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道]은 여러 갈래입니다. 행복을 찾는 길, 즐거움을 좇는 길, 나아가 깨달음을 구하는 길 등등. 어찌 보면 여행이고 수행이자 순례이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 둘러 길 걸으면서 절에 들러보는 여행이자 순례길을 걷습니다. 발이 젖으려면 물가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광미디어가 아름다운 길 찾아 절로 함께 걷습니다. 사진은 아이폰으로 촬영했습니다.
깐부? 아니 소리길
그날이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깐부’ 오영수 배우가 주왕산국립공원의 72시간을 목소리로 연기한 날이었다. KBS 2TV <다큐멘터리 3일>이 방영됐다는 11월 7일, 주왕산 들러 가야산으로 향했다. 소리길에 올랐다.
들머리는 대장경 테마파크 주차장이었다. 여기서부터 소리길 시작이다. 사실 1km 더 걸으면 소리길 탐방지원센터가 나오는데, 본격적인 소리길 시작점이었다. 테마파크 주차장부터 시작하는 소리길 초입은 나무로 된 데크를 걷고, 탐방지원센터부터는 산길이다.
테마파크 주차장 들머리에는 ‘소리길’이라는 이름이, 탐방지원센터에는 ‘가야산 소리길’이라는 이름이 내걸렸다. 이름이 몇 개로 불리는 이유가 궁금했던 대목이었다. 소리길은 ‘가야산 소리길’, ‘해인사 소리길’ 등으로 불린다. 가야산에 길도 있고 해인사도 있으니 그냥 ‘가야산 해인사 소리길’로 통칭하기로 했다. 줄여서 그냥 소리길. 소리길은 홍류동 옛길을 복원하고 다듬어서 홍류동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걷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탐방로다.
미련 없는 가야산
가야산은 미련이 없었다. 소리길 초입, 홍류동 계곡 억새도 길 곳곳 나무들도 겨울 채비에 들어갔다. 11월 초는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가야산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맞다. 오고야 마는 계절이 겨울이다. 바람은 이미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고, 가야산은 긴 겨울 버틸 준비에 바빴다.
소리길 곳곳에서 카메라 들고 추억을 담아갔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는 중년 부부, 연인,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홀로 걷는 몇몇이 그랬다. 이미 알고 있었다.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졌다. 애써 외면하며 가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일까? 소리길이 심심치 않게 단풍을 내밀었다. ‘빨갛다’라는 느낌보다는 약간의 빛바램이 더 좋았다. 절정의 타오름이 뜨겁다면, 따뜻해 보여서다. 성급해 보이지도 않았다.
흙길과 바위 곳곳에 흩뿌려진 낙엽이 먼저 눈에 밟혔다. 과연 소리길이었다. 길은 바스락거렸고,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는 찼다. 겨울엔 어떤 길을 보여줄지 벌써 기대되는 길이었다. 기대와는 다르게 체력은 금세 바닥났다. 주왕산을 8km 걷고 남은 체력 탓이겠지만, 스스로 격려할 수밖에. 그러기엔 살짝 오르막인 소리길의 끝은 한참 멀어 보였다.
홍류동 계곡 따라
“산형은 천하에 절승하고, 지덕은 해동에서 제일이다.”
조선 시대에 조선 팔경 중 하나가 가야산이란다. 나라에서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인 셈이다. 그래서 나라는 1966년 6월 가야산국립공원을 1966년 6월 사적 및 명승지 제5호로 지정한다. 가야산국립공원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걸쳐 자리했는데, 정상인 상왕봉은 해발 1,430m이다. 멀리서부터 바라봐도 절경이 바로 가야산이었다.
주왕산도 그랬지만, 역시 물이다. 길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귀를 즐겁게 했고, 발걸음을 쉬게 했다. 소리길 매력이 여기 있다. 홍류동 계곡이다. 해인사 입구까지 4km에 이르는 계곡으로 봄에는 꽃, 가을에는 단풍으로 계곡이 물든다. 오죽하면 붉은색이 계곡물을 물들인다고 해서 ‘붉은 홍(紅)’자가 들어간 홍류동(紅流洞) 이름이 붙었을까. 사방이 붉은색으로 물든 홍류동을 못 봐서 아쉬웠지만,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물줄기로 눈과 귀는 즐거웠다.
