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인가, 목숨 건 보시인가?
마치 천상 사람처럼 곱고 단정하고 아름답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향(香), 등(燈), 꽃, 차(茶), 과일, 쌀 등을 이마 위까지 올린 채 조심스럽게 불단을 향하여 다가간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이라 마치 발을 바닥에 딛지 않고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저렇게 공손할 수 있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우아하게 불전에 나아가서는 다시 이마 위로 공양물을 공손하게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불단 위에 올려놓는다.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봉행하기 전에 진행하는 육법공양(六法供養) 장면이다. 육법공양이란 향과 등, 꽃, 차, 과일, 쌀 등을 부처님께 올리는 의식이다.
향과 등과 꽃은 붓다 시대에 재가신도들이 붓다를 위해 가장 자주 공양했던 품목들이고, 차와 과일과 쌀(밥)은 대중공양 때에 빠질 수 없는 품목들이다. 향이나 등이나 꽃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탁발을 나온 붓다와 제자들에게 생존에 필수적인 음식을 공양하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경전에는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향이나 등이나 꽃이 더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그 시대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급급하지 않고 여유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강조한다. 보시를 하고서도 보시했다는 상을 갖지 않는 것이다. 보시하고서도 보시했다는 상을 갖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일창 스님은 보시의 공덕을 크게 하는 요소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보시하는 이 스스로 계를 잘 지켜야 한다. 둘째, 계를 잘 지키는 사람에게 보시해야 한다. 셋째, 정당하게 얻은 것을 보시해야 한다. 넷째, 보시하기 전에도 기뻐하고 보시하면서도 기뻐하고 보시하고 나서도 기뻐해야 한다. 다섯째,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갖고 보시해야 한다. (일창 스님, 『부처님을 만나다』, 이솔출판, 2012, 285쪽.)
그런데 무주상 보시나 일창 스님이 말하는 보시의 다섯 가지 요소를 뛰어넘은 ‘목숨을 건 보시’를 실천한 이들이 있었다. 이른바 ‘빈자 일등’으로 알려진 가난한 노파 난다(Nanda)와 붓다에게 꽃 여덟 송이를 보시하고 미래에 벽지불(辟支佛)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꽃장수 수마나(Sumana)가 바로 그들이다.
폭풍우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
『아사세왕수결경(阿闍世王授決經)』과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貧女難陁品)」에 ‘빈자 일등’ 이야기가 나온다.
붓다가 라자가하에 있을 때 아자타삿투 왕이 붓다와 제자들을 초청해 대중공양을 마친 후 의사 지와까(Jivaka)와 의논했다.
“오늘 부처님을 청하여 대중공양을 했으니 다음에는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지와까가 대답했다.
“부처님을 위하여 죽림정사까지 등을 설치하여 공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은 곧 궁문에서부터 죽림정사에 이르기까지 등을 설치하도록 했고, 백성들도 동참하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가난한 노파 난다도 붓다에게 등공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끼 먹을 양식도 없었다. 오직 붓다에게 공양하겠다는 열망으로 겨우 2전(錢)을 구걸해서 그것을 가지고 기름집으로 갔다. 기름집 주인이 말했다.
“한끼 먹을 양식도 없는 분이, 2전이 생겼으면 밥을 사 먹어야지 왜 기름을 삽니까?”
“부처님을 만나기는 백겁이 지나도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부처님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공양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왕께서 우리 같은 백성들도 동참할 수 있도록 하신다니 내가 굶어 죽더라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에 기름집 주인은 난다의 지극한 뜻을 알고서 2전엔 2홉을 주어야 하는데 특별히 3홉을 주었다. 3홉이라 해봐야 다른 사람들이 올린 것에 비해 반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죽림정사에 갔다.
등불을 공양하면서 난다는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했다. “만약 제가 후세에 부처님처럼 도를 얻을 수 있다면, 이 등불이 밤을 새우고 나서도 시들지 않게 하소서.” 그녀는 밤이 깊어도 죽림정사를 떠나지 않고 합장한 자세 그대로였다.
