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매골승
매골승(埋骨僧)이란, 말 그대로 ‘뼈를 묻는 승려’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승려나 단월(檀越, 시주하는 사람)들의 장례 과정을 맡아 처리하던 승려’를 말한다. 이들은 매장의 경우 시신을 땅에 묻거나, 화장으로 장례를 치를 때는 다비(茶毘)와 뼈를 추리는 습골(拾骨) 등을 담당했다.
고려 말 14세기에 활약했던 승려 신돈(辛旽)이 매골승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골승은 적어도 14세기 이전부터 고려 사회에 있었던 승려의 직능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왕족이나 귀족 등의 단월들이 사찰에서 병을 치료하거나, 임종 전에 머무는 일이 많았기에 의술을 갖춘 승려가 필요했다. 임종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풍수와 장례 의식에 통달한 매골승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나 왕족뿐 아니라 문벌귀족들 사이에서도 화장하는 것이 유행했다. 따라서 다비와 남은 뼛조각을 수습해 매장하는 절차를 주관할 승려가 필요했다.
고려시대 금석문을 분석한 연구를 보면, 다비 이후에 수습된 유골은 망자(亡者)가 임종한 사찰에 안치하고 140여 일간 조석으로 의례를 치렀다. 이후에야 망자의 선영(先塋)에 매장했다. 고려 사찰의 매골승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담당했던 승려이지 않을까?
승려들은 빈자의 구제를 위해 활동했던 대비원(大悲院)에서도 활동했다. 개경(開京)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있었던 동서(東西) 대비원은 관곡, 의복, 의약으로 병자와 빈자, 늙은이, 굶주리는 백성들을 치료하고 보호했던 국기기관이었다. 오늘날의 병원, 고아원 내지 양로원의 기능을 담당했다.
대비원의 구제사업 중 병자의 치료, 전염병이나 기근 등으로 민간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하는 작업에 의술을 지닌 의승(醫僧)이나 매골승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비원의 설립 이념이 불교적 자비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고려불교의 친국가적 성격에 비춰 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매골승
조선은 유교를 국가통치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표방했는데, 조선 중기까지는 매골승이 존재했던 기록을 볼 수 있다. 사찰에 소속된 승려로 장례와 매장을 담당했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의 매골승은 급료를 지급받는 준관원(準官員)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고려의 유습인 동서 대비원을 존속시킨 조선 정부는 1414년(태종 14)에 명칭을 동서 활인원(活人院)으로 바꿔 계속 운영했다. 기존의 관원 이외에 의원(醫員), 의무(醫巫), 그리고 매골승을 배치했다. 매골승은 무격(巫覡)과 함께 빈민의 구휼, 병자의 치료와 간호, 시신 수습, 그리고 세종 대에는 한증승(汗蒸僧)이라는 이름으로 한증소(汗蒸所)를 운영하는 등의 업무를 나눠 맡았다.
활인원은 다시 1466년(세조 12)에 활인서(活人署)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아울러 태종 대에 시신 처리를 전담하는 매치원(埋置院)이라는 기관도 만들어졌지만, 이후 사라지고 동서 활인원이 시신의 처리를 담당하게 된다.
거리에 쌓인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민심 안정을 위한 정치적 의미 외에 전염병 확산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유행하는 역질 등에 사망한 시체들은 ‘병이 옮을까 두려워’ 민가에 그대로 버려진 채 부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치우고 매장하는 일에 승려가 동원됐다. 전쟁이나 가뭄 등 시신이 많이 나오는 때, 매골승은 시신을 빨리 치우고 매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활인원에서 처리해야 하는 장례 업무에는 매장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안 되는 극빈층이나 전염병, 기근 등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시신을 처리하는 데에 이 매골승들이 동원됐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예조에서 한성부와 함께 의논하여 매골승을 권려(勸勵)하는 사목(事目)을 계하였는데, 전에 정한 승(僧) 10명의 수효가 적으니 6명을 더 정하여 동서 활인원에 각기 8인씩 소속시키고, … (일부 중략) … 월료(月料)와 소금과 장을 주고 봄가을 두 차례로 하여 각기 면포 1필씩을 줄 것이며 ….”
- 『세종실록』 1427년 9월 1일
세종 대에 동서 활인원에 각각 5명씩 10명의 매골승이 배치됐다. 이들은 급여와 면포를 받았으며, 관원이 매골승의 근태(勤怠)를 관리했다. 1427년(세종 9) 기근으로 죽는 사람이 늘자 16명으로 늘렸고, 그 이듬해 다시 4명을 더 뒀다.
