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비가 우뚝 서 있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지린성) 집안시(集安市, 지안시)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개마고원의 수량을 받고 노령산맥을 만나 형성된 분지 지형이다. 압록강 중상류에서도 가장 넓은 평야 지대로 산과 물이 깊고 험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좋고 땅이 기름지며 산짐승과 물고기가 많아 고구려가 두 번째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비의 재발견
지금의 집안 지역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발해를 비롯해, 거란·여진 왕조들이 관할했다. 청나라 때에는 백두산 일대를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 하여 사람들이 들어가 살지 못하는 금지 구역으로 정했다. 19세기 후반 청은 이 지역의 봉금(封禁, 출입을 금함)을 해제하고 회인현(懷仁縣, 1877년에 청나라가 지금의 요령성과 길림성 지역에 설치한 현)을 설치한다. 현의 초대 책임자인 장월(章樾)의 수하이자 금석문에 조예가 있던 관월산(關月山)이 역내의 집안 지역을 조사하던 중 거대한 비석을 발견하고 글자를 확인함으로써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태왕의 시호)’의 비(이하 광개토태왕비)가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광개토태왕비는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다. 서남쪽으로 360m 지점에 태왕릉이 있고 반대편 약 2km 동북쪽에는 장군총이 있다. 비의 높이 6.39m, 각 면의 넓이는 1.34~2m이며, 무게가 약 37톤이다. 석질은 연한 녹회색의 기공이 있는 안산암질(andesitic) 또는 석영안산암질(dacitic) 용결 래필리응회암(welded lapilli tuff)이다.
2005년 고구려연구재단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비석의 원산지는 집안시의 동북쪽 양민(良民) 일대나 압록강 변 북한의 자성군 어디쯤일 것으로 보았다. 비석의 한쪽 면에서만 긁힌 자국이 있는데 아마도 강 혹은 계곡에 놓여 있던 암괴를 운반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외형은 불규칙한 사각기둥의 모습이며 자연석 상태에서 약간 가공한 흔적이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중국에서 발전한 전형적인 석비가 아닌 북방 계통의 선돌 모습에 오히려 가깝다.
비문은 면마다 가장자리를 따라 구획선을 치고 다시 세로로 계선을 그어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가로선은 치지 않았지만 글자를 좌우로 가지런히 맞추고 있어 장법이 단정하다. 글자는 세로가 큰 것이 약 16cm, 작은 것이 약 11cm이고 대체로는 14cm 정도로 당시 금석문 중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한다.
각 행의 최대 글자 수는 41자이고, 제1면부터 제4면까지 비면 폭의 크기에 따라 각각 11행, 10행, 14행, 9행으로 구성됐다. 제1면 제6행의 마지막 2자는 문단이 바뀌는 곳으로 비워뒀다. 제2면의 제9행과 제10행의 상부, 그리고 제4면 제1행의 상부는 하부보다 협소해 원래부터 글자를 새길 수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파악된 비문의 총 자수는 1,775자로 『삼국사기』 광개토왕조 기사보다 3배 이상 많은 기록이다.
서체의 특징
글자는 획의 굵기 변화가 거의 없이 고른 편이며 꺾이는 부분이 원만하게 운필돼 전서(篆書)의 필획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가로획의 방향이 수평을 유지하고 삐침과 파임의 끝부분에서 약간 들어 올리는 필법이 나타나고 있어 예서(隸書)의 체세(體勢)에 가깝다.