밤이 깊어가면서 어떤 등은 꺼지고 어떤 등은 꺼지지 않았다. 그중 난다가 밝힌 등은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띌 정도로 밝았다. 아침 해가 동쪽에서 솟아올랐는데도 난다의 등은 꺼질 줄을 몰랐다.
붓다가 목련 존자에게 일렀다.
“날이 밝았으니 모든 등을 꺼라.”
목련이 지시를 받들어 등을 차례로 껐다. 모든 등을 다 끄고 나서 드디어 난다의 등을 끄려고 했으나, 난다의 등은 세 번이나 시도했는데도 꺼지지 않았다. 목련이 다시 신통력으로 폭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난다의 등은 폭풍을 부채질 삼아 더욱 활활 타올라 온세계를 비추었다.
붓다가 다가와 목련에게 말했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그 등은 미래 부처님 광명의 공덕이니, 너의 신통력으로도, 온 세상 바닷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다. 이 등을 밝힌 노파 난다는 많은 공덕을 지어 전생에 부처님께 수기(受記)를 받았으나, 아직 보시바라밀이 부족하여 이번 생애 빈궁하게 태어났을 뿐이다. 삼십겁 후에는 마침내 붓다를 이룰 것이니, 이름은 수미등광(須彌燈光) 여래・지진(至眞)이며, 그 세계엔 해와 달이 없고 사람의 몸속에서 큰 광명을 발산하며, 집 안에 있는 온갖 보배의 광명이 서로 비추어 마치 도리천(忉利天)과 같으리라.”
난다는 붓다의 수기를 듣고 환희하며 펄쩍 뛰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사뿐히 솟아올라 약 4km를 날아오르더니 부드럽게 내려와서 절하고 물러갔다.
이 소식이 왕에게 전해지자, 왕이 지와까에게 물었다.
“등공양은 내가 시작했고 나는 수많은 등을 공양했는데, 내게는 아무 수기가 없고, 오직 한 등을 켠 노파는 어찌하여 수기를 받은 것인가?”
이에 지와까가 말했다.
“대왕께서 많은 등을 공양했지만, 목숨을 걸고 공양하신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노파는 목숨을 지탱해줄 양식을 포기하고 공양했기 때문입니다.”
땅에 떨어지지 않은 여덟 송이의 꽃
목숨을 걸고 보시한 사람이 또 있다. 『법구경』 68송의 배경 이야기, 『대불전경(MahāBuddhavaṃsa)』에 꽃장수 수마나 이야기가 있으며, 『아사세왕수결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꽃장수 수마나는 마가다국 사람으로 빔비사라 왕에게 매일 꽃을 배달하는 배달꾼이었다. 그는 매일 꽃집에서 여덟 송이의 꽃을 받아서 왕에게 배달했다.
어느 날 수마나가 여덟 송이의 꽃을 들고 왕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유난히 환한 골목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서 다가가 보았다. 붓다가 탁발하고 있는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붓다가 가는 길에 꽃가루를 뿌려드리며 예경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붓다와 제자들에게 음식물을 공양했다. 수마나는 광배가 환하게 빛나는 붓다를 보면서 ‘부처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뭔가를 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마나에게는 왕에게 바칠 꽃 여덟 송이밖에 없었다. ‘이 꽃 여덟 송이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싶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이 꽃을 왕에게 바치지 않으면, 왕은 나를 죽이거나 추방할 것이다.’ 수마나는 생각 끝에 죽음을 각오하고 붓다에게 꽃을 공양하기로 한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수마나가 공양한 꽃들이 모두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붓다의 머리 위에 두 송이, 붓다의 왼쪽에 두 송이, 오른쪽에 두 송이, 뒤쪽에 두 송이, 이렇게 붓다를 호위하면서 따라가는 것이었다. 붓다는 수마나의 꽃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탁발을 마치고 죽림정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수마나는 물론 사람들은 모두 큰 환희심을 내었다.
