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은 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새해의 첫 절기이다. 세시풍속이 급격히 사라지는 요즈음이지만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는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이니 크게 길하도다. 밝은 기운 받아들여 경사스러운 일이 많아지길)”과 같은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에 붙이곤 한다. 입춘축을 붙일 때 ‘입기시각(入氣時刻, 입춘이 드는 시각)’에 맞춰 붙이면 좋다고 하여 입춘쯤이 되면 이에 대한 검색량이 늘어나기도 한다.
입춘 시점은 띠와 관련해서 관심을 받기도 한다. 호랑이띠·토끼띠 등 12지 동물 중 하나로 배당받게 되는 띠 계산은 종종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고 생각하나, 사실 띠는 태양력인 24절기법이 그 기준이 된다. 계묘년(癸卯年)인 2023년 올해 음력설은 1월 22일이고, 태양력 절기 기준으로 입춘은 2월 4일이다. 그렇다면 올해 태어난 아기 중에서 입춘 전에 태어난 아기는 계묘년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2022년 임인년(壬寅年)생인 호랑이띠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입춘시각은 현재에도 적게나마 그 의미가 유지되고 있다.
올해의 입춘시각은 2월 4일 11시 43분이다. 우리는 보통 절기(節氣)를 날짜로 기억하기 때문에 시와 분을 따지는 입기시각(절기에 들어가는 시각)은 낯설게 보이기도 한다.
입춘시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사 이래로 발전해온 다양한 시간 셈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류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약속을 정하고 함께 도모하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시간에 대한 기준이 필요해졌다. 가장 기본적인 시간의 기준은 해와 달, 그리고 계절이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하루를 삼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점으로 한 달을 구분했으며, 태양의 운동 주기를 기준으로 일 년을 삼았다. 달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은 태음력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이슬람력에서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달과는 관계없이 태양 운행만을 기준으로 한 것은 태양력이라고 부르며 현재 세계 공용의 역법으로 채택한 그레고리력이 이에 해당한다. 태양력은 달의 위상 변화를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고, 태음력은 1년을 기준으로 되풀이되는 계절 변화와 일치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동양의 역법 전통에서는 이 두 가지를 절충한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 우리가 현재 흔히 ‘음력’이라고 부르는 전통 역법이 바로 이 태음태양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 셈법은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달·지구가 언제나 같은 속도로 서로 박자를 맞춰 움직이면 좋으련만 이들의 공전과 자전 주기는 간단한 자연수로 끊어지지 않고 소수 단위로 이뤄졌다. 게다가 그 속도 역시 조금씩 변화가 있어 시간의 셈법은 복잡한 수학과 정밀한 천문관측의 영역으로 발전하게 됐다.
고대 천문학에서 가장 큰 문제는 결국 해와 달의 공전 주기를 하나의 역법 체계에서 헤아리는 일이었다. 태양의 1회기년은 약 365.2422일이다. 그런데 달의 변화를 기준으로 측정한 한 달은 약 29.530일이므로 이를 12달로 곱하게 되면 태음력의 1년 날짜 수는 354.36일이 된다. 태양의 1년보다 약 10.88일이 적은 것이다. 때문에 태음태양력에서는 2년이나 3년마다 한 달을 추가해야 한다. 이를 윤달(閏月)이라고 한다. 만약에 윤달을 넣지 않게 되면 16년 만에 계절은 정반대로 바뀌어 음력 1월이 한여름에 가 있게 된다. 즉 윤달은 태음월을 계절과 일치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도입된 것이다.
태양과 달이 한 기점에서 동시에 출발했다가 다시 그 출발점으로 함께 돌아오는 주기는 19태양년(달 기준으로는 235삭망월)이다. 19년마다 태양과 달이 거의 일치하는 순환 주기를 갖는다는 것은 고대 바빌론 천문학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메톤(BC 433년경)의 정리가 더욱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를 메톤 주기(Metonic cycle)라고 부른다. 동양에서는 한무제의 태초력(BC 105년)에 적용됐다. 해·달의 주기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19년 동안에 7번의 윤달을 넣어야 한다. 올해 3월 22일부터 시작되는 음력 윤2월이 바로 이 윤달에 해당한다. 이 윤달을 배치하는 데에는 24절기법이 절대적 기준을 제공한다.