서체에 대해서는 재발견 이래 다양한 설이 제기됐다. 주로 ‘고예’와 ‘팔분’ 및 이를 포괄하는 ‘예서’ 또는 예서와 해서의 중간 서체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보다 확대된 서체 개념으로 ‘구체명석서(舊體銘石書)’, ‘국정서체(國定書體)’, ‘관방서체(官方書體)’, ‘광개토태왕비체(廣開土太王碑體)’, ‘고구려체(高句麗體)’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당시로서는 이미 옛 글자체가 된 전서나 예서, 그리고 한창 발전하던 해서의 특징들이 혼재함으로 인해 서체 명칭이 다르게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서체는 용도나 서사 재료, 개인적인 풍격 등에 따라 시기별로 다양하게 불렸다. 예컨대 갑골(甲骨)이나 종정(鐘鼎)에 새겨진 문자를 각각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 북위 시대의 비나 묘지에서 주로 사용된 해서를 ‘위비체(魏碑體)’, 명필로 널리 이름을 떨친 왕희지나 김정희의 글씨체는 각각 ‘왕희지체’, ‘추사체’ 등으로 부르는 것은 글자의 개성적인 풍격이나 예술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광개토태왕비의 서체를 고찰하면, 필획과 결구의 형태적 측면에서는 예서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하지만 내포된 예술성과 독창성 그리고 이 비가 갖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하나의 서체 양식으로 완성된 고구려만의 고유 서체인 ‘광개토태왕비체’라 할 수 있겠다.
탁본의 종류
비는 발견되자마자 큰 화를 입었다. 비에 낀 이끼를 제거한다고 비를 지키던 초천부(初天富)라는 자가 비면에 소똥을 바르고 불을 지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의 제1면과 제2면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으며 제3면 우하단의 비면도 떨어져 나갔다. 천수백 년의 북풍한설을 견뎠거늘 비석은 일순간에 처참하게 손상되고 말았다.
비에서 이끼가 제거되자 본격적으로 탁본이 제작됐다. 탁본은 금석 표면에 종이를 부착하고 먹이나 다른 안료를 묻혀 글자나 기물의 형태를 떠내는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광개토태왕비 탁본은 비면의 석회칠 여부에 따라 원석탁본과 석회탁본으로 나뉜다.
원석탁본은 비가 훼손되기는 했지만 비면과 자획에 인위적인 가공이 없는 상태에서 채탁(採拓, 탁본을 뜸)한 것이고, 석회탁본은 비면에 석회를 발라 패인 홈을 메꾸거나 아예 글자를 변형시킨 상태에서 탁출한 것이다. 원석탁본은 비면에 진흙이나 석회를 칠하기 시작한 1890년경 이전까지 대략 10여 년간 제작됐으며 현재 중국, 대만, 일본을 비롯해 한국에 모두 10여 점이 전하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복원 전시한 탁본은 국내에 소장된 원석탁본이며 북경의 전문 탁공이 채탁한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원석탁본이 출현하고 이를 저본으로 한 묵본(墨本)이 제작됐다. 묵본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투명 혹은 반투명한 종이를 원본 위에 포개어 쌍구(비문에 종이를 대고 글자 주변에 선을 그림)를 뜬 다음 곽 안에 먹물 등을 칠함으로써 원본의 형태를 복제하는 기법이다. 비문의 묵본은 일본과 중국에 각각 1점씩 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묵본은 중국에 첩자로 파견된 일제의 육군 중위 사카와 카게아키(酒匂 景信)가 1883년에 집안에서 입수해 그 이듬해 귀국하면서 가져간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원석탁본이 있는데도 묵본을 제작한 이유다. 묵본은 탁본과는 완전히 다른 공정으로 광개토태왕비처럼 규모가 큰 경우는 오히려 직접 탁본하는 것보다 훨씬 품이 많이 든다. 청나라 말기는 금석학이 유행하고 탁본 기술이 최고조에 달해 재료가 다소 열악하다 해도 탁본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금석 애호가라면 원석탁본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묵본으로 제작했다는 점은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혹여 탁본 그 자체보다는 비문의 내용에 관심을 둔 수요자를 위한 맞춤형 탁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호사가들에게 소문이 나고 탁본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1890년경부터는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변개(고쳐 바꿈)한 탁본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비면에 석회를 보수해 탁본하는 것은 개성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고유섭이 광개토태왕비를 답사했던 1938년 만주국 시대까지도 계속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1963년과 1981년 두 차례에 걸쳐 탁본 작업이 실시됐다. 이 탁본들에서는 계선의 노출이 많아지고 글자의 형태가 원석탁본에 가까워 비면에 칠했던 석회가 점차 탈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문의 연구와 쟁점
비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처음부터 제1면 6행까지로 고구려 건국신화와 왕계를 기술했다. 둘째 단락은 7행부터 제3면 8행 15자까지로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기사다. 세 번째 단락은 나머지 부분으로 가장 많은 면을 할애해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과 관련 규정을 기록했다. 국내외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내용들이 많아 고구려의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그리고 사회경제사와 사상문화사에 이르기까지 4~5세기의 역사상을 보완해 주는 그야말로 일급 사료다.
