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유억불이라 표현되는 조선시대의 스님들은 유생들에 시달렸으며, 사찰을 찾는 유생들을 접대해야 했다. 금강산을 찾는 선비, 지리산을 찾는 선비들을 위해 길잡이 역할을 하고 가마에 태워 험한 산을 올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산성(山城)을 쌓거나 산성을 지키는 일이 일상화됐다. 종이와 두부를 만들어 관에 납부하기도 했다. 스님들은 왜 이런 고역을 감내했을까?
조선시대에도 예상과 다르게 꽤 많은 스님이 존재했다. 수백, 수천이 아니라 수만 명 단위로 이야기된다. ‘민의 3할이 승’, ‘영남에만 승이 10만’이라는 말이 조금 과장됐다 하더라도 조선 후기까지 적지 않은 승려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 많은 스님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개인의 실존적 고민보다는 제도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연구가 제법 된다. 이번 책에 실린 글들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도첩(度牒)과 군역(軍役)
고려의 유산을 간직한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스님들은 군역을 면제받았다. 그렇기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위정자들은 백성이 출가하는 것을 억제하고자 했다.
“양반의 자제로 승록사(僧錄司)에 보고하고 예조가 다시 임금께 보고해서 허락받으면 정전 오승포 100필을 납부”해야 출가가 허락됐고, 이렇게 출가한 승려들은 국가가 인정한 승려증인 도첩(度牒)을 받았다. 출가는 양반의 자제로 국한됐고,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출가 조건이 까다롭기에 당연히 승려들이 도첩을 받기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승려들이 줄어들었을까? 도첩을 지닌 승려는 줄어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승려들은 도첩을 지니지 못한 ‘무도첩승(無度牒僧)’으로 존재했다. 정부는 당연히 도첩을 지니지 못한 승려를 찾아내야 했지만, 그럴 의지도 방법도 없었다.
오히려 무도첩승을 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무도첩승을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관아를 짓거나, 왕실 사찰을 건립하거나 각종 건설 현장에 이들을 투입했다. 그리고 참여한 무도첩승들에게 ‘도첩’을 발급했다. 이렇게 발급된 도첩이 조선 초기에는 수백, 수천이 아니라 수만 장이 넘은 것으로 기록된다. 세조 대에는 10만 장이 발급된 경우도 있었다. 무도첩승은 짧은 경우 1~2개월 노역에 참여하면 도첩을 받을 수 있었고 군역을 면제받았다.
도첩제의 폐지
1516년(중종 11) 도첩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이전까지는 제도적으로 출가를 억제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출가 자체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출가자의 숫자가 줄어들었을까?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 수천 명을 영솔하여 집을 짓고 삼청동에 거처한 것이 … (중략) … 처음에는 총섭에게 승군을 조발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며칠 동안 부역하게 하고 각각 도첩을 지급하고자 하였습니다.”
-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임진왜란 시 의승군이 활약했고, 승군은 전쟁 후 제도화된다. 조선 정부는 성을 쌓거나 지키는 데 승려를 동원했다. 초기에는 승려를 통솔할 도총섭(都摠攝) 제도를 실시했고, 총섭이 모집한 승려에게는 도첩을 발급했다. 이후 관 주도로 승군을 통솔하면서는 전국의 승려들이 번갈아 가면서 산성을 지켰다.
승군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용을 조달해야 했다.
“지금 곡물을 더 유치하고자 하는데 공명 고신첩으로 곡식을 모으는 규례로 모은다면 800여 석을 모을 수 있으니 승 통정첩 300장, 승 가선첩 50장, 노직 통정첩과 가선첩 각 50장을 청합니다.”
- 『승정원일기』 현종 2년
“당초에 승공명첩(僧空名帖) 30여 장뿐이었으나 그중 가선첩은 사려는 자가 매우 적었습니다. 현재 다시 재력의 여지가 없으니 승공명첩으로 통정첩 수십 장을 더 얻는다면 보충해 쓸 수 있겠습니다.”
- 『비변사등록』 숙종 18년
폐지된 도첩 대신 공명첩(空名帖)이 발급됐다. 공명첩에도 종류가 제각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명첩은 일정한 관직을 제공하는 것인데, 일부 공명첩은 군역을 면해주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승려의 자격을 인정하는 도첩을 더 이상 발급하지 않았지만, 승려의 신분을 공인할 수 있는 공명첩을 발급한 것이다.
