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만들어주는 강력한 적
세상의 수많은 영웅 중에 붓다만큼 완벽한 이는 없었다. 붓다는 실로 수많은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었고, 외도의 숱한 도전을 물리쳤으며, 창궐하는 전염병을 간단하게 척결했다. 역사 속에 등장한 영웅 중에, 아니 신화 속에 등장한 영웅까지도 포함해 붓다만큼 완벽한 영웅은 없었다.
사람들이 추앙하는 영웅에게는 대체로 강력한 적이 있다. 인도인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저장돼 있는 라마에게는 강력한 악마 라바나가 있었고, 크리슈나에게도 막강한 칸샤라는 악마가 있었다. 두르가 여신에게는 악마 마히샤가 있었고,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에게는 네메아의 사자나 레르나의 히드라가 있었으며, 영화 속의 영웅 배트맨에게도 악마 같은 적 조커가 있음으로써 빛을 발한다.
완벽한 영웅 붓다에게도 강력한 적이 있었으니, 바로 마라(Māra) 빠삐만(Pāpiman)이다. 그는 붓다의 생애 고비마다 나타나 붓다가 하는 일을 방해했지만, 붓다는 마라의 바람과는 반대로 당신의 갈 길을 꿋꿋이 갔을 뿐이다. 붓다의 일생 가운데 고비마다 찾아온 적이 마라였지만, 실제로는 마라가 오히려 붓다가 가는 길의 의미를 더욱 뚜렷하게 해줬다고 하겠다. 우리를 진정으로 가슴 아프게 한 적은 붓다의 가까운 혈연이기도 했던 데와닷따(Devadatta)였다. 그는 붓다의 고모인 빠미다와 꼴리야족의 숩빠붓다 왕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붓다의 아내였던 야소다라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데와닷따는 붓다의 고종사촌이자 처남이었는데, 이런 이중관계는 동족끼리 혼인하는 것을 선호했던 삭까족과 꼴리야족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사촌이었던 아난다나 아누룻다, 동생 난다, 아들 라훌라 등 붓다의 혈연이 붓다에게 최상의 협력자였던 것에 반해 데와닷따만이 그릇된 길을 간 이유는 무엇일까?
질투심 때문에 반기를 든 데와닷따
붓다가 많은 제자와 함께 꼬삼비 지역을 유행하는데, 붓다와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큰 환영을 받았다. 비구들은 탁발을 나갈 때마다 많은 공양물을 얻었는데, 탁발과 공양이 끝난 오후 시간에는 사람들이 승원을 찾아왔다. 그들은 세존의 안부를 물었고, 사리뿟따나 목갈라나 존자를 찾았으며, 마하깟사빠 존자를 찾기도 했다. 또한 데와닷따와 함께 출가한 밧디야, 아누룻다, 아난다, 바구, 낌빌라, 우빨리 존자를 찾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데와닷따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데와닷따는 생각했다. ‘나는 왕족으로서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행하여 신통력을 얻었지만, 나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그가 붓다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고 실천하지도 않았음을 말해준다. 다른 삭까족 왕자들은 수행을 통해 성자의 반열에 들었지만 자신은 신통력만 얻었을 뿐인데도, 데와닷따는 자신을 돌아볼 줄 몰랐다. 결국 그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남아 있는 탐욕이 그로 하여금 붓다를 배신하게 만들었고, 자신을 반역자로 만들었다.
데와닷따는 자신이 살길을 위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를 후원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가다국의 왕자 아자따삿뚜(Ajatasattu)를 떠올렸다. 아자따삿뚜는 아버지를 계승해 왕이 될 예정이었지만, 빔비사라 왕의 건강을 보아서는 아자따삿뚜의 등극을 기약하기가 힘들었다.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가 왕이 되고 싶은 욕망에 한껏 몸이 달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자가하에 온 데와닷따는 신통력을 통해 소년으로 둔갑한 후 뱀 일곱 마리로 몸을 장식했다. 두 마리는 팔을 감아 장식하고, 두 마리는 다리를 감아 장식했으며, 한 마리는 목에 감았고, 한 마리는 왼쪽 어깨 위에 올렸다. 마지막 한 마리는 머리 위에 똬리를 틀게 하고는 허공을 날아 아자따삿뚜의 처소로 갔다. 데와닷따는 의자에 앉아 있는 아자따삿뚜의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자따삿뚜는 뱀 일곱 마리와 함께 등장한 소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당신은 누구시오?”