자, 드디어 입춘으로 시작하는 24절기가 등장할 차례다. 24절기는 태양의 궤도에 있는 동지점을 기준으로 동쪽 방면으로 15도 간격으로 1기(氣)씩 배당한다. (태양회전 360°=15°×24절기) 따라서 절기를 알면 태양의 위치를 추산할 수 있다. 즉 24절기는 동양의 태음태양력 전통에서 계절의 기준이 되는 태양력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달을 중심으로 하는 태음력에 24절기법이 합해졌을 때 태음태양력의 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24절기는 음력월을 고정시키고 윤달을 배치하는 기준이 된다. 24절기는 각각 12개의 절기(節氣)와 중기(中氣)로 구성됐는데 이 두 기(氣)는 번갈아 가며 배치되며 절·중기를 합쳐서 1절월이라고 부른다. 태음태양력에는 두 가지 법칙이 중요하다. 첫째는 중기가 든 삭망월을 그 음력달로 삼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동지가 든 달을 항상 11월로 고정한다는 것이다. 이때 1절월(30.44일=태양 1회귀년 365.2422일÷12개월)과 1삭망월(29.35일)의 길이가 서로 달라서 중기가 없는 달이 생긴다. 이 무중월(無中月)이 바로 윤달의 자격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시간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1태양년의 길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측정하는 것일까? 천문학에서 1태양년은 태양이 춘분점을 떠나 황도를 따라 이동하여 천구를 한 바퀴 돈 후 다시 춘분점에 이르는 동안의 시간을 의미한다. 태양이 다시 돌아온다고 하여 회귀년(回歸年)이라고 부르는 이 값은 4계절의 변화와 일치하는 주기이기 때문에 동서양 문명 모두가 주목했던 중요한 시간의 기준이다.
그런데 이 회귀년을 측정하는 시점과 방식은 동서양이 달랐다. 고대 서양문명의 중심지인 지중해는 춘분 때 날씨가 맑아 그 시기를 관측 기점으로 잡았고 동양은 동지에 화창한 날씨가 많아 동지점을 기점으로 삼았다. 관측기기도 차이가 있다. 서양은 혼천의로 춘분 시점을 측정했고 중국은 수직 막대인 규표(圭表)를 세워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동지점을 측정했다. 즉 규표를 세워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긴 시각을 잡아내어 그 시각을 동지점으로 삼는 것이다.
일단 동지시각을 정확하게 관측·계산하게 되면 동지점을 기준으로 각 절기 시간을 더하여 입춘시각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지구의 실제 움직임은 정확한 원운동이 아니라 타원 궤도를 도는 부등속 운동이므로 지구-태양 간 거리에 따라 운행 속도가 달라진다. 이미 중국 수나라 때에 이러한 부등속 운동을 관측했으나 천 년 뒤 서양 역법 도입 이후에 본격적으로 역법에 반영된다. 따라서 절기 시각은 한층 더 정밀해졌지만 그 계산은 보다 복잡해지게 된 것이다.
전통 시대에는 이러한 역법 계산을 관상감에서 담당했는데 지금은 한국천문연구원에서 달력의 제작 관리와 표준시의 결정·관리를 맡고 있다. 과거에는 동지점을 기준으로 입춘시각을 계산했다고 한다면, 현재는 태양 황경이 315도(입춘점)에 이르는 순간을 관측·계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시간은 언제나 쉼 없이 흘러간다. 문명이 발생한 이래로 인간은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시간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일생을 주기로 시작과 끝을 설정하거나 각종 기념일·명절을 만들어 묵묵히 흘러가는 시간에 리듬과 생기를 불어넣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왔다. 입춘시각에 맞추어 입춘축을 붙이는 것을 단순히 미신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이다.
이번 입춘이 드는 시각에는 창문을 열어 봄 내음을 맡아보는 것으로 새봄이 왔음을 소소하게 축하해보자. 입춘시각을 계산하는 것은 무진장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에 특별한 마디를 만드는 것,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