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道]은 여러 갈래입니다. 행복을 찾는 길, 즐거움을 좇는 길, 나아가 깨달음을 구하는 길 등등. 어찌 보면 여행이고 수행이자 순례이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 둘러 길 걸으면서 절에 들러보는 여행이자 순례길을 걷습니다. 발이 젖으려면 물가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광미디어가 아름다운 길 찾아 절로 함께 걷습니다.
강진 백련사와 다산의 연결고리
애초 강진 백련사 동백을 보러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백련사엔 붉은 동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암혜장(兒巖惠藏, 1772~1811) 스님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우정이 깊게 배어있었다. 강진은 다산의 유배지였다.
그래서 ‘유배길’이 있다.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다산수련원 → 다산초당 → 백련사동백림·백련사 → 철새도래지 → 남포마을 → 이학래 생가 → 사의재 → 영랑생가로 걷는 15km 코스다. 굳이 코스를 나누자면 다산초당 ↔ 백련사로 코스를 잡았다. ‘오매 단풍 들것네’,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대표작을 남긴 시인 김영랑의 생가는 다음을 기약했다.
들머리는 백련사, 여기서부터 다산초당까지는 1km 남짓한 숲속 오솔길이다. ‘다산과 혜장 스님 우정의 오솔길’ 혹은 ‘백련사 우정길’이라 멋대로(?) 이름 붙였다. 우선 스크롤 압박 주의!!
붉은 동백만 있는 게 아니더라
백련사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막 지나면, 동백나무숲이 펼쳐진다. 길 양쪽 옆으로 울창했다. 한겨울 오전에 내리는 볕은 동백나무 이파리의 초록색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눈부시게 길을 밝혔다. 이파리 틈을 뚫지 못한 볕은 그림자를 짙게 만들었고, 이 절묘한 인연의 조화가 눈을 즐겁게 했다. 붉은 동백꽃만 눈에 띄었다면…. 1월 초, 너무 이르게 찾았다. 해탈문 지나 조금 걷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목에 섰다.
혼자 걸었다. 길에 깔린 낙엽, 길 위를 터널처럼 만든 초목,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들, 겨울 볕과 나무가 길 위에 그려놓은 그림자, 길옆에 우거진 대나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길 위에 있었을 법한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두 사람 스쳐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폭은 혼자 걷기에 아늑했다. 경사가 야트막해서 고생스럽지도 않다. 게다가 소나무, 비자나무, 차나무 등 자생하는 초목이 천연림을 이루고 있어 눈이 청량해진다. 뒤에 알아보니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단다.
차가운 공기를 허파 깊숙이 밀어 넣으며 오르는 길 끝, 정자 하나가 멀리 보였다. 해월루였다. 역광으로 들어오는 볕 때문에 화려한 후광이 감싸고 있었다. 홀린 듯 가서 정자에 오르니, 강진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혜장 스님도 다산도 이곳(그땐 이 정자가 없었겠다)에서 함께 강진만을 봤으려나. 해월루는 후련함이 느껴지는 뷰 맛집이다. 카메라에 담아 보려 했지만, 역광이 말썽이었다.
붉은 동백보다 진한 우정
“봄이 됐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련사에는 벗 혜장 스님이 있었고, 찾아갈 참이었다. 벗이 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 스님은 다산에게 목마름을 해갈하는 감로수였다.
“우연찮은 해우에 갖은 시름 다 잊다가 헤어지면 마음 아파 그저 생각뿐인데, 때마침 들녘 절간 찾아 껄껄대는 웃음 속에 불법을 묻는다.”(혜장 스님이 다산에게 보낸 편지 중)
혜장 스님에게도 다산은 도반이었다. 스님은 해남 대흥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고, 다산과 배움을 주고받았다. 다산 역시 혜장 스님의 학식에 놀라 스님을 선비처럼 대접했단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았고,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겼다. 비 내리는 깊은 밤에도 기약도 없이 서로를 찾아, 절도 초당도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단다.
혜장 스님이, 다산이, 벗을 찾아서 혼자 걸었을 모습을 상상했다. 같이 걸었을 땐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그 우정의 깊이를 헤아리기 벅차다.
강진에 유배 4년, 1805년 다산은 백련사에서 밤을 지새운다. 고독? 아니다. 토론 탓(?)이다. 백련사의 혜장 스님을 찾아가 『주역』과 『역경』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단다. 다산은 혜장 스님을 만나자마자 경학에 밝은 식견을 찬탄했고, 혜장 스님도 다산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혜장 스님은 동문 밖 주막집에 머무는 다산에서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옮기도록 주선하기도 했단다. 이 무렵 펜팔을 했다. 주고받은 서신을 모아 엮은 게 『견월첩(見月帖)』이다.
자료를 보다 뜻밖의 사실도 알았다. 다산이 다산초당에 머문 게 해남 윤씨 자제들을 가르치려던 뜻도 있었지만, 당시 백련사 주지 혜장 스님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였다고. 그 옛 오솔길이 지금보다 거칠었겠지만, 40분 정도면 서로에게 닿을 수 있으니 그럴만했다.
가슴 아파도, 목이 메어도
사실 혜장 스님보다 다산이 10살 형이다. 유가의 경학자와 불교의 출가수행자라는 차이도 있었다. 그런데도 둘은 벗이 됐다. 파격적인 사이인 셈이다. 혜장 스님은 대흥사에서 29살 나이에 강백(講白, 경론 가르치는 강사의 존칭)을 지냈다. 당시 유가와 도가에도 관심이 많았던 대흥사 가풍에서 정진한 스님에게 경학에 밝은 학자 다산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겠다. 혜장 스님에게 ‘부드럽기가 어린아이 같이하라’는 의미로 호 ‘아암(兒庵)’을 지어 준 사람이 다산이다.