소리길 곳곳의 푯말에 적힌 시가 홍류동 계곡의 멋을 전했다. 한자로 시 짓기를 즐겨 삼던 식자층이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곳이긴 했다. 시마다 계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냥 시다. 무릉도원을 상상하며 가야산을 바라보는 곳 ‘갱멱원(更覓源)’, 계곡에서 흘러온 꽃잎을 따라 올라가는 곳 ‘축화천(逐花川)’,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다리 ‘무릉교(武陵橋)’, 북두칠성에 예향 하던 곳 ‘칠성대(七星臺)’, 선인 내려와 피리를 불던 바위 ‘취적봉(翠積峰)’, 풍월을 읊는 여울 ‘음풍뢰(吟諷瀨)’, …. 아직 멋 한 개가 더 남았다. 수석과 산림이 가장 아름다운 계곡 ‘홍류동(紅流洞)’.
春風躑躅發層巒 봄바람에 철쭉이 온 산봉우리에 피어나니
膩漲臙脂水鏡間 거울 같은 물속에 붉은 연지 가득하구나.
若使重移楓葉景 만약 단풍 붉은빛을 다시금 옮긴다면
溶溶錦浪半函山 크고 넓은 비단 물결에 반쯤은 잠기리라.
부처님도 누워 쉬는 곳
칠성대 지나, 조금 더 힘을 내니 쉼터에 다다랐다. 돌탑이 곳곳에 놓였길래 잠시 쉬어가자고 앉았는데, 뒤통수가 섬뜩했다. 묘한 시선을 느끼며 돌아보니, 부처님이다. 쉼터라더니, 부처님도 누워계신 곳이다. 작품명은 ‘바위에 갇힌 부처를 보다’. 박상희 작가가 걷다가 힘들 땐 기도하며 쉼터가 되어주기도 하는 그런 부처님을 바위에 새기고자 했단다.
여기서부터다. 홍류동 계곡보다 소리길 자체가 매력을 발산한다. 영화 <타짜>였던가. 아귀(김윤석 분)를 속이는 고니(조승우 분)는 스승의 말을 되뇐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눈이 정신없는 사이에, 손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손은 눈보다 빨랐다. 홍류동 계곡도 예뻤지만, 길 자체도 예뻤다. 소나무 군락 사이사이로 길이 굽이굽이 흘렀다. 평경장(백윤식 분)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아수라 발발타, 아수라 발발타 주문을 외우듯 ‘이건 찍어야 돼’를 중얼거리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길 따라 굽이굽이 걷다 작은 정원을 마주했다. ‘소리길 소(小) 생태계’다. 기후변화와 환경파괴 등으로 보금자리를 잃은 작은 생물들을 위한 공간이자, 서식지 간 연결을 돕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단다. 여러 곤충과 개구리, 올챙이, 우렁이 등 다양한 생물을 볼 수 있다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차가운 바람 피해 숨었다.
법보종찰 해인사, 길상암 그리고 하심
홍류동 계곡 너머 ‘법보종찰 해인사’ 편액이 어른거렸다. ‘다 왔다’라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섣불렀다. 여전한 소리길의 매력은 지친 걸음마저 움직였다. 저 멀리 보이는 탑과 합장하는듯한 사람의 실루엣에 홀린 듯 다시 걸었다.
길상암이었다. 1972년 영암 스님이 창건한 암자로,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단다. 가파른 계단은 전의를 상실케 했다. 멀리서 합장 반배로 인사 올리고, 다리를 건넜다. 괘씸했을까? 곧 ‘하심’이 나타났고, 다시 길상암 쪽으로 합장 인사를 올렸다.
재차 나를 낮추니, 소리길은 무심하게 선물하나 던졌다. 꽃이 떨어지는 소 ‘낙화담(落花潭)’이었다. 시 한 편 곁들이면 탄성을 자아낸다.
風雨前霄鬪澗阿 어젯밤 풍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
滿潭流水落花多 못 가득히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더라.
道人猶有情根在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가 남아있어
雙淚涓涓添綠波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
안부를 묻지 못한 멧돼지
가야산에 밤이 기어 들어왔다. 그리고 소리길에 배가 고픈 멧돼지도 등장했다. 몇몇은 깜짝 놀라 소리 지르며 숨었지만, 멧돼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소리길 내려오던 이는 “아직 그 멧돼지 있을까”라며 별일 아닌 듯 말을 꺼냈다. “올라오며 보니 아직 있습니다”라고 말을 전했다. 매일 멧돼지를 친견한다는 해인사 국일암 명법 스님이 “개체 수가 늘어서 먹이 구하기가 어려워 성보박물관 근처까지 내려갔다”라고 했다.