왕에게 바칠 꽃이 없어진 수마나는 예정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부인이 왜 벌써 왔느냐고 묻자, 수마나가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부인은 남편의 행동에 몹시 화가 났다.
“여보, 당신은 제가 안중에나 있는 거예요? 왕들은 거칠고 오만하기 짝이 없단 말예요. 왕을 불쾌하게 한 이는 죽음이 아니면 손과 발이 잘릴 거예요. 그의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 모르세요?”
부인은 그대로 있다가는 자기까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걱정한 나머지 왕궁으로 달려가 왕에게 고했다.
“대왕이시여, 저는 꽃배달꾼 수마나의 아내입니다. 어리석은 수마나가 대왕님께 꽃을 올리러 오다가 그 꽃을 부처님께 드렸답니다. 저는 그 일로 남편과 다투고 이혼했습니다. 이제 저는 수마나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저는 벌하지 말아주십시오.”
신심 깊은 왕은 수마나를 칭찬하고 싶었지만, 어리석은 부인에게 표정 없이 말했다.
“알았다. 너는 벌하지 않겠다. 대신 너는 이제 남편과 아무 관계 없으니 남편 일에 대해 상관하지 말아라.”
왕은 수마나를 즉시 궁 안으로 불러들였다. 수마나는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면서도 붓다에게 공양했다는 환희심을 가득 안고 궁궐로 들어갔다.
“부처님께 꽃을 올리면서 그대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대왕께서 저를 죽이거나 추방할지도 모르지만, 목숨을 잃더라도 부처님께 꽃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마나여, 참으로 훌륭하구나. 너에게 여덟 가지 상을 주겠노라. 코끼리 여덟 마리, 말 여덟 마리, 남자 노예 여덟 명, 여자 노예 여덟 명, 보석 여덟 가지, 돈 8,000루피, 아내 여덟 명, 마을 여덟 곳을 주겠다.”
아내 여덟 명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죽림정사에 돌아오자 붓다를 호위하던 꽃들도 마침내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난다 존자가 붓다에게 꽃배달꾼 수마나에게 어떤 과보가 있느냐고 묻자 붓다가 대답했다.
“아난다여, 수마나의 보시는 사소한 보시가 아니다. 수마나는 목숨을 걸고 보시하였고,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이 과보로 십만 겁 동안 악처에 태어나지 않고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다가 수마나라는 이름을 가진 벽지불이 될 것이다.”
붓다는 법당에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후회할 행위를 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한 행위를 돌아볼 때마다 기쁨이 샘솟는 행위를 해야 한다.”
붓다는 다시 게송을 읊었다.
그 일을 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고
그 결과가 어떻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그 행위는 훌륭하다 할 수 있다.
- 『법구경』 68송
붓다의 게송은 수마나가 신념을 가지고 행한 결과에 대해 불안함이 있을 수 있었지만, 그 행위에 대해 추호도 후회하지 않았던 것에 주목하고 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행위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설사 일시적으로 불편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공양물을 땅에 내려놓지 않은 불자들
우리나라 사찰들이 산사에 많이 있다 보니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사찰을 갈 때면 공양물을 이고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행여 공양물이 땅바닥에 닿을까 조심하면서, 쉬고 싶어도 공양물을 땅에 내려놓을 수 없어 쉬지 않고 산을 오르곤 했다.
북한산 중흥사에 있을 때였다. 법회 때마다 무거운 수박을 짊어지고 올라오는 보살님이 있었다. 무거운 수박은 산사에서는 사치니 그만두시라 해도, 보살님은 “부처님 시대에 목숨을 걸고 보시하신 분들이 있었다”고 말하며, 계속 수박을 짊어지고 올라왔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초파일 연등 접수가 한창이다. 난다와 수마나처럼 목숨을 건 보시를 누구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오신날의 향・등・꽃・차・과일・쌀 등의 보시가 난다와 수마나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며, 지금도 그 정신을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산문 『인도신화기행』,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