혜장 스님은 대흥사에 있던 초의(草衣, 1786~1866) 스님과 다산의 교유를 주선했다. 초의 스님은 혜장 스님을 통해 1809년 다산초당에서 다산을 만났고, 혜장 스님이 입적한 뒤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고 한다. 나중에 초의 스님이 조선의 사대부와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유학적 터전은 다산에게 받은 셈이다.
지금, 여기 그러니까 이 우정의 길은 혜장 스님과 다산의 애틋한 사연 그리고 백련사에 들러 다산을 보러 가던 초의 스님의 자취가 담긴 길이다. 특히 혜장 스님과 다산이 서로가 그리워 하루가 멀다고 오갔고, 한참 정담을 나눈 후 밤늦게 돌아와서도 다시 가서 보고 싶을 정도였단다.
운명이었다. 혜장 스님은 39살, 일찍 입적했다. 가슴 아파도, 목이 메어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다산은 몹시 슬퍼했단다. ‘아암(兒巖) 장공(藏公)의 탑명(塔銘)’을 써서 스님을, 벗을, 도반을 기렸다. 다산은 이 글에 스님을 처음 만나 『주역』을 논하던 광경을 선명하게 글로 썼다.
다산초당을 서성이다
이래저래 우정을 곱씹다가 불현듯 오른쪽에 건물들이 보였다. 왼쪽에는 정자 하나가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 같았다. 안내판을 살폈다. 천일각이었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이다.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었단다. 정조와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땐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으리란 추측으로 강진군이 1975년 세운 정자였다.
미련 없이 동암(東庵)으로 내려갔다.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000여 권의 책을 갖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은 건물이다.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 시간을 동암에 머물며 집필했다고 한다.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을 적은 『목민심서』가 완성된 곳이다.
조금 더 내려가니 아늑한 공간에 못과 한옥 하나가 보였다. 못은 ‘연지석가산’, 한옥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사실 다산초당보다 연지석가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산초당의 고즉넉함을 더해주는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서 있는 돌탑을 가리킨다.
백서사건에 연루된 다산이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강진으로 유배와 지낸 곳이다. 강진에서 처음 머문 공간은 아니다. 주막 할머니 배려로 강진읍 동문 주막집 뒷방에서 지냈단다. 절집, 제자의 집 전전하다 1808년 외가인 해남 윤씨가 마련해준 초당에 거처를 정했다. 이 초당이 다산초당이다.
노모와 함께 온 딸이 연신 사진을 찍었다. 노모는 동암 위치와 백련사 가는 방향을 물었다. 반대로 걸어온 터라 친절히 안내해 드렸다. 다산초당은 멋들어진 한옥 건물이었다. 후에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草堂)으로 다시 지을 계획이란다.
백련사를 서성이다
동백숲, 이파리 틈 파고들어 땅에 떨어진 볕이 보석처럼 빛났다. 백련사로 들어가는 길 곁에 놓인 여러 돌탑(이건 못 참아!)도 보석 같았다. 맘 급해 먼지 꽃 피운 붉은 동백하나 발견한 설렘 안고 백련사에 발을 들였다. 마침 사시예불 시간이었다. 스님의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맘 급해 먼저 꽃 피운 붉은 동백하나 발견한 설렘을 안고 백련사에 발을 들였다.
대웅보전 안에서 백련사의 시간이 흐를 때, 시선은 현판에 붙잡히고 말았다. 조선 3대 명필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이었다. 사람이 걷는 듯한 대(大) 자, 사람이 웅크린 듯한 웅(雄) 자는 대웅보전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대 국사 무역(801~888) 스님이 산 이름을 따서 만덕사(萬德寺)로 산문을 열었다고 알려졌다. 백련사를 중창한 국사 요세(1163~1245) 스님이 주창한 백련결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도량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시기, 정치와 종교는 제 기능을 잃었고 몽골과 왜구 침략으로 피폐해진 민중의 삶에서 희망을 열고자 벌인 게 백련결사였다. 민중과 함께 참회와 염불 수행으로 정토세계를 염원하는 민간 결사운동이었다.
또 하나! 백련사는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불교에 귀의하고 입산한 사찰이라고 한다. 8년간 큰 법회를 열고, 수륙재를 지내기도 했단다. 조선 말,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서울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우리에게 익숙한 서산 대사, 즉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의 의발을 받은 스님 8명이 백련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사시예불이 끝났다. 다시 대웅보전 편액을 올려다봤다. 사람이 걷는 듯한 대(大) 자, 사람이 웅크린 듯한 웅(雄) 자…. 백련사가 역사로 증명한 불교의 역할이 아른거렸다.
벗이 그리울 땐, 문 열어두자
3월 말이면 백련사에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는 동백의 꽃말, 백련사에는 그 붉은 동백꽃만 있는 게 아니더라. 우정길에는 혜장 스님과 다산의 서로를 향한 그리움과 설렘이 걸음마다 뚝뚝 묻어났다. 기약 없이 찾아올 벗을 위해, 밤 깊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둘 일이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놓았다네”
- 『견월첩(見月帖, 혜장과 다산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 중
백련사 우정길 여정
코스 : 강진 백련사 주차장~일주문~해탈문~동백숲~해월루~다산초당
거리 : 왕복 약 2km
시간 : 왕복 1시간 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