숙종 대부터는 승려를 호적에 등재하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산성 축조와 방어에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사실상 군역의 효과를 지니는 것이었고, 호적은 이를 제도적으로 통솔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적에 ‘승(僧) ○○○’ 등 신분을 기재함으로써, 승려 개인에게는 사실상 도첩의 기능을 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억불 시대인 조선시대를 관통하면서도 적지 않은 승려가 계속 존재했다. 또한 시기에 따라 변화하지만 도첩제, 호패, 호적과 같이 승려로 공인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존재했던 것이다.
영조 대 양인(良人)들이 지는 군역의 부담을 덜기 위해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됐는데, 이는 승군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이 됐다. 늘어난 부담으로 환속하는 승려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이 담당했던 역할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경우도 발생했다.
역설적이게 ‘승려의 환속’을 막기 위해 노력한 모습도 보인다. 승려를 공인하는 도첩, 호패, 호적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군역(軍役)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물(貢物)과 잡역(雜役)
조선시대에도 사찰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사찰은 요즘 같으면 면세의 혜택을 받기도 했고, 노비를 지급받기도 했다.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국가가 관리하던 36개 사찰과 왕실의 원당 사찰 등을 제외하면 혜택이 없어졌다. 일반 민(民)이 부담하던 조세와 역(役)을 사찰도 납부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일종의 국가 지정 사찰은 해당 사찰이 부여받은 역할 외에는 잡역을 면제받았다. 이를 제외한 대부분 사찰은 공물(貢物)과 잡역(雜役)을 부담해야 했다. 종이와 부채를 제작하는 일, 채소, 포도, 송이 등 다양한 물품들을 관아에 납부해야 했고, 유생 접대와 같은 잡역을 승려들이 부담해야 했다.
‘왕실과 관련된 원당(願堂) 사찰로 지정되느냐 못 되느냐’는 해당 사찰이 부담해야 할 공납과 잡역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원당 사찰에 유생을 접대하게 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어떤 사찰은 잡역을 피하기 위해 원당 사찰을 사칭하기도 했다.
원당뿐 아니라 여타의 형태로 지정 사찰이 되면, 잡역이 면제되거나 승군으로 차출되지 않았다. 사찰의 주요 소임자들은 해당 사찰을 원당 사찰로 유지하기 위해, 지방관아와 직접 관련을 맺기 위해 혹은 사대부들과 관련된 사찰(분암, 혹은 영당 사찰)로 관계 맺기 위해 노력했다. 서원(書院)의 속사(屬寺)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관내에 한 사찰이 원당이나 속사로 지정되면 다른 사찰의 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이 경우 기관 간에, 혹은 사찰 간의 마찰이 필연적으로 빚어지게 된다.
연구자들은 사찰과 승려들이 담당했던 공납과 잡역이 큰 폭으로 늘어난 시기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특히 대동법(大同法) 실시와 관련 있다고 본다. 전쟁으로 토지가 황폐화되고 조세를 담당해야 할 인원이 줄었다. 현물을 납부하던 체제가 대동미로 바뀌면서, 종이 같은 현물 납부를 사찰에서 부담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사대부들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지방에 내려가면 주변의 뛰어난 경치를 관람했다. 금강산, 지리산, 청량산 같은 곳이 이름났다. 지방관의 책임자들은 유람하러 오는 관료와 사대부를 접대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유람은 적은 인원이 아니었고, 접대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승려들은 이들의 길을 안내해야 했고, 가마에 태워 유람을 도왔다. 산속에서 이들이 묵는 곳은 당연히 사찰이었다.
이 같은 일은 원당과 같은 사찰에 소속되지 못한 승려들이 담당해야 할 공인된 잡역 중 하나였다. 일이 고되기에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잡역이었다.
일부 시기와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조선시대에 사찰과 승려는 천대받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찰과 승려는 국가의 공인 아래에서 유지됐다. 승려의 수가 적지 않았고, 이들은 양인이 져야 할 군역을 담당했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찰에서 공납하던 공물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왕실과 사대부들의 개인적 신앙, 혹은 기복과 제사 같은 의례 행위가 불교를 유지시키는 한 축이었다면, 이 같은 공인 제도는 또 하나의 축이었다.
참고문헌
양혜원, 「조선초기 법전의 ‘승’ 연구」, 서울대 대학원, 2017
김선기, 「조선후기 승역의 제도화와 운영 방식」, 동국대대학원,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