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그려진 풍속화가 제법 전해진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 대표적이고, 둘은 스님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도 남겼다. 김홍도의 ‘시주를 청하는 스님’과 신윤복의 ‘단오’ 풍경이 언뜻 떠오른다. 잘 알려지지 않은 김홍도의 그림을 보자. 『김홍도필 행려풍속도 8폭 병풍(金弘道筆 行旅風俗圖 八幅 屛風)』이라는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행려풍속이라는 말은 선비가 세속을 유람하면서 보는 풍경을 담은 풍속이다.
서른넷이 된 김홍도가 강희언의 집에서 그렸다. 그림마다 표암 강세황의 평이 적혀 있다. 다섯 번째 그림을 보자. 노새를 타고 가는 선비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보고 있다. 저 멀리 뒤로는 또 한 명의 선비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스님은 고깔모자를 쓰고 걸망을 지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얼핏 보면 앞선 사람들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강세황은 이 그림에 글로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다리 아래 물새는 노새의 발굽 소리에 놀라고
노새는 날아오르는 물새에 놀라고
길가는 사람은 놀라는 노새에 놀란다.
놀라는 모양새가 입신의 경지다.”
- 표암이 평하다
수륙재(水陸齋)와 놀이를 통해 스님네들은 일반 백성과 자주 접했다. 수륙재는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나라에서 행하는 큰 의식이었다. 나라에서 행하는 의례는 폐지됐으나 민(民)과 함께 조선시대 내내 진행됐다. 스님네들이 진행하는 놀이는 조선시대에 사찰이 유지될 수 있었던 큰 힘이었다. 시주와 공양의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근세 초 풍속화를 남긴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도 수륙재를 그림을 제법 남겼다. 기산의 그림은 조선의 풍속을 그려 서양인들에게 판매하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은 유럽은 물론 러시아·미국·캐나다·일본 등 전 세계 20여 곳의 박물관에 남아 있다.
병풍으로 그려진 듯한 풍속화 8점 중 한 폭이다. 길거리와 시장에서 펼쳐지는 여러 일상을 담은 그림이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 폭의 그림에 시장에서 놀이하는 몇 사람과 구경꾼들이 그려져 있다. 왼편에 다리 위를 무심하게 지나가는 여인이 있고, 밑으로 소고(小鼓)를 두드리는 스님인 듯한 두 명이 있다. 앞쪽으로 청(請)하는 듯한 여인과 또 다른 두 명의 연희자가 있다. 시주를 청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