“나는 삭까족 수행자 데와닷따라고 하오.”
“아무리 보아도 수행자 같지는 않은데요?”
데와닷따는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든 수행자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왕자 앞에 섰다. 아자따삿뚜는 데와닷따가 엄청난 신통력을 지닌 수행자로 여기고 헌신적인 후원자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아자따삿뚜는 매일 500대의 수레에 음식물을 싣고 가서 데와닷따에게 공양했고, 저녁에도 한 번씩 문안했다.
이 소식이 붓다에게도 전해졌다. 매일 조금씩 최소한의 음식을 탁발해서 검소하게 생활하는 승가의 원칙을 데와닷따가 어기고 있음을 안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이여, 아자따삿뚜 왕자가 500대의 수레에 500개의 음식 항아리를 싣고 갈 때마다 데와닷따는 이전에 쌓아올린 공덕을 까먹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어서 말했다.
“비구들이여, 데와닷따는 자신이 얻은 명성 때문에 파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바나나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차차 파멸하게 되는 것이나 노새가 새끼를 배면 그로 인해 차차 죽어가는 것과 같으니라. 바나나 열매가 바나나 나무를 죽이고, 대나무 열매가 대나무를 죽이고, 갈대 열매가 갈대 나무를 죽이고, 암노새의 새끼가 어미를 죽이듯이, 사악한 사람은 오히려 얻은 것으로 인해 파멸하느니라.”
승가를 혼자서 독차지하겠다는 욕망
공양물을 많이 받게 되자 데와닷따는 탐심을 더욱 강하게 일으켜,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을 바탕으로 한 신통력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데와닷따는 욕망을 멈추지 않고 붓다의 승가를 자신이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붓다가 죽림정사에서 설법하고 있을 때, 대중 가운데 있던 데와닷따가 일어나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연로하시니 제게 승가를 맡기십시오.”
“데와닷따여, 그것은 온당치 않으니라.”
데와닷따는 두 번이나 더 요청했다. 붓다는 “데와닷따여, 나는 승단을 상수제자인 사리뿟따나 목갈라나에게도 넘기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남의 침을 먹는 자에게 넘기겠느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남의 침을 먹는 자(kheḷāsaka)’라고 한 것은 승가의 일원으로서 부당한 방법으로 아자따삿뚜의 공양물을 받고 있음을 뜻한다. 데와닷따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한 질투심으로 괴로워하면서 붓다 곁을 떠났다.
데와닷따가 떠난 후에 붓다는 비구들에게 ‘데와닷따의 행위는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승가와 관련 없이 오직 자신의 뜻만으로 행한 것’임을 밝히는 ‘현시갈마(顯示羯磨, pakāsaniya kamma)’를 공표하게 했다. 현재, 그리고 앞으로 데와닷따가 하는 모든 행위는 붓다의 뜻이나 승가의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님을 대내외적으로 알린 것이다.
데와닷따는 승가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붓다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붓다의 가르침이 좋아 출가한 이로서, 더욱이 붓다와 혈연으로도 가까운 사이인 데와닷따가 붓다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데와닷따는 붓다를 죽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후원자를 더욱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를 찾아가 말했다.
“왕자님,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오래 살게 되면 왕자님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왕자님은 부왕을 죽인 후 왕이 되십시오. 나도 부처님을 죽이고 승가를 운영하겠소.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을 마음껏 경영해봅시다.”
“아무리 왕위가 탐난다 해도 아버지를 어떻게 죽인단 말입니까?”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려줬다. 빔비사라 왕은 마흔 살이 다 되어가도록 정실 왕비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세 번째 왕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웨데히(Vedehi)였다. 왕이 점술가들에게 점을 친 결과, 히말라야에서 수행하고 있는 한 성자가 3년 후에 죽으면 웨데히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3년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빔비사라 왕은 자객을 보내 그 성자를 죽였고, 성자는 죽으면서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되뇌었다. 그리하여 태어난 아들이 자신이라니, 아자따삿뚜로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되자 차츰 마음속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자따삿뚜는 허벅지에 칼을 감추고 궁궐로 들어가다 경호원들에게 발각됐다. 빔비사라는 아들에게 물었다.