멧돼지 안부를 더 물을 여유가 부족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소리길은 사진에 담기 어려웠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을 거쳐 도량으로 향하는 소리길 끄트머리도 놓치기 싫은 풍경이었다. 가야산은 틈을 주지 않았다. 해인사를 참배하지도 못했다. 일주문에 도착할 즈음, 해는 이미 졌다.
미리 밝힌다. 이제부터 사진은 불광미디어 데이터베이스에서 빌려왔다. 해인사를 참배하지 못했지만, 천년고찰 해인사에 숨겨진 과학과 신심을 이야기해야 하니까!
천년고찰에 숨겨진 과학과 신심
해인사는 법보종찰(法寶宗刹)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긴 팔만대장경을 보존하는 도량이라서 법보종찰이다. 이 팔만대장경은 장경판전에 있는데, 여기에 놀라운 과학이 있다. 5개 층으로 구분된 판가(板袈·경판꽂이)에 촘촘히 꽂혀 있는 대장경판을 보면 큰 도서관의 서고와 닮았다. 경판을 두 단씩 세워 놓도록 단을 둬서 공기가 잘 통하게 했다. 장경판전 바닥은 땅을 깊이 파서 숯, 찰흙, 모래, 소금, 횟가루를 뿌렸다. 비가 많이 와서 습기가 차면 바닥이 습기를 빨아들이며, 반대로 가뭄 때 바닥에 숨어 있던 습기가 올라와 습도 조절을 스스로 해준단다. 장경판전 전면과 후면에 있는 붙박이 살창의 방향이 통풍을 좋게 만들기도 한다고. 맞다. 목재의 수분 관리 기능이 완벽한 건물이 장경판전이다.
이 장경판전에 우리가 팔만대장경으로 부르는 고려대장경이 있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 등 삼장(三藏)을 일컫는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담겼다고 보면 된다. 고려 시대에 간행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8만 1,258장에 달하는 판에 8만 4,000 법문을 실었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장경판전 법보전에는 『화엄경』 등 대승불교 경전이, 수다라장에는 『아함경』 등 초기불교 경전이 보관돼 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은 무려 5,200만 개에 달하는 글자가 오자 하나 탈자 하나 없이 고르고 정밀하다. 강화도 선원사에 있었지만, 조선 초인 1399년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후 600년 넘게 이곳에서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경판에 먹을 발라 한지에 찍으면 글자 한 자 한 자가 또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맞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1995년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수다라장과 법보전, 고려 각판을 보관하는 동서 사간판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팔만대장경은 기록유산으로 등록했다.
이 모든 것을 볼 수가 있다! 해인사가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국민에게 팔만대장경의 문을 열었다. 팔만대장경 순례 인터넷 사전예약 탐방제를 실시하고 있다. 눈앞에서 보는 기회를 놓치지 않길….
헤어지자, 가을 그리고 소리길
밤과 몸을 섞은 가야산은 해인사 참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딱 좋았다. 더 오를 기력도 없는 참이었다. 일주문 야경을 찍고, 택시를 타고 들머리로 돌아왔다. 소리길은 어땠나, 소리길의 가을은 어땠나…. 돌아오는 길에 되새겼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았다. 글을 쓰는 11월 30일, 비가 오는 오늘 가을은 갔다. 가을도 단풍도, 소리길도 그만 놓아줄 때다.
헤어지자/ 상처 한 줄 네 가슴 긋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자// 수없이 헤어지자/ 네 몸에 남았던 내 몸의 흔적/ 고요히 되가져가자// 허공에 찍었던 발자국 가져가는 새처럼/ 강물에 담았던 그림자 가져가는 달빛처럼// 흔적 없이 헤어지자/ 오늘 또다시 떠나는 수천의 낙엽/ 낙엽(도종환 ‘낙엽’ 전문)
수없이 헤어지자, 상처 한 줄로 가슴 긋지 말고. 헤어지자, 가을 그리고 소리길.
소리길 여정
코스 : 대장경 테마파크~소리길 탐방지원센터~칠성대~소(小)생태계~매표소~농산정~길상암~낙화담~물레방아~성보박물관~해인사
거리 : 편도 약 8km
시간 : 2시간 50분(편도, 휴식 20분)