활인원에 소속된 매골승은 거의 관원에 준해 업무량과 태도를 평가받았고, 급료를 받았음은 물론이며 실적이 뛰어난 경우 관직까지 받았다. 이처럼 매골승들은 특정 관서에 속한 관승(官僧)의 형식으로 사역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매골승은 승려로서의 존재 의미보다는 매장을 담당하는 직능으로서만 인식되고 처우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매골승이 ‘사찰에 소속된 승려로서 사찰 안에서 치러지는 장례와 매장 등을 담당하는 이’를 의미한다면 조선시대의 매골승은 ‘활인원에 소속된 준관원’이었던 셈이다.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매골승
“『연려실기술』에 이르기를, 선조 26년(1593) 10월에 왕의 어가가 의주로부터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백성들이 난리에 죽거나 역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은 자를 승려를 모집해 거두어 매장케 하고, 단을 설치해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 『약파만록』에 이르기를, 선조 27년에 굶주린 백성이 서로 잡아먹고 역병까지 겹쳐 죽은 자가 서로 이어지니 수구문 밖에 시체를 산처럼 쌓아 성보다 높았다. 승도를 모집해 그들을 다 매장하자 을미년에 그쳤다.”
- 이능화, 「불교와 조선문화」, 『별건곤』 제12·13호, 1928
정책적으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던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중기에 이르기까지 매골승이 존속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국가적 전란이 일어나고, 전염병과 가뭄으로 수많은 시신이 발생하자 조선 정부는 승려를 동원했다. 흉년, 전염병으로 인한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해야 할 인적자원이 필요했고, 시신들을 매장하는 과정에서 승려의 염불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평시에는 폐불(廢佛)에 준하는 정치적 압박과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위기 시에는 승군(僧軍), 도첩제(度牒制, 일종의 승려 자격증), 승역(僧役) 등 각종 방식으로 승려의 조직력과 노동력을 활용했다.
“얼어 죽은 시체가 노천에 뒹굴고 있는데도 거두어 묻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측은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쟁으로 어지러운 때라서 묻어줄 인력이 모자랄 것이기는 하지만 승(僧)을 모집한다면 안팎의 시체와 해골을 모두 묻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잘 묻어준 사람들에게는 선과(禪科)를 주기도 하고 도첩을 주기도 하겠다는 내용으로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라.”
-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 10월 2일
임진왜란 기간 매골승의 활동은 승려가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부역 중 하나였다. 선조 대에 “동사(凍死)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승려를 모집하여 그 시체들을 매장하라”고 명했고, “잘 묻어준 사람에게는 선과(禪科)나 도첩을 주는 방안에 대하여 비변사에게 논의할 것”을 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선조 26년 10월 2일). 이는 다시 말해, 정식으로 인가를 받지 못한 승려가, 매골승 활동을 통해 신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경로를 획득하게 됐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결국 시체를 치우고 매장하는 험한 일이 매골승의 임무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사역으로 인해 지급된 도첩이 조선불교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틔우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라진 매골승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매골을 승려에게 맡겼다는 기록은 점차 줄어들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 활인서에서 지속했던 매골승들은, 활인서가 폐지됨과 더불어 역사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시신을 대량으로 처리해야 하는 전란이 없었던 데다가, 향도계(香徒契)가 민간의 장의를 거의 독점하게 되면서부터다. 15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민간의 장례를 맡아서 처리했던 향도계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고, 동서 활인서의 기능이 점차 약해졌다. 17세기 후반에는 향도계가 상장례 기능을 전담하는 상두꾼으로 변했고, 활인서까지 폐지되면서 준관원의 역할을 하던 매골승도 함께 사라지게 된 것이다.
1882년(고종 19)에 이르러 활인서가 완전히 혁파됐던 것은 더는 승려의 의료 행위나 시신 수습이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혁파 직후인 1885년(고종 22)에 근대적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이 설치됐다. 전통적인 구료(救療, 가난한 병자를 치료해 줌) 체제가 기존의 공적 영역에서 문을 내린 배경에는 ‘서양 근대 문물의 도입’이라는 영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이종우, 「조선시대 매골승(埋骨僧)의 불교문화적 위치 재조명」 『종교연구』 80-3, 2020
정영식, 「고대~임진왜란 이전에 있어서의 불교식 慰靈과 국가」 『불교연구』 39, 2013
김수연, 「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불교학연구』 71, 2022
김성순, 「시체를 매장했던 승려들: 매골승(埋骨僧)과 삼매히지리(三昧聖)」 『불교학연구』 31, 2012
김성순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전남대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동아시아불교 종교문화 비교연구: 고중세 시대 불교의례와 물질연구’ 관련 주제로 글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