영락

광개토태왕이 연호를 반포한 391년 전후의 고구려 상황 역시 중요하다. 당시 동진이나 5호 16국에서 사용했던 연호는 왕이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하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이었다. 만약 광개토태왕의 영락도 유년칭원법이라면 왕의 즉위년은 390년이 되고 영락 원년은 391년이 된다. 지금은 보통 즉위한 해 연호를 사용했다고 보는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으로 보고, 391년을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이자 영락 1년으로 보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는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해를 392년으로 본다. 우리가 보는 한국사 연표는 고대사의 경우 모두 『삼국사기』를 따르고 있는데,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해는 능비에 따라 392년이 아닌 391년으로 본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고국양왕 9년 392년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기사가 있다. 

고국양왕 9년(392)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수호하니 신라왕이 조카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3월에 하교하기를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 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게 하였다. 5월에 왕이 돌아가니 고국양에 장사하고 호를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고국양왕 때로 볼 것인가, 아니면 광개토태왕 때로 볼 것인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능비에 의하면 광개토태왕이 390년 혹은 391년 즉위했으므로, 아버지 고국양왕이 392년 죽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서로 맞지 않는다. 

이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국양왕이 병이 들어 태자 담덕(談德, 광개토태왕)에게 양위하고 후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이전에 사망했는데 392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재됐을 수도 있다. 다만 고국양왕이 병들어 있었다면 392년의 조치는 실질적으로 태자 담덕의 주도하에 일어난 것으로 봐야겠다. 

따라서 391년 영락 연호를 반포한 광개토태왕의 능비 기록을 따른다면, 고국양왕 9년 기사는 고국양왕의 사망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 광개토태왕 영락 2년(392) 기사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정덕본) ‘하교숭신불법구복(下敎崇信佛法求福)’이라는 글이 보인다.

정리하면, 광개토태왕은 391년 영락 연호를 반포했다. 영락 2년 392년 3월에는 ‘숭신불법구복(崇信佛法求福)’이란 교서를 내렸다. ‘모두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란 교서다. 영락 3년 393년에는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지었다. 광개토태왕이 왕이 된 후 추진한 위와 같은 불교 정책들을 보면 그가 추구한 정책 방향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락’의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낙토가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는 연이어 내놓은 ‘숭신불법구복’과 ‘평양 구사창건’에 바로 드러난다.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고 온 나라가 절로 가득 찬다면 바로 그것이 영락이다.

훗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광개토태왕릉비를 그냥 지나쳤다. 규모가 너무 커서 중국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을 가게 된다면 지나치지 말고 태왕능비에서 ‘영락태왕’을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다.  

 

사진. 유동영

 

조경철
연세대 사학과 객원교수, 한국사상사학회 회장.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이 조사한 한국사 분야 학술지 인용지수 2위를 차지했다. 저서로는 『백제불교사연구』, 『나만의 한국사』 등이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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