비의 연구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은 제1면의 신묘년 기사라 할 수 있다.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라는 짧은 구절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어 중시됐다. 1899년 일제의 육군 참모본부는 밀정 사카와가 가져온 묵본을 바탕으로 5년 동안 비밀리 연구한 끝에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斤)羅(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결정적 근거라고 발표했다. 한반도 병합 및 만주 진출을 위한 역사적 구실을 찾던 일제는 재발견된 광개토태왕비가 이를 증명하는 사료라고 홍보했던 것이다.
이 주장은 1930년대 민족사학자 정인보에 의해 반박됐다. 그의 논고는 해방 후에야 알려졌는데, 문장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고 하여 일제와 다르게 해석했다. 이러한 고구려 주어설은 비문의 구조적 측면이나 당시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는 역사적 정황과도 부합해 남북한 학계에서 호응을 얻었다.
신묘년 기사에서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제1면 제9행 13번째 글자이다. 묵본과 석회탁본에 이 글자가 명확히 ‘海’ 자로 나타나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후 원석탁본이 하나둘씩 발견되고 다른 형태의 자획이 확인됨에 따라 더 이상 ‘海’ 자로 보기 어렵게 됐다. 강압적인 일제 치하에서 굳어진 이른바 ‘통설’이 무너지게 됐다.
다양한 유형의 탁본 비교 연구가 진행되면서 비문에 대한 새로운 판독과 해석이 제시됐다. 1963년에는 중국과 북한이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광개토태왕비와 통구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으나 여전히 ‘海’ 자로 읽고 있다.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비문의 변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발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중국의 학자 왕건군(王健群, 왕젠췬)은 1984년 출간한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라는 책에서 비에 석회를 바른 사람은 비석을 관리하며 탁본을 제작했던 초씨 부자이며 훼손된 비면을 보수해 좋은 탁본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하여 비문변조설을 부정했다. 어쨌든 1963년과 1980년대 초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 글자는 여전히 ‘海’ 자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석회가 완전히 탈락되지 않았거나 비면에 실제로 ‘海’ 자를 새겼을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보다 적극적인 입장에서 ‘탕(盪)’ ‘(인)((因))’, ‘매(每)’, ‘(패)((浿))’, ‘사(泗)’, ‘(왕)((王))’, ‘전(沺)’ 등으로 읽는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만약 이 글자가 ‘海(해)’ 자가 아닌 또 다른 글자라면 ‘渡(도)’의 주어가 명백히 왜가 아닌 광개토태왕(또는 고구려)이 되고 백제와 신라를 ‘臣民(신민)’으로 삼은 주체 역시 광개토태왕(또는 고구려)이 되어 기존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르게 된다.
이렇듯 신묘년 기사는 4~5세기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쥐고 있음에도 연구의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비문의 판독문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3D 스캐닝, RTI 촬영 등의 다양한 판독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가 담고 있는 진실을 구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비에 대한 현장 조사를 비롯한 남·북한, 중국 및 일본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고광의
고구려연구재단 초기에 입사해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의 서체」, 「충주 고구려비의 판독문 재검토」, 『고구려 문명기행』(공저),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공저), 『혜정 소장본 광개토태왕비 원석탁본』(공저), 『충주고구려비』(공저), 『고구려의 문자문화』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