“왕자야,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왕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이미 성자의 반열에 든 빔비사라는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어차피 물려줄 것이면 시기를 앞당기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고는 아들에게 말했다.
“왕자야, 이제부터 이 왕국은 너의 것이다.”
빔비사라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줬다. 왕위를 넘겨받은 아자따삿뚜는 아버지를 감금했고, 결국에는 스스로 죽게 했다.
술 취한 코끼리를 감화시키다
아자따삿뚜가 사실상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데와닷따는 붓다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아자따삿뚜에게 암살자들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그는 1명의 암살자에게 붓다를 죽인 후 정해진 길을 따라오라고 했고, 2명의 암살자에게 돌아오는 1명을 죽이라고 했으며, 4명의 암살자에게 앞서간 2명의 암살자를 죽이라고 했고, 8명의 암살자에게 앞서간 4명의 암살자를 죽이라고 했으며, 다시 16명의 암살자에게 앞서간 8명을 죽이고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암살자가 붓다에게 다가갔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성자의 반열에 들었으며, 다른 이들도 모두 붓다를 만나서 수다원과를 증득했다. 첫 번째 암살자가 데와닷따에게 가서 말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부처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데와닷따가 말했다. “됐다. 내가 직접 부처님을 죽이겠다.”
데와닷따는 영취산 아래쪽에서 걷고 있는 붓다를 향해 높은 곳에서 큰 바위를 굴렸다. 그때 두 개의 돌기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 나오더니 붓다에게 굴러오는 바위를 멈춰 세웠다. 천신들이 붓다를 보호한 것이었다. 바위에서 파편 하나가 날아와 붓다의 발에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붓다를 향한 데와닷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 왕의 코끼리 날라기리에게 술을 먹인 후 붓다가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코끼리 몰이꾼들로 하여금 날라기리를 화나게 하라고 시켰다. 성난 날라기리와 붓다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이를 보기 위해 라자가하 성안으로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새벽이 되자 붓다는 라자가하와 인근 승원의 비구들을 모두 불러모아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술에 취한 날라기리가 붓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비구들이 붓다에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 날라기리는 사납고 악독하기로 유명합니다. 저 코끼리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지 못합니다. 부디 몸을 피하시옵소서.”
그때 군중 속의 한 여인이 안고 있던 아이를 떨어뜨렸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를 들은 코끼리가 갑자기 아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붓다는 날라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신통력을 써서 말했다. “날라기리야, 사람들이 너에게 술을 먹인 것은 나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어린아이에게 가지 말고 나에게 오너라.”
날뛰던 날라기리가 붓다의 음성을 듣고 갑자기 온순해졌다. 그는 서서히 붓다에게 다가와 공손한 자세로 앉았다. 붓다가 말했다. “날라기리야, 사람을 해치지 말아라. 모든 살아 있는 것을 향해 자비심을 가지도록 해라.” 붓다는 오른손으로 코끼리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데와닷따는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도 있다
붓다를 죽이려는 데와닷따의 무모한 시도는 이렇게 해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붓다의 전생을 담은 기록 『자따까』에 따르면 데와닷따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시도는 세세생생 계속됐다.
한번은 보살이 사자로 태어났을 때 데와닷따의 전생인 자칼이 사자에게 먹이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대가로 고기를 나눠달라고 요청했다. 자칼이 장성하자 자신도 사자와 함께 코끼리 사냥에 나서겠다고 요구했다. 사자가 마지못해 승낙하자 자칼은 무모하게 코끼리에게 달겨들다 밟혀 죽고 말았다.
(『비로짜나 자따까(Virocana Jātaka)』)
데와닷따는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서도 탐욕 때문에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다. 붓다의 생애에 실패란 없었는데, 가까운 혈연을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한 것은 뼈아팠다. 어떤 영웅에게도 100%란 있을 수 없는 일인가보다. 하기야 100%가 가능했다면, 붓다 시대에 이미 온 나라 사람들이 불자였을 것이다. 붓다 시대에도 데와닷따 같은 악인이 있었을진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데와닷따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이미 데와닷따가 있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산문 『인도신화기행』,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